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4회 경북일보문학대전 동상 나의 하루는 터널을 지나면서 시작된다. 고속도로에는 터널이 많다. 터널을 통과할 때마다 묘한 기분이 든다. 험준한 산세를 에돌지 않고 이토록 쉽고 명쾌하게 관통할 때마다 우리의 생이 이러했으면 하는 바람이 불어온다. 그러나 생의 터널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다. 가도 가도 출구가 없을 것 같은 날들이 있다. 터널을 지나면 다시 새 터널이 기다린다. 어떤 날은 터널 속조차 무너져 홀로 고립되어 우울한 기분일 때도 있다. 전국을 다니다가 무척산터널 근방을 지날 때면 불현듯 목석 같았던 아버지가 생각나곤 한다. 무척산에는 아버지가 계신다. 아버지는 한국전쟁이 끝날 무렵인 중학생 시절부터 나무를 깎고 다듬는 일만 천직으로 해오셨다. 목재소에는 어떠한 속이 뒤틀린 야생 원목이 와도 네모..

제4회 경북일보문학대전 동상 하필 보고 말았다. 앞 베란다 창으로 검은 새가 쏜살같이 날아간다. 깜짝 놀라 쳐다보는 사이 난간을 치고 가는 둔탁한 소리가 들렸다. 다시 되돌아가는 새의 품 안엔 흰색 날개가 보였다. 까마귀가 아기 비둘기를 낚아채 허공을 날아가고 있었다. 난 외마디소리도 지르지 못하고 그 자리에 박제되어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그때였다. 새끼비둘기가 품에서 빠져나와 혼신을 다해 멀어지려 애쓰고 있었다. 속도는 필사적으로 거의 비슷한 속력을 냈다. 그러나 확연히 거리는 좁혀지고 까마귀는 또다시 접근을 한다. 살아남는 방법을 터득한 아기 비둘기는 슬며시 고도를 낮춰 비행하여 까마귀를 따돌렸다. 난 안절부절못하며 손깍지에 힘만 주고 있었다. 비둘기는 상처를 입었는지 힘이 부치는지 아파트 숲으로 ..

제4회 경북일보문학대전 은상 주인보다 늠름한 지팡이가 초인종 없는 대문을 대신 두드린다. 여든 중반인 친정아버지 친구 분들이 병문안을 오셨다. 느닷없는 의식불명으로 일주일가량 병원 신세를 졌다는 소식을 전해 들으신 게다. 관절염 환자인 엄마에게, 일시적이라고는 하나 치매 증상을 보이는 아버지의 간병은 무리였다. 그래서 환자에게 환자를 맡길 수는 없다는 판단 하에 잠시 동안 친정에서 아버지를 간병하던 터였다. 오래 기다리시게 할 수 없어 달려 나가 대문을 열어 드렸다. 녹슨 대문은 엄마 무릎을 닮았는지 여닫을 때마다 삐걱거린다. 삐걱, 그 여운의 말미쯤에 할아버지, 할머니 대여섯 분이 가쁜 숨을 몰아쉬고 계신다. 당장 병원 신세를 지지는 않고 있을 뿐, 병문안이라면 가는 것보다 받는 것이 더 익숙한 분들이..

제4회 경북일보문학대전 금상 한때 오지 중의 오지였다는 함양땅 상림이다. 아직도 이곳은 사람보다 꽃과 나무와 새들로 북적거린다. 그들이 미처 채우지 못한 자리는 이름 모를 풀들이 가녀린 목숨을 빼곡하게 꽂고 있다. 이따금 손 없는 바람에 멱살을 잡히기도 하지만 그들은 의연하게 앉은자리를 지켜낸다. 개개의 그들이 만들어내는 거대한 하나를 우리는 숲이라 부른다. 숲의 구성원들은 경쾌한 팔분음표가 되는가 하면 묵직한 쉼표가 되기도 하며 웅장한 숲의 악장을 이끌고 나간다. 나서면 물러설 줄 알고, 취하면 버릴 줄도 아는 오래된 약속이 살아 있는 곳. 간만에 그들만의 세상에서 청정한 하루를 탁발해 볼 욕심으로 우중불사 달려왔다. 나무는 숲을 이루지만 인간은 결코 숲을 이루지 못하는 족속이라고, 어느 칼럼니스트가 ..

