티스토리 뷰

수필 읽기

춘천 막국수 / 김태길

부흐고비 2023. 4. 13. 05:19

코트에서 땀을 흘린 다음에 더운물로 목욕을 하고, 이어서 맥주 한 잔만 들게 되면, 더이상 바랄 것이 없다고 테니스를 좋아하는 친구들은 만족스러워한다. 그러나 그 정도의 즐거움을 누리는 것도 교수 사회에서는 쉬운 일이 아니다. 항상 시간에 쫓기는 일정이고, 때로는 주머니 사정이 추워서 귀가 길을 서두르곤 한다. 그날은 일진이 좋았던 모양이다. 네 사람은 ‘태양탕’을 거쳐서 ‘춘천 막국수’ 집으로 기세 좋게 달려갔다. 막국수 집은 평소처럼 붐비지 않았다. 우리가 들어간 방에는 삼십 대로 보이는 젊은 남자 세 사람이 상 하나를 점령하고 있을 뿐이었다. 우리는 여유 있는 기분으로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러나 조용하고 한가로운 분위기는 오래 지속되지 않았다. 옆자리를 차지한 젊은이들 가운데 한 사람이 고함을 치기 시작한 것이다. 글자 그대로 안하무인이었다. 접시를 나르는 여자 종업원이 조용히 해 달라고 사정도 하고 요청도 했지만 별로 소용이 없었다.

이미 음식이 들어온 뒤였으니 그대로 나갈 수 있는 형편은 아니었다. 술기운이 돌아서 기고만장한 젊은이를 권위 있게 꾸짖을 만한 객기도 없었고, 또 그런 꾸지람이 조용히 받아들여질 수 있는 세태라고 판단되지도 않았다. 일진이 끝까지 좋지는 못하다고 생각하면서 그들이 빨리 자리를 뜨기만을 기다렸다.

그러나 그들은 좀처럼 일어설 기색이 아니었다. 도리어 우리가 먼저 먹고 일어서는 편이 나을 것 같았다. 그러는 가운데 그들이 떠드는 사유가 무엇인지 대략 짐작이 가게 되었고, 그들의 언쟁에 도리어 흥미를 느끼기 시작했다.

“그래 이 자식아, 너도 사람이야! 네가 뭐 일류 대학을 나온 엘리트야! 이 개만도 못한 자식 같으니라구. 임마, 너 같은 놈을 친구라고 사귄 나 자신이 부끄럽다. 이 자식 아, 너 할 말 있거든 좀 해 봐라.......”

말끝마다 욕설이었고, 같은 말이 여러 번 되풀이되어 쏟아져 나왔다. 그런데 욕을 얻어먹는 편은 신통하게도 거세게 맞서지 않았다. 그저 형편이 그럴 수밖에 없어서 그렇게 하기도 한 것이니 너무 욕하지 말라고 사정을 하는 기색이었다.

“예이 못난 새끼야! 너 언제부터 그렇게 공처가가 되었니? 너 이놈아, 네 마누라하고 당장 이혼해라. 그런 여자 하나 휘어잡지 못하고, 이 자식아 그래 질질 끌려다니다가 결국은 홀어머니까지 버리고 미국으로 이민을 가? 이 못난 새끼야!”

“이 사람아 우리 그만 일어나세. 자네 오늘 좀 취한 모양이야. 자, 이제 그만 나가세” 하며 셋째 번 청년이 중간에 들어서서 말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흥분한 청년은 수그러지지 않았다.

“이 자식아, 너도 틀렸어! 친구라는 것이 도대체 뭐냐? 충고도 하고 바른말도 해야 친구지. 이 자식아, 그래 너같이 살살 비위 맞추고 아첨이나 하는 것이 친구냐. 쓸개 빠진 새끼들 같으니. 한심하다, 한심해.”

잠시 조용해졌다. 나는 그 청년의 말을 좀 더 듣고 싶었다. 고운 말을 사용하라는 교과서와는 동떨어진 말씨였지만, 그 내용에는 옳은 말이 많은 것 같았다. 저 사람들이 그만 일어서면 어쩌나 하고 속으로 걱정을 할 정도로 그의 발언에 흥미를 느꼈다. 다행히 상황은 계속 이어졌다.

