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10여 년 전 일이다. 어느 친구의 집을 방문했을 때, 현관에 진열된 여자용 신발이 열 켤레도 넘는 것을 보고 내심 놀란 적이 있다. 친구 내외가 모두 외국에서 여러 해 살다 온 사람들이었고, 부인도 직장에 나가는 유복한 가정이었다. 신장 대용으로 쓰이는 외국산 신걸이가 현관 벽에 걸려 있었고, 그 신걸이에 물고기 비늘처럼 줄지어 꽂혀 있는 여자용 신발이 열 켤레도 넘는 것을 보고 약간 놀랐던 것이다. 20여 년 전에 미국 어느 잡지에 실린 넥타이 광고를 보고 놀란 적도 있다. 일곱 개의 넥타이를 한 세트로 묶어서 파는 것이었는데, 요일마다 하나씩 갈아 매도록하기 위하여 일곱 개를 한 묶음으로 한 것이었다. 그 당시 나는 춘하추동 계절에 따라서 갈아 맬 수 있도록 서너 개의 넥타이밖에 가지고 있지 않았던 터라 요일마다 갈아 맨다는 이야기에 기가 죽었던 것이다.
나는 오늘 문득 생각이 나서 우리 집 신장을 조사해 보았다. 내 구두가 세 켤레 있었고, 여자용은 열두 켤레 반쯤 되었다. 끈이 떨어져서 그대로는 신을 수 없는 것을 반 켤레로 계산한 것이다. 내것 세 켤레 가운데 하나는 아주 낡아서 가까운 산에 갈 때나 신는 것이고, 여자용 구두의 대부분은 시집간 딸들이 남겨 두고 간 것들이라는 점을 감안한다 하더라도 40년 또는 50년 전과 비교할 때는 실로 놀라운 소비 수준이 아닐 수 없다.
초등학교에 다닐 때 나는 운동화를 한 번 신어 보는 것이 소원이었지만 끝내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운동화보다는 경제적인 고무신을 신었는데, 새 고무신을 샀을 때는 오늘로 말하면 새 양복을 맞추어 입었을 때보다도 더 기뻤다. 그 당시에는 고무신이 귀중품이었다. 운동회와 학예회 같은 큰 행사가 있는 날 새 고무신을 잘못 간수하면 십중팔구 도난을 당하기 쉬웠고, 고무신을 한 켤레 잃는다는 것은 결코 사소한 일이 아니었다.
고무신 가운데서도 흰 고무신은 더욱 희귀한 물건이었다. 흰 고무신은 주로 여자의 사치품으로 애용되었으며, 50년 전에 그것을 갖는다는 것은 오늘의 밍크코트에 비길 만한 호사스러운 일이었다. 흰 고무신을 가지고 있는 부인들도 평소에는 신지 않고 아껴두었다가 큰 나들이가 있을 때만 사용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우리 어머니는 나들이 때 사용하신 흰 고무신을 반드시 비눗물로 씻어서 안방 장롱 밑에 간직하셨다.
오늘 신장을 살펴보았을 때, 우리 집에도 여자용 흰 고무신이 한 켤레 있었다. 그러나 옛날의 그 고귀한 모습은 아니었다. 때가 묻은 초라한 모습으로 신장 아래 칸에 아무렇게나 버려져 있었다.
오늘 내친김에 나는 넥타이가 걸려 있는 양복장 문도 열어 보았다. 자세히 헤아려 보지는 않았지만, 모두 합치면 대충 20개쯤 될 것 같았다. 그 가운데 반수 이상 은 10여 년 묵은 고물들이었지만, 아직도 사용할 수 있는 것을 일곱 개쯤 고르는 일은 별로 어렵지 않을 것 같았다. 양복 빛깔과의 조화만 무시한다면 요일마다 다른 넥타이를 매고 다닌다는 것이 어렵지 않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내 손으로 넥타이를 사 본 지가 몇 해나 되는지 기억이 몽롱하다. 아마 최근 10년 동안에는 그런 일이 없었을 것이다. 생일 선물이라고 아들이 사 온 것도 있고, 외국 여행에서 돌아올 때 친구들이 사다 준 것도 있으며, 주례를 섰을 때 생긴 것도 있다. 모두 정표(情表)로서의 뜻이 담긴 물건인 까닭에 버리지 않고 아껴두게 마련이지만, 어떤 연유에서든 내 옷장에 20여 개의 넥타이가 걸려 있다는 사실은, 모르는 사이에 우리네 소비 생활이 제법 사치스러워졌음을 단적으로 말해 준다.
