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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무료하기에 텔레비전을 작동시켰다. 화면에는 아프리카의 광활한 초원을 배경으로 사자 가족의 모습이 나타났다. 대여섯 마리의 어미 사자와 너댓 마리의 새끼 사자.

단란하고 평화로운 광경으로 보였다. 그러나 다음 순간에 화면은 바뀌어 처절한 생존경쟁의 현장을 연출하였다. 여러 마리의 암사자가 무리를 벗어난 한 마리의 얼룩말을 목표로 삼고 덤벼든다. 쫓고 쫓긴 끝에 결국 얼룩말은 처참한 모습으로 쓰러졌고, 사자 가족은 굶주린 배를 채우기 시작한다. 얼룩말의 참사가 사자 가족에게는 다시 없는 경사였다.

하지만 그 경사스러운 잔치도 오래 가지 않았다. 배고픈 하이에나의 무리가 떼를 지어서 나타난 것이다. '백수의 왕'이라기에 사자에게는 적수가 없는 것으로 생각했던 나의 무식을 비웃는 듯, 생사를 건 처절한 편사움이 벌어졌다. 여러 마리의 새끼 사자가 목숨을 잃었고, 어미 사자들의 두목이 크게 다쳤다. 앞발 하나를 못쓰게 된 것이다.

세 발로 걸어야 하는 부상자는 발하나를 질질 끌며 가족으로부터 떨어지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쓴다. 차마 보기가 어려울 정도로 처참한 모습이다. 다른 가족들이 걸음을 늦추거나 그 밖에 어떤 방법으로 부상자를 돌보아주었으면 좋겠는데, 그러한 배려는 전혀 하지 않고 이동을 계속한다. 이미 부상자는 우두머리의 자리에서 밀려난 모양이다. 가족의 무리가 멈추어서 휴식을 취하는 사이에 부상자는 죽을힘을 다하여 그들 곁으로 접근한다. 조금만 더 기다려주면 될 것 같아서, 보는 사람의 마음에도 희망의 빛이 든다.

그러나 가족들은 부상자를 기다려주지 않는다. 골칫거리가 가까이 오는 것을 따돌리기라도 하듯이, 그들은 도리어 먼 곳으로 사라진다.

"저, 저 저럴 수가 있나. 의리 없는 놈들 같으니. 젊은 것들에게는 저희 어미나 할미 뻘이 되는 직계 존속일 터인데, 저렇게 비정할 수가 있나.”

나는 혼잣말처럼 말했다.

"부상자와 행동을 같이 하다가는 저희들 자신의 생존이 위협을 받는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 아닐까요?"

옆에서 같이 보던 아들의 말이었다.

나는 그 전에 같은 프로에서 수사자의 비참한 말로를 화면을 통하여 지켜본 적이 있었다. 한창 힘이 좋던 시절에는 여러 마리의 암컷을 거느리고 제왕처럼 군림했던 수사자. 암컷들이 사냥에 종사할 때는 바라만 보다가 사냥에 성공하면 먹이에 가장 맛있는 부분을 먼저 먹어치우던 독재자. 그러나 그에게도 늙음을 피할 길은 없었고, 힘이 딸리게 되어 제왕의 자리를 자식 뻘되는 젊은 수놈에게 물려줄 수밖에 없었다.

권좌에서 물러난 늙은 사자는 졸지에 외톨이가 되었다. 옛 아내와 애첩들은 본척만 척했을 뿐 아니라 접근조차 못 하도록 쫓아버렸다. 항상 식량 부족으로 어려움을 겪는 터이라, 이제 아무런 쓸모도 없게 된 늙은 지아비와 먹이를 나누기가 싫었던 것이다. 늙은 사자는 굶주리며 혼자서 배회할 수밖에 없었으며, 마침내 어느 날 거친 들판에 쓰러져 마지막 숨을 거두고 말았다.

