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수필 읽기

어리석은 경쟁 / 김태길

부흐고비 2023. 4. 24. 08:12

소년 시절에 양(羊)에 관한 믿기 어려운 이야기 한 토막을 들은 적이 있다. 그놈들이 여름에는 서로 붙어서 자고, 겨울에는 서로 떨어져서 자는 습성을 가졌다는 것이었다. 여름에 붙어서 자는 까닭은 친구들을 더욱 덥게 만들기 위해서이고, 겨울에 떨어져서 자는 까닭은 친구들을 추운 그대로 내버려두기 위해서라고 하였다.

그 당시 나는 양을 착한 사람에 비유하고 염소를 악한 사람에 비유한 마태복음 25장의 구절은 몰랐지만, 양이라는 놈이 순하디 순하고 착하디 착한 동물이라는 생각은 가지고 있던 터였다. 교회의 주변이 아니더라도 '같이 순하다'는 말은 흔히 들을 수가 있었고, 목동이 양 떼를 모는 교과서적 그림을 볼 때마다 평화를 연상하곤 하였다. 그래서 양들에게 짓궂은 일면이 있다는 그 이야기는 아주 뜻밖이었고, 50년이 지난 지금도 기억에 남는 이야기가 되었다.

그 이야기를 들려준 분은 동물학자도 아니고 양을 기른 경험이 있는 분도 아니었다. 따라서 그 이야기가 어느 정도 정확한지는 알 수가 없고, 어떤 맥락에서 그런 이야기가 나왔는지도 생각이 나지 않는다. 아마 인간에게도 그 비슷한 심리가 있다는 뜻으로 한 이야기가 아니었을까 하는 추측이 가나, 한갓 추측에 지나지 않는다.

양에게 과연 그런 습성이 있는지 전문가에게 물어볼 기회를 갖지 못한 채 오늘에 이르렀다. 양을 직접 길러 보고 관찰할 기회는 더욱 없었다.

양을 길러 본 적은 없지만 개를 길러 본 적은 있다. 개를 길러 본 사람들은 대개 그놈이 정이 많고 의리가 두텁다고 칭찬을 한다. 나도 그 점이 마음에 들어서 개를 좋아하는 편이다. '개같은 놈'이라는 욕설도 있기는 하지만, 함부로 욕을 하기에는 너무나 사람을 따르는 선량한 동물이라고 믿어 왔다.

한때 두 마리의 개를 먹인 적이 있다. 십여 년을 기른 개 한 마리가 너무 노쇠하여 곧 죽을 것 같은 징조를 보였을 때, 이웃집 암캐가 새끼를 낳았다. 늙은 개가 죽은 뒤를 잇기에 좋은 기회라고 생각이 되어서 강아지 한 마리를 얻어왔던 것인데, 어린 강아지의 생명력에 자극을 받았음인지, 곧 죽을 듯하던 늙은 놈이 생기를 되찾았다. 결국 식량 사정을 생각하고 죄스러운 심정을 금치 못하면서 두 마리를 먹이는 꼴이 되고 말았다.

두 마리를 먹이면서 새로운 사실 하나를 발견하였다. 개라는 종족이 사람에 대해서는 착하고 충실한 동물임에 틀림이 없을지 모르나, 저희들끼리는 반드시 그렇지도 않다는 사실을 발견한 것이다. 먹이를 가지고 싸운다든지, 주인의 사랑을 더 받으려고 시샘을 하는 정도라면 그러려니 하겠는데, 그 정도에 그치지 않는 심술궂음이 있다는 것을 알고 놀란 적이 있다.

우리 집은 그 당시에도 식구들이 모두 일과가 바쁜 편이어서 개를 상대로 한가로운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따라서 개는 저희들끼리 그 많은 시간을 소화해야 할 처지에 놓여 있었으니, 두 놈의 사이는 자연히 가까워지리라고 믿었다. 그러나 그 예상은 멀리 빗나가고 말았다. 사이 좋게 장난을 하며 노는 기색은 별로 없고 으르렁거리며 싸우는 때가 많았던 것이다.

처음에는 작은놈이 늙은 놈을 두려워하고 그 앞에 썰썰 기었다. 그러나 수개월 뒤에는 작은놈이 중강아지로 자라게 되었고, 늙은 놈은 덩치만 컸지 힘은 없다는 사실이 알려지게 되었다. 그리고 그때부터 늙은 놈이 수난을 당하기 시작하였다. 늙은 놈은 귀찮다고 이리저리 피해 다니는데, 중강아지란 놈이 굳이 따라다니며 못살게 굴었던 것이다. 별다른 목적도 없이 늙은 놈 괴로워하는 꼴 보는 재미로 그렇게 짓궂게 구는 것으로 보이는 그런 양상이었다.

초등학교나 중학교에 다니는 소년들의 세계에 있어서 힘세고 짓궂은 아이들이 약하고 순한 아이들을 괴롭히는 경우가 있다. 물론 장난으로 그렇게 하는 것이겠지만 당하는 약자의 입장에 놓이게 되는 아이들에게는 보통 괴로운 일이 아니다.

