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 독서클럽에서 정한 도서로≪스베덴보리의 위대한 선물≫을 읽은 적이 있다. 아인슈타인에 버금갈 정도로 명석한 스웨덴 물리학자 스베덴보리가 하나님의 선택을 받아 가사假死상태에서 여러 차례 사후세계를 다녀와 쓴 책이라 전해진다. 우리가 죽으면 중간지대에서 한동안 머물면서 생전 선악 행위의 결과에 따라 아홉 단계의 천국과 아홉 단계의 지옥으로 가게 된다고 한다. 그는 몇 차례에 걸쳐 천당과 지옥 모든 곳을 다녀왔다. 이 사실을 세상에 알리라는 사명을 받고 방대한 내용의 저서를 남겼다고 한다. 인간은 사후에 누구나 천당과 지옥으로 가게 되는데 각각 9단계가 있다. 판단의 기준은 양심과 선행이다. 그래서 기독교가 전파되지 않은 지역이나 시대를 막론하고 하나님의 존재를 알지 못했던 사람까지도 양심에 거리끼지 않는..
시장 한 귀퉁이에서 '노지 깻잎'이라고 쓴 쪽지가 담긴 바구니를 발견했다. 뜻밖에 어머니의 흔적을 만난 것 같아 덥석 집어 들었다. 가을 일을 끝낸 어머니의 손바닥처럼 거칠거칠한 감촉에서 진한 깻잎 향이 났다. 그리움이 입맛을 당기듯 싸한 향기가 나를 부른다. 날씨가 쌀쌀해지기 시작하는 가을 이맘때면 어머니는 노르스름하게 단풍 든 깻잎을 소쿠리에 가득 따오셨다. 더는 내어줄 영양분이 없는 이파리를 서둘러 거두어도 이제 남은 것들은 스스로 알맹이가 되어 영글어 갈 것이었다. 윤기가 빠져나간 얼룩진 이파리는 하나같이 멍들고 찢어져 상처 난 것들뿐이었다. 뜨거운 햇볕에 바래고 비바람에 맞서던 이파리엔 깨알 같은 점들이 모여 있었다. 화장기 없는 맨얼굴엔 시련을 이겨낸 사람의 꺾이지 않은 꼿꼿한 결과 기가 살아..
나의 청소년 시절에 유행했던 노래의 가사 가운데 '울어도 사랑이요 웃어도 사 랑, 거리 거리 등불 아래 여자가 있네' 라는 것이 있었다. 앞과 뒤의 가사는 생각 이 나지 않고, 이 구절만 이 가락과 함께 기억에 남아 있다. 몸과 마음이 안주할 곳을 얻지 못하고 방황하는 남정네의 시야를 파고든 등불 아래 여인들의 모습, 매우 통속적이기는 하나 그런대로 정취가 서린 한 폭의 그림이다. 요즈음의 우리나라 여자들은 40년 전 또는 50년 전보다 훨씬 더 아름다워진 듯한 인상이다. 사람들의 왕래가 많은 거리를 지나면서, 또는 텔레비전 화면을 바라보면서, 어쩌면 이토록 미인이 흔한가 하고 감탄할 때가 있다. 영양과 의상이 좋아지고 화장술까지 발달한 덕분일까. 사람들이 모이는 곳의 종류에 따라서 만나게 되는 미인들의..
사무장과 경민이는 비빔냉면을 시키고 나는 돌솥비빔밥을 주문하였다. 여자 종업원이 주방을 향하여 "비냉 둘, 돌밥 하나!" 하고 소리쳤다. '열무비빔밥'은 열밥'이고 '콩나물밥'은 '콩'이란다. 배달원 머슴아가 금속 배달통을 들고 비호처럼 달아난다. 돌솥비빔밥을 돌이라 말하고 비빔냉면을 비냉이라고 줄여서 말하지 않는 나 자신도 그리 여유로운 시간을 느긋하게 살고있는 것은 아니다. 자리가 나기를 기다리는 다음 손님을 의식하며 쫓기듯 점심을 먹고 나면, 겨우 차 한 잔 마시곤 약속에 묶여서 가 볼 데가 있다. 표가 날 정도로 해놓는 일도 없는 주제에, 아침부터 저녁까지 마음과 몸이 바쁜 일정이다. 명색이 학자 또는 문필가로 되어 있어서, 집에 틀어박혀 있는 시간에도 마음은 이리저리 헤매기에 대체로 분주하다. ..
