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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흐고비813

벌컥 남(男)과 꼴깍 여(女) / 송연희 사람의 모습은 겉만 봐서는 모른다. 그러나 우리가 보는 것은 사람의 겉모습을 보며 사람됨을 점치기도 한다. 어떤 점잖고 교양 있고 직장도 반듯한 남편이 있었다. 유머도 있고 부인과 외출할 땐 꼭 손을 잡고 다녔다. 이웃 사람들이 그 부인을 보고 말했다. “그런 남편과 사는 당신은 참 복이 많은 사람이다.”라고. 그랬더니 그 부인이 하는 말이 “한번 살아봐라. 그런 말이 나오는지 내 속은 아무도 모른다.”였다고 한다. 한 남자랑 삼십 년 하고도 사 년째 함께 살고 있다. 집에 들어오는 남편의 눈썹만 봐도 어떤 기분인지 짐작할 수가 있다. 눈썹이 부드럽게 갈매기를 하고 있으면 양호한 상태. 거기에 입매까지 부드러우면 최상이다. 눈썹이 꼿꼿하면 기분 별로. 입까지 꾹 다물고 화장실로 들어가면 성질이 난 것. .. 2021. 2. 11.
어머니의 텃밭 / 구활 늦잠을 즐기는 일요일 아침이었다. “애비야! 게일인지 케일인지 때문에 감자농사 망치겠구나. 그놈의 큰 키가 감자를 크지도 못하게 하고, 거기서 옮겨 붙은 진딧물이 감자 잎을 말리는구나.” 느닷없는 어머니의 말씀이었다. “예, 알았어요.” 대답하고는 늦잠의 혼곤함에 취해 해가 중천에 떠있을 무렵, 게으른 하품을 앞세우고 옥상으로 올라갔다. 이게 웬일인가? 어머니가 초봄에 심어둔 감자 몇 포기에 그늘을 드리웠던 죄로 잎이 무성한 케일들은 송두리째 뽑혀서 뿌리를 하늘로 쳐들고 벌을 서고 있었다. 녹즙식물인 케일의 진가를 모르고 감자의 순수한 맛만을 알고 계시는 어머니가 약간은 원망스러웠지만 이내 생각을 고쳐먹고 뽑혀진 케일들을 빈 땅에 다시 심고 물을 듬뿍 뿌려 주었다. 지난 겨울 친구에게서 얻어온 케일 씨앗.. 2021. 2. 11.
만년 과도기萬年過渡期 / 윤재천 중국의 황하(黃河)는 백년하청(百年河淸)이라했다. 강물이 맑고 푸른 날이 없다는 뜻이다. 강물이 맑고 푸름은 인간의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기후와 풍토가 그 강물을 푸르고 맑게 두질 않으니 아무리 맑은 강을 기다리며 백년을 보내도 푸를 수가 없는 것이다. 해방 후, 지금까지 우리 국민은 크고 많은 일을 거쳐 왔다. 한일합방 이후 36년간, 일제 치하의 굴욕되고 자유가 없던 세월을 지나 아무 준비 없이 맞은 해방은 우리에게 너무 많은 자유의 기쁨을 주었고 그 기쁨을 내 것으로 만들려는 순간에 6·25의 민족적 수난을 겪어야 했다. 사변의 참해를 씻고 휴전이란 푯말 앞에서 부흥과 복구에 집념하면서 집념이 차츰 타성과 나태로 변했다. 사리사욕만을 일삼던 아집스런 집권에 대한 반발로 학생의 분노는 .. 2021. 2. 11.
3월이 오고 뱀이 눈 뜨면 / 이혜숙 “휘익, 휘익.” 뱀이 보내는 신호다. 한밤의 검은 휘장을 찢는 소리, 무겁게 내리누르던 적막을 걷어 올리는 소리, 잠잠한 대기를 휘저어 바람을 일으키는 소리…. 나에게는 그것이 봄이 왔다는 신호다. 3월 26일 새벽 3시. 작년보다 이틀이나 늦었다. 날짜를 확인하면서 먼저 든 생각. 작년엔 3월 24일에, 그 전해엔 3월 25일에 그 소리를 들었다. 날짜를 기억하는 이유는 그해의 3월은 그날이 마지막 날이기 때문이다. 자투리 날들은 4월에 이어 붙인다. 내 달력엔 4월 35일인 해도 있고 4월 37일인 해도 있다. 봄을 맞이하는 나만의 방식이다. 다른 사람은 남녘의 꽃소식으로,아니면 달라진 기온으로 봄을 느끼겠지만, 나는 다르다. 뱀이 신호를 보내야 봄이 시작되는 것이다. “휘이익” 밤에 듣는 짧고 높.. 2021. 2. 10.
존재는 외로움을 탄다 / 최민자 이른 새벽, 이슬이 맺힌 풀숲 사이로 나는 천천히 걸어 들어간다. 멀리서 들려오는 계곡물 소리가 간밤 불면으로 멍해진 머리 속을 차고 맑게 헹구며 지나간다. 밤새 열변을 토하던 벗들은 아직도 깊이 잠들어 있다. 세상과도, 자기 안의 고독과도 화친하지 못한 채, 짧은 삶을 마감해야했던 한 작가에 대하여 사람들은 제각기 할 말이 많았다. 숲으로 향해 가는 내 발걸음을 마른 풀줄기가 잡아당긴다. 아직 이르니 동 틀 때까지 기다리라는 건가. 괜찮다고, 머지않아 해가 떠오를 거라고, 달래듯 어르듯 헤치며 걷는다. 늦도록 두런대는 사람들 때문에 잠을 설친 숲의 정령들에게는 돋쳐 오르는 이른 햇살이 그다지 반갑지만은 않을 것이다. 골짜기 사이에 가로놓인 나무다리를 건너간다. 나무가 삐거덕, 아픈 소리를 낸다. 한 걸.. 2021. 2. 10.
