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가 거리에 나갔다가 옥수수 두 개를 사 왔다. 하나씩 먹자는 뜻이다. 그러나 옥수수자루가 얼마나 큰지 반 토막도 다 못 먹겠다. 한 뼘 반도 넘으니 양적으로 한 자나 되는 것 같다. 요사이 TV에서 전하던 개량종 수원19나 20호인 거 같다. 그리고 멀리 강원도 산간 지방의 화전에서 온 것이라고 생각이 된다. 나는 어린 시절부터 옥수수를 퍽이나 좋아했다. 키가 2미터 이상이나 자라난 옥수수 밭이 길 양쪽에 서 있는 좁은 길로 혼자서 지나갈 때에는 무서운 짐승이나 뛰어나올 것 같아서 머리털이 오싹 일어서는 것 같았다. 무엇보다 옥수수의 이파리들은 야자수의 이파리처럼 길게 뻗어 나무의 양쪽이 늘어져서 춤을 추는 모양을 하고 있는 것이 좋았다. 그러나 바람이 세차게 부는 날에는 병사들이 칼을 빼들고 열을 ..
내 책상 위에는 몇 날 전부터, 석류 한 개가 놓여 있다. 큰 사과만한 크기에, 그 빛깔은 홍옥과 비슷하지만, 그 모양은 사과와는 반대로 위쪽이 빠르고 돈주머니 모양으로 머리끝에 주름이 잡혀져 있다. 보석을 꽉 채워 넣고 붙들어 매 놓은 것 같다. 아닌게 아니라, 작은 꿀단지가 깨어진 것같이 금이 비끼어 터진 굵은 선 속에는 무엇인가 보석같이 빤짝빤짝 빛나는 것이 보인다. 나는 가만히 앉아서 석류의 모양을 한참이나 물끄러미 바라본다. 매끈한 사과와는 달리 무엇에 매를 맞았는지 혹과 같은 것이 울툭불툭한 겉모양 그 속에는 정녕코 금은보화가 꽉 채워져 있는 것 같은 모습이다. 나는 아까워서 아까워서 석류 한 개를 놓고 매일같이 바라만 보고 있다. 행여, 금이 나서 터진 그 석을 쪼개 볼 생각을 하지 않는다...
어머니의 사랑, 그 지극하신 사랑! 사랑의 참뜻을 처음으로, 그리고 가장 깊이 가르쳐 주신 어머니…. 우리가 인간으로 태어나서 처음으로 입을 열었을 때, 그 때 우리 입에서 나온 최초의 언어는 '엄마', 곧 어머니가 아니었던가! 어머니를 부르고 어머니를 외치며 우리는 인간임을 알았고, 그런 인간이기 때문에 우리는 무시로 어디서나 어머니를 부르고 어머니를 외쳤다. 기쁠 때나 슬플 때나, 즐거운 곳에서나 괴로운 곳에서나, 마음이 아프거나 몸이 아프거나, 우리는 언제나 어디서나 어머니를 찾으며 이렇게 자라 왔다. 어머니는 온통 우리를 보호해 주시는, 무너짐 없는 성이었다. 어느 누구든지, 어머니의 품속에서는 이 세상에 무서워할 것도 없는 똑같은 왕자요 공주였다. 거기서는 항상 다사로움과 밝음과 꿈과 노래마저 ..
평화로운 시대에 있어서 시인의 존재는 가장 비싼 문화의 장식일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 시인이 처하여 있는 국가가 비운에 빠지거나 통일을 잃거나 하는 때에 있어서, 시인은 그 비싼 문화의 장식에서 떠나, 혹은 예언자로, 또는 민족혼을 불러일으키는 선구자적 지위에 놓일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정부도 군대도 가지지 못하고, 제정 러시아의 가혹한 탄압 아래 있던 폴란드인에게는, 시인의 존재가 오직 국민의 재생을 예언하며, 굴욕된 정신생활을 격려하는 크나큰 축도를 드리는 예언자로 생각되었으며, 아직도 통일된 국가를 가지지 못하고 이산되어 있는 이탈리아 사람들에게, 시성 단테는 '오로지 유일한 이탈리아'로 숭모되어 왔었으며, 제1차 세계 대전 때에, 독일군의 잔혹한 압제 하에 있었던 벨기에인에게 있..
