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0 경북문화체험 전국수필대전 입선 구름이 지구를 수백만 번 감고 돌았으리라, 헤아리지 못할 정도로. 사계절은 또 몇 번이나 오고 갔을지 모르겠다. 시간이라는 감각이 없어지고 주변의 풍광이 생경할 정도로 바뀌어갈 즈음, 낯선 두려움에 얼굴이 사색이 되어도 꿋꿋이 돌 위의 글씨를 붙잡고 버텨온 것이었다. 깊은 땅에 거꾸로 처박혀 있어서 숨이 안 쉬어질 때면, 차분히 호흡을 고르고 예전 기억을 떠올렸으리라. 본인의 몸통에 아로새겨진 그때의 기록을 품고, 다시 빛 볼 날을 기다렸을 것이다. 1988년 추운 겨울에서야 땅속 어둠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고 하니, 잘 견뎌냈다고 혼잣말을 내뱉어보았다. 처음 만난 세상은 참으로 이질적인 시공간이었을 터. 기뻐할 새도 없이 포클레인으로 온몸이 들려져 길옆 개울에 무참..

2020 경북문화체험 전국수필대전 입선 산속에 바다가 펼쳐졌다. 육중한 전각을 떠받치는 기단에 게와 거북이, 온갖 물고기가 바다를 가로질러 뒤따른다. 기단과 기단으로 이어진 사다리 문양은 틀림없는 배의 용골이다. 측면 바다에 그려진 용비어천도에는 용이 여의주를 물고서 바다를 뚫고 하늘로 솟아오르고 있다. 그 기묘함에 조심스럽고 엄숙해진다. 계단에 새겨진 성난 파도는 금방이라도 산을 삼킬 듯하다. 파도를 타고 한 치 흔들림 없이 굳건히 자리 잡은 전각은 극락전이며 극락정토로 안내하는 반야용선이었다. 극락전을 세울 때 이미 반야용선 사상을 염두에 둔 것이 아닐까. 극락전(보물 제836호)이 자리한 곳은 청도 화양읍 송금리 대적사이다. 임진왜란 때 소실된 것을 다시 중창하는 등 전란 때마다 고초를 겪었으며 지..

2020 경북문화체험 전국수필대전 입선 문득 고향이 그리울 때가 있다. 화사한 봄기운에 떠밀려 가볍게 길을 나선다. 고향 마을에서 멀지 않은 성밖숲이 나를 부른다. 성밖숲, 왕버들에 가만히 손을 대어 전설을 듣는다. 투박하고 거친 세월이 손끝에 전해온다. 자세히 바라보노라면, 밑둥치가 마치 얼굴이 동그란 전설 속의 아이가 왕버들관을 머리에 쓰고 있는 형상으로 보인다. 나무의 정령이 쉬고 있을 것만 같다. 숲길을 걸으면서 오랜 시간을 무언의 대화를 나누었다. 이윽고 자연의 소리에 이끌려 선석사로 방향을 잡았다. 선석사 전경을 살피다 특이한 법당이 눈에 띄었다. 태실법당이라는 이름도 생소한 전각이다. 다소곳이 합장을 하며 태실법당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태를 봉안한 곳이라는 선입견 때문일까, 산실의 비릿한..

2020 경북문화체험 전국수필대전 입선 청도 임당리 마을을 들어서 고샅길을 따라간다. 고택의 흙돌담을 끼고 걸으니 솟을대문이 버티고 섰다. 좌우로 마구간과 방을 거느려 여느 대갓집 대문 못지않다. 이리 오너라 외치면 금방이라도 누군가가 나올 것 같다. 활짝 열린 대문 안으로 들어서니, 인적 없고 쓸쓸한 기운만 감돈다. 바깥마당 넓은 터에 사랑채가 휑하니 홀로 서 있다. 사랑채를 한 바퀴 돌아보니 뒤쪽 바람벽에는 오래된 벽에서 흙이 부서져 내리고 있다. 오랜 비바람의 흔적이다. 사람의 온기가 사라진 빈집은 바람에 흩어지는 구름처럼 허허롭다. 큰 사랑채의 구조가 특이하다. 홑처마 팔작 기와지붕으로 정면 네 칸 좌측 두 칸 규모의‘ㅡ’자형 평면 형태이다. 우측 두 칸은 대청이고, 좌측 두 칸은 온돌방이다. 사..

