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을 건너야 할 나룻배는 보이지 않는다. 나룻배로 양쪽을 이어주던 뱃길은 끊어진 지 오래다. 커다란 돛에 팽팽한 바람을 담고 낙동강을 오르내리던 황포돛배도 흔적이 없다. 제방 위에 박제처럼 전시된 돛배의 모형만이 메마른 뭍에 닻을 내리고 젖은 그림자를 말리고 있을 뿐이다. 강의 내밀한 이력이 켜켜이 쌓인 강바닥을 콘크리트 다리로 우악스럽게 딛고 서 있는 무심한 삼강교가 세월의 비정함을 느끼게 한다. 세 강이 만난 곳이다. 태백에서 발원하여 모데미풀을 적시고 온 낙동강이 안동을 지나 서쪽으로 흐르다가 이곳에서 남쪽으로 크게 방향을 튼다. 소백산에서 발원한 내성천은 비룡산을 감고 휘돌아 용틀임을 하고, 문경의 사불산을 떠나 흘러온 금천을 온몸으로 맞아들인다. 세 강은 한줄기 낙동강이 되어 도도한 장강의 ..
수직으로 곧게 뻗은 대나무 군락, 속을 비운 대들이 하늘을 찌를 듯하다. 흘러넘치는 푸르른 본능 사이사이로 햇살이 부서져 내린다. 댓잎에 튕긴 빛이 눈이 부시도록 반짝인다. 바람이 불자 일제히 우듬지를 출렁이며 허공에 부서진 소리를 쓸어 담는다. 대나무들은 하룻밤에도 훌쩍 키가 자란다. 늦게서야 자라는 대는 죽죽 뻗고 싶지만, 햇볕은 먼저 큰 친구들이 차지한다. 시간이 갈수록 초라한 모습이 도드라진다. 버스럭거리는 낙엽만이 골골이 파인 상처를 감싸줄 뿐이다. 속 깊은 자괴감에 비하면 겉면을 타고 내리는 고통쯤은 참을만하다. 제때 자라지 못한 몸뚱이는 결핍의 흔적을 고스란히 남긴다. 시간이 갈수록 마디를 파고드는 골이 깊어진다. 생장의 마디마다 사연을 간직한 채 낮은 자세로 사는 법을 터득해야만 한다. 골..
두부는 순하다. 뼈다귀도, 발톱도, 간도, 쓸개도 없다. 단호한 육면 안에 방심한 뱃살을 눌러 앉히고 수더분한 매무시로 행인들을 호객한다. 시골 난장부터 대형마트까지 앉을 자리를 가리지 않지만 조심해서 받쳐 들지 않으면 금세 귀퉁이가 뭉개지고 으깨진다. 날렵하게 모서리를 세워 각 잡고 폼 잡아 봐야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위태로운 제국이 몸이라는 것을 스스로도 알고 있는 눈치다. 생살을 갈라도 소리하지 않고 날카로운 칼금에도 피 한 방울 흘리지 않는다. 슴슴하면 슴슴한 대로 얼큰하면 얼큰한 대로 주연이든 조연이든 탓하지 않고 부드럽게 어우러지는 그는 어둠의 집에서 막 출소한 젊은이에게 숫눈 같은 육신을 송두리째 보시하기도 한다. 괜찮다고, 지난 일은 잊으라고 저 또한 진즉 열탕 지옥을 견디고 환골탈태로 새..
그가 오늘의 기분을 고른다. 기분은 Y혹은 y. 바로 나다. 존재감은 목에 감기는 그 순간부터이다. 엄숙할 때의 나는 Y, 바람에 날리듯 경쾌한 기분의 나는 y라서 때때로 달라지는 그의 감정을 살핀다. 옷장에는 서른 남짓한 내 동료들이 있다. 신입 몇을 제외하면 대부분 한물갔다. 오래된 친구들을 그가 선뜻 내치지 못하는 것은 그날그날 기분과 분위기에 맞는 구색을 맞추기 위함이다. 그는 오늘 빨간 바탕의 흰 점박이 나를 골랐다. 가장 무난한 선택이다. 어제의 한랭전선을 밀어내고 맑은 고기압을 회복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어제는 며칠 동안 시장조사를 하고 통계를 내어 작성한 보고서가 퇴짜를 맞은 날. 보고서를 훑던 상사가 그의 머리 위로 비행접시를 날렸다. 핏발선 상상의 목에 묶인 기분만큼 그의 기분도 있..