지극히 그리운 이를 생각할 때 모르는 사이에 눈물이 돌듯, 나는 모색 앞에 설 때마다 그러한 감정에 젖어들게 된다. 사람의 마음이 가장 순수해질 때는 아마도 모색과 같은 심색일는지 모른다. 은은히 울려오는 종소리 같은 빛, 모색은 참회의 표정이요, 기도의 자세다. 하루 동안을 겪어 낸 번잡한 과정 다음에 밀려드는 영육의 피로와 허황한 감회는 마치 한낮의 강렬했던 연소의 여운이 먼 멧등에 서리듯 외로움이 감겨들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저 유명한 화가 밀레도 한 가족의 경건한 기도의 모습을 모색 앞에 세우고 그림의 제목을 만종이라 붙였는지도 모른다. 황혼이 기울 무렵, 산 그림자 내리는 들녘에 서면 슬프디 슬픈 보랏빛 향수에 싸여 신의 음성은 사랑하라고만 들려오고, 원수 같은 것 미움 같은 것에 멍든 자국마저..
어제 오후 저자에 갔던 아이가 창포 한 묶음을 사들고 왔다. 우리의 모든 세시 풍속이 날로 잊혀져 가는 요즘 세월에 그나마 단오절을 기억해서 창포를 베어다 팔아 주는 아낙네가 있어 주었던가 싶으니, 우리 겨레의 멋을 말없이 이어 주는 숨은 정성이 아직도 우리 둘레를 지키고 있는 것 같아 마음 흐뭇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아이를 시켜 창포를 삶아 그 물을 뜰 모퉁이 작은 상추밭에 두어 밤이슬을 맞히게 하고, 목욕탕에 물을 넣도록 일렀다. 이슬 맞힌 창포물을 섞어 머리를 감고, 또 상추 잎에 내린 이슬방울을 받아 분을 찍어 아이에게도 발리고 나도 화장을 했다. 가르마엔 분실을 넣고, 창포 뿌리엔 주사를 발라 곤지를 찍었다. 올해 여든이신 어머님께서도 화장을 시켜 드렸더니 주름진 얼굴에 미소를 띠셨다. 밥..
화목을 손꼽을 때 나는 먼저 매화를 생각한다. 겹겹이 둘러싼 겨울의 껍질을 비집고 맨 먼저 봄을 밝혀든 매화 봉오리의 연연하면서도 안으로 매운 동양의 여성 같은 정조! 바야흐로 동터 오르는 여명을 받으며 눈바람을 이겨 선 매화를 바라보면 내 가슴은 고향의 산하를 마주한 듯 반갑고 낯익은 모습에 눈물겨워 오는 것이다. 모든 사물이 날로 그 모습을 변모해 가는 이 세월! 접목접지로 하여 화목마저 그의 본질을 잃을 만큼 색향이 요란해져 가고 있는 이 판국에 있는 듯 없는 듯 은은한 향기를 새벽하늘에 풍기며 아직도 얼어붙은 황량한 뜨락을 불 밝힌 매화! 무리를 멀리한 그 고독은 어쩌면 빈 들판의 눈얼음을 뚫고 움돋는 민들레 같은 눈짓으로 내 가슴에 밀착해 온다. 먼저 사랑을, 먼저 다사함을 소곤대듯 가냘픈 애원..
흔들리는 것이 바람 탓만은 아니다 / 박건삼 입춘과 우수, 경칩이 있는 2월은 설레임의 달이다 짧은 미니스커트를 입은 2월은 그래서 상큼하다 아직은 설한풍에 비수를 감추고 훈풍의 미소를 띄우지만 난 알고 있지 열여섯 가시내의 젖몽울 같은 수줍음과 부풀음에 떨고 있는 2월은 가슴 설레는 달이다 하늘의 별이라도 따서 순이에게 바치고픈 삼돌이에겐 너무 짧은 달이지만 3월, 그 첫 휴가를 기다리는 김일병의 깨알 같은 수첩 속의 2월 얼마나 그리운 달인가 보조개가 귀여운 초롱초롱한 소녀 같은 때론 비비드한 말괄량이 선머슴애 같은 애증이 엇갈리는 2월은 변덕스러워 좋다 오랜만에 노사가 손잡고 지하철 파업을 중단하고 시어미와 새댁이 군에 간 아들과 지아비를 손꼽아 기다리며 화해하는 그런 달 2월은 가슴 조이는 모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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