에세이 모노드라마 / 조재은 백지는 텅 빈 무대다. 작가는 종이 위에서 연출자이고 모노드라마의 배우이다. 백지 위의 공연은 몇 백 회를 넘어도 막이 올라가면 심장이 멎는 듯하다. 배우는 관객의 마음을 피땀 흘리는 연기 하나로 사로잡아야 한다. 객석의 불이 꺼지고 무대에 밝은 조명이 켜지면 순간, 배우는 앞이 보이지 않고, 오직 자신만을 응시하는 무서우리 만치 냉정한 관객의 시선을 온몸으로 느낀다. 절대 고독의 순간이다. 백지 위의 첫 줄, 호흡을 맞출 상대역도 연출도 없는 무대에서 첫 동작을 시작한다. 비어있는 백지는 거대한 강이고 하나의 문자는 작고 작은 돛도 없는 조각배다. 상처 난 손으로 힘없는 노를 저어 거센 강의 물살을 헤쳐 가야 한다. 물살에 잡혀 강의 심연으로 가라앉을 것 같은 두려움에 사로 잡힌다. 모노드라마의 배우가.. 2021. 2. 9.
영화 같은 수필 / 조재은 수필가, 그는 수필가의 자세는 노련한 배우의 숙련된 연기 같아야 한다. 배우가 고정된 스타일의 연기만을 오래 지속할 경우 생명이 짧다. 맡은 역할에 따라 변신하는 배우들이 있다. 로버트 드니로는 ‘분노의 주먹’에서 이십 대에서 오십 대까지의 권투 선수역을 맡아 수십 킬로의 몸무게를 늘리고, ‘퐁네프의 연인들’의 데니 라방은 다리 위의 거지 역할을 위해 몇달씩 목욕을 하지 않았다. 성격 배우들의 깊은 내면 연기는 끊임없는 노력과 연습이 갖다 준 결과이다. 영화에서 환자의 역을 맡고 촬영이 끝나면 배역에 몰입한 배우는 얼마동안 심하게 앓는다. 이런 철저한 프로 정신에서 한편의 수필이 태어나야 한다. 수필을 쓸 때 고뇌와 함께 흘리는 땀과 피는 값지다. 수필가의 눈 영화를 촬영하듯 수필을 쓴다면, 수필가의 눈.. 2021. 2. 9.
행복한 사람 / 최원현 내가 아는 그는 참으로 아름다운 사람이다. 내가 아는 그는 참으로 행복한 사람이다. 사람이 일생을 살면서 '내가 행복한 사람이다'라고 느끼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될까. 가지면 더 갖고싶고, 오르면 더 높이 올라가고 싶고, 한 번 갖게 되면 내놓기 싫고, 한 번 올라가면 내려오기 싫은 것이 인간의 본성이요 생리가 아니던가. 그런데 그는 그렇지 않았다. 생각은 지극히 대중적이면서도 바른 소신을 가진 이로 자신의 이익을 탐하지 않고, 정작 자신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이며 그것은 어떻게 해야 할 지를 알았다. 그는 가지지 못한 자의 안타까움을 알고, 힘없고 약한 자의 슬픔을 알고, 약하기 때문에 손해를 보고 피해를 당하는 아픔을 아는 사람이다. 그가 그런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자신 때문에 그런 일이 .. 2021. 2. 9.
그리움을 맑히는 세 개의 이미지 / 최원현 1. 동짓달 열이틀 저녁밥 먹는 시 내 잠재의식 속에는 시계 하나가 살아있다. 그것은 외할머니께서 나의 태어난 날을 기억시키시던 목소리다. 예사로 생각하면 우스운 일로 보일 수도 있겠으나 지금에 생각해 봐도 그건 내 정체성을 지켜 주는 소리였을 뿐 아니라 이 날에 이르도록 '나'라는 실체를 가장 확실하게 깨우치는 참으로 소중한 소리였던 것 같다. '동짓달 열이틀 저녁밥 먹는 시', 내가 말을 하게 되면서부터 노래처럼 익히며 외웠고, 그래선지 나이 쉰이 넘은 지금에도 귓가에 그대로 살아있다. 6.25가 터지자 어머니는 친정으로 가셨고 그곳에서 나를 낳으셨다. 그러나 얼마 안 되어 아버지를, 그 두 해 후엔 어머니까지 여윈 탓에 외가 신세를 질 수밖에 없었다. 그런 나를 두고 외할머니께서는 혹여라도 내가 철.. 2021. 2. 9.
고자바리 / 최원현 고자바리(최원현) 소리로 듣기 할머니는 늘 왼손을 허리 뒤춤에 댄 체 오른손만 저으며 걷곤 하셨다. 그게 언제부터였는지는 모르겠다. 다만 기억나는 것은 앉았다 일어나려면 ‘아고고고’ 하시며 허리가 아픈 증상을 아주 많이 호소하셨고 길을 가다가도 한참씩 걸음을 멈추곤 허리를 펴며 받치고 있던 왼손으로 허리를 툭툭 치다가 다시 가곤 하셨다. 그런 할머니의 허리가 언제부턴가 조금씩 더 구부러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그걸 바라보는 어린 내 마음은 더욱 편치 않았다. 할아버지는 하얀 수염으로 늙음이 나타났지만 할머니는 그렇게 허리가 굽어지는 걸로 나타났다. 기역자처럼 거의 직각으로 굽어진 허리를 똑바로 보는 것만으로도 괜히 서글퍼지고 안타깝고 민망했다. 오랜만에 뒷산엘 올랐다. 그새 나무계단이 하나 더 생.. 2021. 2. 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