나는 그림에 대한 소질을 타고나지 못했다. 소년 시절에 닭을 그리면 오리 모양이 되었고, 백합을 그리면 호박꽃에 가깝게 보였다. 미술가를 부러워했지만, 화가의 길로 들어서지 않은 것은 참 잘한 일이다. 마음속에 있는 생각을 정확한 말로 나타내는 일은 나에게는 닭이나 백합의 모습을 그리기보다도 더욱 어렵다. 정확할 필요가 없는 말, 이를테면 '안녕하십니까? 하는 따위의 의례적인 인사말이나 그 밖의 어떤 허튼소리라면 별로 부담없이 지껄일 수가 있다. 그러나 정확한 표현이 요구될 경우에 적합한 언어를 찾아낸다는 것은 생각보다 훨씬 어려운 일이다. 그런데 나는 말을 많이 사용하는 직업에 종사하고 있다. 말 가운데서도 정확성을 가장 요구하는 철학의 길을 택한 것이다. 어릴 때 말을 몹시 더듬어서 말을 적게 하는 ..
자기 고향 근처에 조용하고 경치 좋은 저수지가 있으니 낚시질도 할 겸 방학 동안에 한번 가지 않겠느냐는 어떤 젊은 친구의 말을 들었을 때 나는 마음이 솔깃했다. 서울 근교의 산만 당일치기로 오를 것이 아니라 삼박 사일 정도로 지리산을 종단하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누가 제안했을 때도 좋은 의견이라고 찬성하였다. 이제는 함께 늙어가는 마당이니 좀 자주 만나자고 어느 동창 친구가 전화를 걸었을 때도 나는 참 좋은 생각이라고 말하였다. 정년 퇴임을 한 뒤에도 쉬지 말고 학문을 위해서 또는 그 밖의 문화 영역을 위해서 많은 일을 하라는 격려의 말을 여러 번 들었다. 지나가는 인사말일 수 있겠지만 나 자신도 하고 싶은 일들이 아직은 태산 같다. 이미 손을 대놓은 일도 몇 가지 있고, 또 앞으로 하고 싶다는 생각 만 ..
"바보가 되어라." 어떤 정신병 의사의 이 말이 내 마음에 들었다. 요즈음처럼 온갖 심리적 압박에 시달리는 세상에서 긴장을 풀며 살아가자면, 때때로 바보가 되는 것이 정신 위생을 위하여 좋은 방안이라는 것이다. 비단 긴장 완화를 위한 묘방(妙方)일 뿐 아니라, 처세 전반에 걸친 보다 근본적인 교훈이 될 수도 있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자칫하면 분노와 짜증이 치밀기 쉬운 맹랑한 세상이다. 도무지 상식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일들이 생활 주변에서 끊임없이 일어난다. 대세가 그렇고 풍조가 그렇다. 사리(事理)를 따지며 흥분해 보았자 아무 소용도 없다. 공연히 신경만 피로할 뿐이다. 보고도 못 본 척 듣고도 못 들은 척하는 것만 같지 않다. 필경 바보가 되는 것이 가장 현명하다는 결론이 된다. 아예 바보가 되기로..
시간이 무료하기에 텔레비전을 작동시켰다. 화면에는 아프리카의 광활한 초원을 배경으로 사자 가족의 모습이 나타났다. 대여섯 마리의 어미 사자와 너댓 마리의 새끼 사자. 단란하고 평화로운 광경으로 보였다. 그러나 다음 순간에 화면은 바뀌어 처절한 생존경쟁의 현장을 연출하였다. 여러 마리의 암사자가 무리를 벗어난 한 마리의 얼룩말을 목표로 삼고 덤벼든다. 쫓고 쫓긴 끝에 결국 얼룩말은 처참한 모습으로 쓰러졌고, 사자 가족은 굶주린 배를 채우기 시작한다. 얼룩말의 참사가 사자 가족에게는 다시 없는 경사였다. 하지만 그 경사스러운 잔치도 오래 가지 않았다. 배고픈 하이에나의 무리가 떼를 지어서 나타난 것이다. '백수의 왕'이라기에 사자에게는 적수가 없는 것으로 생각했던 나의 무식을 비웃는 듯, 생사를 건 처절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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