1 스물세 살이오―삼월이오―각혈이다. 여섯 달 잘 기른 수염을 하루 면도칼로 다듬어 코밑에 다만 나비만큼 남겨가지고 약 한 제 지어 들고 B라는 신개지(新開地) 한적한 온천으로 갔다. 게서 나는 죽어도 좋았다. 그러나 이내 아직 기를 펴지 못한 청춘이 약탕관을 붙들고 늘어져서는 날 살리라고 보채는 것은 어찌하는 수가 없다. 여관 한등(寒燈) 아래 밤이면 나는 늘 억울해 했다. 사흘을 못 참고 기어이 나는 여관 주인영감을 앞장세워 밤에 장고 소리 나는 집으로 찾아갔다. 게서 만난 것이 금홍(錦紅)이다. “몇 살인구?” 체대(體大)가 비록 풋고추만하나 깡그라진 계집이 제법 맛이 맵다. 열여섯 살? 많아야 열아홉 살이지 하고 있자니까, “스물한 살이에요.” “그럼 내 나인 몇 살이나 돼뵈지?” “글..
나의 어머니는 진사이신 신공申公의 둘째 따님이시다. 어렸을 적에 벌써 경전에 통달했고, 글을 지을 수 있었으며 글씨도 잘 쓰셨다. 바느질이나 수놓는 일에까지 재주가 뛰어나 정묘한 경지에 이르렀다. 거기다가 천성이 온순 아담하시고, 지조가 굳고 정결하셨다. 몸가짐이 안존했고, 일을 처리하는 데는 치밀했으며, 말수는 적고 행동은 매우 조심스러우셨다. 또 스스로 겸손하게 하시니 외할아버지 신공께서 끔찍이 사랑하고 아끼셨다. 어머님은 성품 또한 지극히 효성스러워, 부모님께서 병환이 나면 근심하는 빛이 얼굴에 역력하다가 병환이 나으시고 나서야 얼굴이 펴지셨다. 뒷날 어머님이 시집을 가게 되자, 외할아버지께서는 아버님께 “나에게 딸이 많은데 다른 딸들은 시집을 가도 그렇게 서운하지 않았지만 자네 처의 경우는 참으로..
나는 놀기를 좋아하고 일하기를 싫어한다. 나는 일이라면 딱 질색이다. 내가 일을 싫어하는 까닭은 분명하고도 정당하다. 일은 나를 나 자신으로부터 소외시키기 때문이다. 부지런을 떨수록 나는 점점 더 나로부터 멀어져서, 낯선 사물이 되어간다. 일은 내 몸을 나로부터 분리시킨다. 일이 몸에서 겉돌아서 일 따로 몸 따로가 될 때, 나는 불안하다. 나는 오랜 세월동안 소회된 노동으로 밥을 먹었다. 나는 이제 아무데도 붙여주는 곳이 없고 기웃거릴 곳도 없어서 혼자 들어앉아 있다. 또 막 무는 개들이 너무 많이 돌아다녀서 대문 밖에 나가지 못한다. 요즘 나의 일이란 하루에 그저 두어 줄씩 작문을 하는 것이다. 그런데, 나는 때때로 그나마도 하고 싶지가 않다. 글이란 아무리 세상없이 잘나서 사람들을 놀라게 하는 몇 줄..
미리 고백하자면 나는 오랫동안 현실에 눈이 어두운 사람이었다. 많은 일에서 늦되었고 욕심이 없었으며 두문불출 혼자 지내는 일도 달게 받아들이는 체질이었다. 그해 늦은 가을 숲으로 드는 입구에 덩그러니 서 있던 이 공간을 마련한 것이 내 생애 유일한 현실 감각이라할 것이다. 엄연히 카페라는 정체성을 가진 건물을 공개입찰을 통해 임대한 것이지만 내 두뇌 사전은 입찰이나 임대 같은 단어와 친숙하지가 못하다. 그 '입찰' 결과 머릿속은 당장 외딴 성의 성주로 포맷되었고 한 리어카 분의 책을 부렸을 때는 소로우(H.D.Thoreau)의 문장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것만 같았다. "나의 거처는 사색을 위한 곳으로뿐만 아니라 진지한 독서를 하기 위한 곳으로서도 그 어느 대학보다 나았다." *소로우의 《월든》 속 구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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