“이놈아, 네가 외아들만 아니라도 나 이런 소리 안 한다. 너 대학까지 졸업시키느라 고 너의 어머니께서 얼마나 고생을 하셨냐? 그런데도 이 자식아, 너의 어머니만 떼어 놓고 너희들끼리만 해외로 이민을 가? 이놈아 가서 잘 살아라. 너의 어머니는 내가 맡으랴? 이 자식아, 말 좀 해 봐, 꿀 먹은 벙어리처럼 가만히 있지만 말고......”

대략 무슨 사연인지 짐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한국에서 요즈음 흔히 있는 부모와 자식 사이의 문제가 여기 또 하나 일어나고 있음이 분명했다. 과부가 된 어머니가 인생의 모든 희망을 오로지 자식 하나에 걸고 온갖 노고를 아끼지 않는다. 고생한 보람이 있어서 아들은 대학을 마치고 돈 있는 집 규수와 결혼을 한다. 새 식구가 된 며느리의 안목으로 볼 때, 시집의 분위기는 구질구질하기 짝이 없다.

아파트를 장만하고 가구를 새로 들여놓는다해도 그 분위기가 근본적으로 달라지기는 어렵다. 구식 사고방식이 속속들이 스며든 시어머니가 한 지붕 밑에 도사리고 있는 이상, 도무지 살맛이 나지 않는다. 멀리 떨어져서 따로 사는 것만이 근본적인 대책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아주 멀리 떨어지는 길은 해외로 이민을 가는 길이다.

자식이 부모를 버리고 제 행복만을 추구하는 사례는 흔히 있는 일이지만, 친구의 입장에서 대놓고 욕을 하며 충고하는 일은 흔히 있는 일이 아니다. 그러한 친구의 과격한 비난을 조용히 들어주며 참는 것으로 보아, 이민을 가기로 한 젊은이도 아주 악독한 사람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계획을 바꿀 수 있을 정도로 결단력이 있어 보이지는 않았다. 아마 결국은 이민을 가고 말 것이다.

팔십 고개를 바라보는 어느 원로 학자의 말이 생각났다. 노후의 불행을 막기 위해서는 세 가지 조건을 갖추어야 한다고 그분은 거듭 강조하는 것이었다. 첫째는 부부가 해로해야 하고, 둘째는 건강해야 하며, 셋째는 자식에게 손을 내밀지 않고도 살아갈 수 있을 정도의 재산을 쥐고 있는 일이라고 하였다.

아마 옳은 말일 것이다. 그러나 그 세 가지 조건이 어찌 우리들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일이랴. 운명을 이야기하는 것은 현대인답지 않은 일이지만, 개인의 힘만으로 사람답게 산다는 것이 매우 어려운 세상이라는 것을 새삼스럽게 느껴야 한다.

언성을 높여 욕설을 퍼붓던 젊은 친구도 이젠 지쳤는지 조용해졌다. 술을 더 가져오라고 종업원을 부르는 친구를 저지하며 그는 비틀거리며 일어섰다. 함께 온 친구들도 동시에 일어섰다.

갑자기 조용해진 분위기가 오히려 쓸쓸하게 느껴졌다. 우리도 일어서기로 하였다. 막국수 집에 들어설 때처럼 가벼운 기분은 아니다. 바깥 공기가 피부에 쌀쌀하게 와 닿는다. (1985. 11.)
 



김태길(1920~2009): 수필가, 철학자. 호는 우송(友松). 충북 충주 출생. 일본 동경대학 법학부 수학, 서울 문리대 철학과 졸업. 동 대학원 졸업, 미국 Johns Hopkins 대학원 철학과 졸업(철학박사). 도의문화저작상 수상했으며, 서울대학교 교수, 철학연구회 회장, 대한민국학술원 회장 등을 지냈다.
주요 저서로는 『윤리학』, 『한국 대학생의 가치관』, 『존 두이』, 『새로운 가치관의 지향』, 『웃는 갈대』, 『변혁 시대의 사회 철학』, 『빛이 그리운 생각들』, 『검은마음 흰마음』, 『마음의 그림자』, 『삶을 어디서 찾을 것인가』, 『흐르지 않은 세월』 등 다수가 있음.

'수필 읽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구두와 넥타이 / 김태길  (0) 2023.04.14
남자다운 남자와 여자다운 여자 / 김태길  (0) 2023.04.13
정(情) / 김태길  (0) 2023.04.13
정원수 / 김태길  (0) 2023.04.10
고목 / 김태길  (0) 2023.04.10
공지사항
최근에 올라온 글
최근에 달린 댓글
Total
Today
Yesterda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