빚을 내서 구두를 산 것은 아니며, 나쁜 짓을 하고 넥타이를 얻은 것도 아니다. 별로 무리하지 않고 그렇게 된 것이라면 구두나 넥타이의 숫자에 굳이 신경을 쓸 이유는 없을 것도 같다. 보기에 따라서는 우리도 이제 그만큼 잘살게 되었다고 대견하게 생각할 일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역시 무엇인가 죄를 짓고 사는 것 같은 불안감이 스쳐간다.
모든 사람이 각각 세 켤레의 구두와 스무 개 이상의 넥타이를 가질 수 있는 것이라면, 나도 그만한 물건을 가지고 있는 것에 죄의식을 느낄 이유는 없을 것이다.
그리고 지구에 남은 석유와 석탄이 무진장이고 세계 인구의 증가가 없다면, 경우에 따라서는 사치가 도리 어 멋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실정은 부담 없이 소비를 즐기기에는 너무나 다난하다.
문상갈 일이 있어서 성남시 주택가를 방문한 적이 있었다. 한 가옥에 보통 너덧 개의 텔레비전 안테나가 옥상에 설치되어 있는 것이 눈길을 끌었다. 비록 셋방살이를 하더라도 집집마다 텔레비전을 가질 수 있다는 사실은 일단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좋을 듯하다.
그러나 어디엔가 아직도 많은 문제가 남아 있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느끼게 된다.
‘엿을 먹인다’는 말은 본래 ‘비행기를 태운다’는 말과 같은 뜻의 속어이다. ‘그림의 떡’이라는 말도 있고 ‘꿈에 떡맛 보기’라는 말도 있다. 엿 또는 떡이 대단히 귀한 물건이던 시절에 생긴 말들일 것이다. 이제는 엿이나 떡 정도는 대중 식품에 속할 정도로 우리들의 경제는 발전했다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그러나 허리띠를 풀어놓고 풍요로움을 구가하기에는 아직도 너무나 많은 문제들이 남아 있는 것으로 보인다. (82.3.8)
김태길(1920~2009): 수필가, 철학자. 호는 우송(友松). 충북 충주 출생. 일본 동경대학 법학부 수학, 서울 문리대 철학과 졸업. 동 대학원 졸업, 미국 Johns Hopkins 대학원 철학과 졸업(철학박사). 도의문화저작상 수상했으며, 서울대학교 교수, 철학연구회 회장, 대한민국학술원 회장 등을 지냈다.
주요 저서로는 『윤리학』, 『한국 대학생의 가치관』, 『존 두이』, 『새로운 가치관의 지향』, 『웃는 갈대』, 『변혁 시대의 사회 철학』, 『빛이 그리운 생각들』, 『검은마음 흰마음』, 『마음의 그림자』, 『삶을 어디서 찾을 것인가』, 『흐르지 않은 세월』 등 다수가 있음.
'수필 읽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실언 / 김태길 (0) | 2023.04.17 |
---|---|
나라는 것이 것이 무엇이기에 / 김태길 (1) | 2023.04.17 |
남자다운 남자와 여자다운 여자 / 김태길 (0) | 2023.04.13 |
춘천 막국수 / 김태길 (0) | 2023.04.13 |
정(情) / 김태길 (0) | 2023.04.13 |
- Total
- Today
- Yesterda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