수사자의 말로가 비참한 것은 어쩌면 수사자 자신이 책임져야 할 자업자득일지도 모른다. 수사자는 젊고 힘이 좋았을 때, 암사자들에게 씨를 집어 넣어준 것밖에는 별로 한 일이 없다. 사냥에도 동참하지 않았으며 새끼 사자들을 보호하는 일도 외면하였다. 쉽게 말해서 노후에 대우를 받을 만한 공적을 일찍이 남긴 바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암사자의 두목의 경우는 사정이 다르다. 그는 사냥을 할 때도 항상 선두에 섰고, 하이에나와 같은 외적과 싸울 때도 몸을 사리지 않았다. 새끼들을 키울 때는 자신의 허기를 참으며 희생정신을 발휘한 엄마였다. 그러한 공로자가 적과의 싸움에서 큰 부상을 당한 것이다. 그 부상자가 저희들에게 짐이 된다 하여 소외시키는 것은 백수의 왕족답지 않은 비정이다.

텔레비전을 끄면서 나는 인간 가족을 생각했다. 인간 가족과 사자 가족의 차이는 얼마나 클까? 차이점보다는 공통점이 더 크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스쳐간다. 종족의 유지를 위한 본능도 비슷하고, 내리사랑의 경향이 강한 것도 비슷하며, 모성애가 부성애보다 강한 것도 비슷한다. 그리고 늙고 병들면 비극의 주인공이 된다는 점에 이르러 다소간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결국 대동소이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개인주의가 팽배해지면서 인간의 노후와 짐승의 노후 사이의 차이가 점점 줄어들고 있는 것이다.

효(孝)가 윤리의 근본이라고 역설하는 사람들의 견해에 나는 전폭적 찬동을 보류해 왔다. 젊은이들이 효도의 덕목을 강조하는 것이라면 눈물을 흘리며 감격할 일이지만, 이제 효도로 받들어야 할 부모는 돌아가시고 효도 받을 일만 남은 사람들이 효도를 외치고 나서는 것은 모양새가 좋지 않다는 생각에서, 나는 효에 대해서는 침묵을 지켜 왔다.

그러나 최근에 내 생각에 동요가 오기 시작했다. 효의 문제는 나 개인의 문제이기에 앞서서 인간 전체의 삶의 문제라는 점을 고려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앞으로 밀고 나온 것이다. 오늘의 젊은이들이 늙은이들을 비정하게 대우하면, 그들도 늙었을 때 역시 비슷한 대우를 후일의 젊은이들로부터 받게 될 것이다. 결국 악순환은 계속될 것이며, 모든 사람들의 노후는 비극의 색조를 띠게 될 것이다. 노인의 씨가 따로 있는 것은 아니다.

오늘의 젊은이들이 효도의 의미를 스스로 깨달을 기색을 보이지 않는다면, 누군가가 그들에게 효도의 바른길을 깨우쳐 줄 필요가 있을 것도 같다. 그러나 그것을 깨우치는 묘한 방안이 떠오르지 않는다. 섣불리 설교를 잘못하면 공연히 모양새만 우스워질 것이니 차라리 침묵을 지키느니만도 못하다.

인간이 짐승보다 낫다는 생각부터가 교만일지도 모른다. 대자연의 법칙을 따라서 살아갈 수밖에 없고, 우리는 현재 그렇게 살아가는 중이라고 믿는 편이 마음 편할 것 같기도 하다. 실제로 사자의 가족과 인간의 가족 그리고 모든 생물들이 대자연의 법칙을 따라서 삶과 죽음의 길을 밟고 있음에 틀림이 없다.



김태길(1920~2009): 수필가, 철학자. 호는 우송(友松). 충북 충주 출생. 일본 동경대학 법학부 수학, 서울 문리대 철학과 졸업. 동 대학원 졸업, 미국 Johns Hopkins 대학원 철학과 졸업(철학박사). 도의문화저작상 수상했으며, 서울대학교 교수, 철학연구회 회장, 대한민국학술원 회장 등을 지냈다.
주요 저서로는 『윤리학』, 『한국 대학생의 가치관』, 『존 두이』, 『새로운 가치관의 지향』, 『웃는 갈대』, 『변혁 시대의 사회 철학』, 『빛이 그리운 생각들』, 『검은마음 흰마음』, 『마음의 그림자』, 『삶을 어디서 찾을 것인가』, 『흐르지 않은 세월』 등 다수가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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