나는 어렸을 때 초등학교를 외가에서 다녔다. 토요일이 되면 어머니가 보고 싶어서 20리 산길을 걸어서 우리 집으로 돌아갔다가 일요일 오후에 다시 외가를 찾아갈 때가 많았다. 그런데 그 산길을 걷는 동안 나는 긴장을 풀 수가 없었다. 산에서 나무를 하던 아이들의 눈에 뜨이는 것이 무서웠던 것이다.

산에서 나무를 하던 아이들에게 발견되면 십중팔구 그 아이들은 나에게 시비를 걸었다. 지나가는 사람의 길을 막고 공연히 시비를 거는 것이다. 그때만 하여도 사람들이 그리 포악하지는 않았으므로 폭행을 가하지는 않았으나, 지게 작대기를 꼬나들고 "너 어디 사는 놈이니?" 하면서 접근해오면 은근히 겁이 났다. 감히 대항할 기개를 보이지도 못하고, 큰 죄라도 지은 것처럼 숨을 죽이면 한참만에 "그만 가봐!" 하고 놓아주는 것이었다.

그 당시 그 지방 농촌에서는 초등학교에 다니는 아이도 별로 없었다. 그래서 나무꾼 아이들 눈에는 학생 차림으로 책보를 끼고 가는 내 꼴이 보기 싫었을 것이다. 그리고 학생을 혼내 주었다는 사실에 소박한 쾌감을 느꼈을 것이다.

요즈음 초등학교나 중학교에 다니는 소년들의 세계에 있어서 약한 아이들을 괴롭히는 심술에도 어린이들 나름의 이유가 있을지도 모른다. 공부 잘하는 아이들에 대한 시샘이라든지, 또는 잘사는 집 아이에 대한 미움의 심리 따위가 짓궂은 행동의 원천을 이루고 있다면 그것도 일종의 이유를 대신하는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정당한 이유가 될 수는 없으며, 다만 미숙한 어린이들의 심리로서 이해할 수 있을 뿐이다.

미숙하고 어리석은 심리는 어린이들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다. 멀쩡한 성인들의 세계에 서도 가끔 어리석기 짝이 없는 마음씨의 발동을 보게 된다. 버젓한 저명인사가 은근히 친지를 내려깎기도 하고, 겉으로 보기에는 멀끔하게 생긴 친구가 가만히 있는 사람을 공연히 헐뜯기도 한다. 깎아내리고 헐뜯음으로써 얻는 바가 아무것도 없을 경우에도 그렇게 하는 사람이 있다.

무의식중에 경쟁의식이 발동하기 때문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양이나 개의 경우도 그렇고, 어린 학생들이나 나무꾼 아이들의 경우도 그러하며, 멀쩡한 어른들의 경우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마음의 깊은 층에 깔려 있는 경쟁의식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새어 나오는 것이 아닐까.

경쟁의식의 기원은 살아남기 위한 경쟁에 있었을 것이다. 살아남기 위해서 경쟁이 불가피했던 상황에서 싹튼 경쟁의식이, 이제는 경쟁의 필요가 없는 상황에서도 작동을 한다. 살아가기 위해서 힘을 합해야 할 친구들까지도 경쟁 상대로 착각을 하고 쓸데없이 앞을 다툰다.

아득한 옛날에는 같은 가족 또는 씨족에 속하는 좁은 범위만이 한편이었을 것이다. 그 범위 밖에 있는 인간과 동물은 모두 생사를 걸고 싸워야 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인류 전체가 한편이 되어 지구 마을을 지켜야 할 단계에 이르렀다. 우리가 살아남고 우리의 자손들이 살아남아서 조상들이 이룩한 문화유산을 계승하고 발전시키기 위해서 가장 필요한 것은 싸움이 아니라 협동이요, 미움이 아니라 사랑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쓸데없는 일을 위해서 공연히 앞을 다툰다. 모두 함께 살아남기 위해서 가야 할 길을 외면하고 엉뚱한 길에서 맞서고 겨룬다. 나를 나타내기 위해서 친구들을 깎아내리기도 한다. 어떤 사람들은 좋은 옷으로 앞을 다투고, 어떤 사람들은 값비싼 보석으로 앞을 다툰다. 그리고 더러는 남을 누르고 자기가 앞서기를 꾀하는 사람도 있다. 조만간 모두 떠나야 할 짧은 삶의 길에서 기를 쓰고 앞을 다툰다.



김태길(1920~2009): 수필가, 철학자. 호는 우송(友松). 충북 충주 출생. 일본 동경대학 법학부 수학, 서울 문리대 철학과 졸업. 동 대학원 졸업, 미국 Johns Hopkins 대학원 철학과 졸업(철학박사). 도의문화저작상 수상했으며, 서울대학교 교수, 철학연구회 회장, 대한민국학술원 회장 등을 지냈다.
주요 저서로는 『윤리학』, 『한국 대학생의 가치관』, 『존 두이』, 『새로운 가치관의 지향』, 『웃는 갈대』, 『변혁 시대의 사회 철학』, 『빛이 그리운 생각들』, 『검은마음 흰마음』, 『마음의 그림자』, 『삶을 어디서 찾을 것인가』, 『흐르지 않은 세월』 등 다수가 있음.

공지사항
최근에 올라온 글
최근에 달린 댓글
Total
Today
Yesterda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