2020 경북문화체험 전국수필대전 입선 나는 지금 세상에서 단 하나뿐인, 어느 무덤 앞에 숙연한 마음으로 서 있다. 비록 시골 밭둑 한구석에 자리한 초라한 무덤이지만, 그 어느 제왕의 거대하고 위엄찬 왕릉보다 더 귀중한 문화유산이라고 뜻매김을 해본다. 이 안에는 금은보화나 황금왕관 따위의 물질적 보물이 아닌, 인간의 정신적 유물이 묻혀있기 때문이다. 예천군 지보면 한대마을에 있는 언총은 사오백 년 전에 만들어진 무덤이다. 사람이 타고 다니는 말이 아니라, 우리가 날마다 내뱉는 ‘말(言)을 묻은 무덤’이다. 마을 어른의 말에 의하면 한대마을은 예전부터 각성바지들이 모여 살고 있었는데, 문중들 서로 간의 싸움이 그칠 날이 없었다고 한다. 사소한 말 한마디가 씨앗이 되어 큰 싸움으로 번지는 말썽이 잦자, 마을..

2020 경북문화체험 전국수필대전 입선 햇볕 쨍쨍 한낮에 연지 해자 뜰을 걷는다. 잎자루를 든 연잎이 잎을 길쭉하게 오므리고 하늘에 떠 있는 구름을 다 마실 듯하다. 더러는 잎을 납작하게 펼치고 검게 고인 물을 덮었다. 분홍 메꽃과 태극 문양 흙길 따라가니 또 하나 둥근 해자가 펼쳐진다. 성 둘레길을 따라 걷는다. 거대한 돌, 작은 돌, 잘생긴 돌, 못생긴 돌덩이로 쌓은 성벽이 끝 간 데 없이 펼쳐졌다. 돌과 돌 틈에 작고 납작한 돌이 균형을 잡아 울퉁불퉁한 성 벽면을 자로 잰 듯 평평하다. 내가 서 있는 눈높이에 네모난 돌은 모퉁이가 부드러운 곡선을 띤다. 그 위에 각이 진 반듯한 인공 돌이 층층 놓였다. 오목하고 볼록한 직선으로 번갈아 길게 이어졌다. 검버섯이 핀 큰 돌들로 반룡의 몸통이 꿈틀거리는 ..

2020 경북문화체험 전국수필대전 입선 하늘이 몸을 연다. 주산主山이 붉은 눈을 뜬다. 크고 작은 무덤들이 섬처럼 떠 있는 산등성이에도 햇발이 비친다. 시공간을 넘어 천년을 오갈 수 있는 길, 왕릉 길 문턱을 조심스레 넘어선다. 과거를 잇는 탯줄 같은 좁은 길이 산잔등까지 이어진다. 낯익은 듯 낯선 땅. 태고의 숨소리로 가득한 신비롭고 비밀스러운 길에 발을 들여놓는다. 잿빛으로 박제된 옛 도시 곁에서 흐르고 있는 오늘의 풍경이 기묘하다. 삶과 죽음, 과거와 현재가 아무렇지 않게 공존하는 길에서 문득 현실로 돌아오는 데는 길 중간 중간에서 스치는 사람들을 볼 때다. 천오백 년이 넘도록 비바람에 씻기고 깎이면서도 제 모습을 잃지 않은 무덤은 단순한 비경이 아니었다. 그때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역사였다. 이채로..

2020 경북문화체험 전국수필대전 입선 물 위에 섬처럼 떠 있는 마을. 내성천이 삼면을 휘감고 도는 물도리동 마을은 차라리 비현실적이다. 무섬마을 초입에 들어서니 그제야 사람들이 발붙이고 사는 곳이란 현실감이 온다. 마을에는 반가의 기품이 흐르는 고택이 여러 채 있다. 세월의 화살을 비켜간 듯 정정한 집들은 그 후손이 거주하는 곳도 있다. 내 발길은 마을의 한 집 앞에서 멈췄다. 만죽재 고택 바로 옆의 김덕진 가옥이다. 성채처럼 견고해 보이는‘ㅁ’자형 본채와 작은 방앗간채가 어깨를 맞대고 있는 구조다. 남정네들의 공간인 사랑채와 여인들의 거소인 안채가 한 몸처럼 붙어있는 게 독특했다. 규방 여기저기를 기웃거린다. 현대식으로 개조한 탓에 고졸한 맛은 덜하다. 하지만 거처하는 사람의 불편을 담보로 하는 고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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