제3회 경북일보 문학대전 동상 비가 오면 따스함이 그립다. 무언가에 이끌리듯 집을 나선다. 빌딩 숲을 벗어나 붉은 벽돌 담장을 따라 한없이 걷는다. 어느 집 처마에서 떨어지는 빗방울 소리가 담 너머로 들려오던 어머니의 다듬이 가락 소리처럼 정겹다. 이렇듯 비 오는 날 고샅길을 거닐면 기억의 저편에서 잠자고 있던 추억의 흔적들이 한 올 한 올 되살아난다. 얼마나 걸었을까. 골목길 저만치에서 빗속으로 급히 뛰어가고 있는 신문팔이 소년의 모습이 슬라이드 필름처럼 스쳐 지나간다. 옆구리에서 삐져나온 한 아름의 신문 더미가 곧 쏟아져 내릴 것 같다. 반쯤 흘러내린 바지춤을 연신 추스른다. 훌쩍거리는 코를 소매로 닦으며 골목길을 누빈다. 슬그머니 소년의 흔적을 따라가 본다. 초등학생 무렵엔 내남없이 가난을 전염병처..

제3회 경북일보 문학대전 동상 새 한 마리가 유유히 날아가고 있다. 날갯짓도 하지 않고 날개만 쭉 펼친 채 평온하게 날아간다. 역풍이 불거나 바람이 심하게 몰아치면 저렇게 평화롭게 날수가 없다. 아마도 바람이 부는 방향과 목적지가 같아 저와 같이 날수 있을 것이다. 우리 인생도 세상의 바람을 잘 만나야 한다. 그런데 나는 해방 직후 혼란기에 태어나, 다섯 살 때 한국전쟁의 회오리바람을 만났다. 아직 말도 배우기 전에 아버지를 잃고 두엄 냄새가 진동하는 시골에서 배고픈 시절을 보냈다. 피폐한 생활에서 탈출하기 위해 20대에 무작정 상경했다. 부스럼 딱지처럼 덕지덕지 붙은 가난의 딱지를 떼어버리기 위해서는 다른 방법이 없었다. 행상을 하여 근근이 모은 돈으로 사업을 시작했다. 사업 파트너의 배신으로 뜻밖의 ..

제3회 경북일보 문학대전 동상 “여보! 큰일났어. 다육(多肉)이들이 이상해!” 새벽 5시 반, 언제부턴가 아침잠이 없어진 남편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린다. 5시 반이란 시간은, 나에겐 잠을 자야하는 새벽인데 남편에게는 하루를 시작하는 오전을 의미한다. 못 들은 척, 달아나버리려는 잠을 꽉 붙잡으려고 이불을 머리까지 푹 눌러 덮었다. 재촉하는 소리가 들린다. 어차피 자긴 틀렸구나 싶어 비몽사몽 베란다 화분 쪽으로 가보았다. 다육이들이 이상하다. 싱싱하던 푸른 잎들은 누런빛을 띄고, 오동통하던 줄기들도 힘이 없다. 그 다육이들은 화분 잘 키우기로 자칭 타칭 재야의 고수인 친구가 몇 달 전 우리 부부에게 준 것이다. 정년퇴직도, 명예퇴직도 아닌 희망퇴직을 한 남편을 걱정하는 내게, 위로 대신 건넨 선물이다. 퇴..

제3회 경북일보 문학대전 은상 모니터 속 글자들이 내 처분만을 기다리는 듯 모여 있다. 크고 작은 글자들은 제각각의 개성을 살려주어야 하기에 수십 가지의 서체들을 대입시켜 보지만 영 마뜩잖다. 한참을 이 옷, 저 옷으로 바꿔 입혀 보다가는 정해진 결론처럼 고딕과 명조로 마무리한다. 모두들 제 나름의 일을 하고 살아간다. 나는 글자들을 배열하고 다듬는 일을 한다. 타자기로 문서를 작성하던 시절에는 틀에 박힌 글자 모양만도 충분했던 때가 있었다. 컴퓨터가 보급되고 이름도 모양도 생소한 수많은 글자체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하지만 그 속에서도 빛을 잃지 않는 고딕과 명조는 글자체의 기본 중에 기본이다. 고딕은 제목 글자체로 탁월하다. 우직하고 곧은 획은 어떠한 역경에도 버텨낼 수 있는 힘이 있어 본문을 이끌..
- Total
- Today
- Yesterda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