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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직업과 삶의 보람 / 김태길

부흐고비 2023. 4. 18. 08:54

어떤 기업체 여직원들이 모인 자리에서 다음과 같은 물음을 던져 본 적이 있다. "직업이라는 것이 쉽게 말해서 무엇입니까?"

망설이는 듯 아무도 대답을 하지 않기에 가장 가까운 자리의 아가씨에게 말을 시켰더니, "삶에 필요한 돈을 벌기 위해서 하는 일입니다" 하고 초롱초롱한 눈으로 대답했다. 직업의 가장 큰 뜻이 돈벌이에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그 아가씨 이외에도 많이 있다. 아마 대부분의 직업인들이 그렇게 생각하는지도 모른다. 돈의 힘이 압도적인 오늘의 사회적 상황이 우리로 하여금 그렇게 생각하도록 만든다.

직업의 큰 뜻이 돈벌이에 있다고 보는 까닭에 사람들은 돈의 손짓을 따라서 좌우로 흔들린다. 돈이 생기는 일이라면 사회에 해독을 끼치는 방법도 사양하지 않고, 돈만 더 준다면 미련 없이 새로운 직장을 찾아 떠난다. 직업의 본뜻이 오로지 돈에만 있다면 돈의 행방을 따라서 움직이는 직장인의 태도를 나쁘다고 나무랄 이유가 없을 듯하다.

그러나 직업이란 본래 단순히 돈벌이만을 위한 수단은 아니다. 우리는 직업을 통해 사회적 존재로서의 책임을 분담하고 직업을 수행하는 가운데 나의 자아를 실현한다. 바꾸어 말하면, 직업에 따르는 사회적 책임을 다함으로써 떳떳한 사회인이 되고, 훌륭한 직업인이 되는 가운데 보람된 인격으로 성장한다.

옛날, 장인(匠人)들은 정성을 다해서 물건을 만들었다. 그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수입의 액수를 높이는 일이 아니라 좋은 제품을 만드는 일이었다. 시간과 노력을 아끼지 않고 오로지 탁월한 제품을 만드는 일에 전력했던 까닭에, 그 당시에는 일상생활의 실용을 위해서 만든 물건이 불후의 명품으로서 오랜 생명을 간직하기도 하였다.

옛날 신분 사회에서는 직업을 마음대로 선택할 자유가 없었다. 도공의 아들로 태어난 사람은 아버지를 따라 요업에 종사해야 했고, 석공의 아들로 태어난 사람은 싫든 좋든 정과 망치를 들어야 했다. 직업은 스스로 정하는 것이 아니라 하늘이 맡기는 숙명이었다. 그러한 뜻에서 천직(天)이라는 말에는 전근대의 여운이 스며 있다.

스스로 원해서 선택한 직업이 아니었음에도 운명에 순응하여 맡겨진 일에 정성을 다한 옛사람들의 태도는 측은할 정도로 순박하다. 어쨌든 이해타산을 모르고 순박했던 까닭에 그들은 후세에 길이 남을 가치를 창조하는 결과를 얻을 수가 있었다.

현대인은 각자의 소질과 취향을 따라서 원하는 직업을 선택할 자유를 가졌다. 옛사람들에 비해 얼마나 다행한 일인지 모른다. 강제로 떠맡겨진 직업이 아니라 스스로 선택한 그것에 우리는 더욱더 내 직업에 충실하고 책임을 다할 이유를 가졌다. 스스로 내가 선택한 일이므로 생애를 통해 그 일에 정성을 다하는 것이 보람된 삶을 위한 옳은 길이다.

그러나 우리는 지금 돈에 대한 관심이 지나친 가운데 불성실한 태도로 직업에 임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일 자체를 훌륭하게 하고자 하는 마음보다도 돈을 벌고자 하는 마음이 앞서기도 하고, 근시안적 이해타산을 따라서 쉽게 직장을 바꾸기도 한다. 우리에게 주어진 귀중한 자유를 잘못 남용하고 있는 것이다.

결국 모든 문제는 삶의 궁극 목표를 어떻게 설정하느냐에 달려 있다. 많은 돈을 벌어서 물질적 풍요를 즐기는 것을 삶의 목표로 삼는다면 법이 허용하는 범위 안에서 수단을 가리지 않고 돈벌이에 열중하는 것이 당연한 생활 태도가 될 것이다. 만약 물질의 풍요를 즐기는 일보다 더 값진 삶이 없다면, 공연히 남의 눈치를 보며 망설일 이유가 없을 것 같다.

그러나 고작 물질의 풍요를 즐기는 일밖에 삶의 길에서 얻을 만한 것이 없다면, 인생이란 허망하기 짝이 없는 뜬구름 또는 꿈에 불과한 것이 되고 만다. 우리는 우리의 삶이 좀더 뜻있는 것이 되기를 염원하고 있으며, 또 그 염원이 실현 가능한 것으로 믿고 있다.

보다 뜻있고 보람찬 삶이 도대체 무엇이냐는 물음을 앞에 두고 여러 가지 철학이 여 러 가지 대답을 할 것이다. 그 대답의 하나로서 사회를 위해 도움이 되는 일을 하고 생 명이 오래갈 수 있는 무슨 값진 흔적을 남기는 것이 뜻있는 삶을 갖는 길이라는 대답도 가능할 것이다. 만약 이 대답에 일리가 있다고 생각한다면 우리가 맡은 일, 즉 직업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에도 진지한 변화가 있어야 마땅할 것이다. (1984. 9. 30.)



김태길(1920~2009): 수필가, 철학자. 호는 우송(友松). 충북 충주 출생. 일본 동경대학 법학부 수학, 서울 문리대 철학과 졸업. 동 대학원 졸업, 미국 Johns Hopkins 대학원 철학과 졸업(철학박사). 도의문화저작상 수상했으며, 서울대학교 교수, 철학연구회 회장, 대한민국학술원 회장 등을 지냈다.
주요 저서로는 『윤리학』, 『한국 대학생의 가치관』, 『존 두이』, 『새로운 가치관의 지향』, 『웃는 갈대』, 『변혁 시대의 사회 철학』, 『빛이 그리운 생각들』, 『검은마음 흰마음』, 『마음의 그림자』, 『삶을 어디서 찾을 것인가』, 『흐르지 않은 세월』 등 다수가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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