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박꽃도 꽃이냐?” 그런 말을 들으면 “장미꽃만 꽃이냐.”라는 말이 내 입안에서 뱅뱅 돈다. 끝내 말할 수 없어 목구멍에 가시가 걸린 것처럼 통증을 느꼈다. 오래전 집 울타리에 덩굴장미를 심었는데 해가 갈수록 줄기가 손가락 3개를 합친 만큼 두꺼워지고 가시가 사방으로 무섭게 뻗쳤다. 해마다 장갑 낀 손으로 가지치기를 하다가 손과 팔뚝에 가시에 찔린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고민 끝에 장미를 뽑아버리고 그 자리에 호박을 심었다. 얼마 안 가서 울타리에 호박 줄기가 무성하게 번졌다. 내가 키우고 싶은 방향으로 순을 접으며 줄기를 끈으로 군데군데 묶어 주었다. 시간이 흘러 호박꽃이 피었다. 수꽃은 대만 길게 올라오고 암꽃은 달걀만 한 열매를 달고 꽃이 핀다. 호박꽃이 피면 벌들이 꿀을 따려고 모여든다. 꽃은..
감악산이 멀리 보이는 곳. 시집에서 염소를 키우고 있던 시절. 새댁인 나는 가족들이 들에 나가고 없을 때는 집을 지키는 얼룩무늬 강아지에게 밥을 주기도 하고, 때로는 장난을 치면서 놀아 주었다. 어쩌다가 들에 나가는 동네 사람들이 집 앞을 지나기도 하고, 논이나 밭에 나가 일을 많이 하여 시커멓게 그을린 얼굴을 보게 되는 경우도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이웃 사람들과 더불어 살면서 외롭지 않게 살아왔다. 마을이나 읍에서 만나는 사람들의 소소한 일까지도 훤히 알고 상관하는 소박하고 정이 많은 사람들이었다. 지팡이를 짚거나 지게를 지고, 여자들은 보따리를 이고 오일장에 나가기도 하였다. 그런 날에는 아랫마을에 누가 아프다든가, 어느 집 아들 딸들이 결혼을 했다 느니 연애 중이라는 등 여러 가지 소식을 전해 듣..
등산이 분명 일종의 스포츠이나, 이것이 스포츠이면서도 스포츠 이상의 어떤 의미를 소유한 데서 나의 등산에 대한 동경은 시작되었었다. 룩색에 한 끼 먹을 것을 넣어 지고 자그마한 언덕을 오르는 것으로 비롯해, 몇 달 혹은 몇 해를 허비해 가며 지구의 용마루와 싸우는 본격적인 등산에 이르기까지, 신체의 근골은 쓰여지는 것이고, 이것이 쓰여짐으로 말미암아 그 단련의 결과도 나타나는 점에 있어 등산의 스포츠적 성격이 나타난다. 그러나 동시에 이것이 수도의 한 과정같이 어떤 철학적 분위기로 우리의 심령을 정화해 주는 데 초 스포츠적 매력을 우리에게 느끼게 하는 것이 아닌가. 등산가의 한 가지 긍지는 굳이 다언을 피하는 기벽이 있으니, 이는 눈은 산봉과 하늘을 바라보고 오르되 이 순간 심령은 조용히 고개를 숙여 안..

산에 오르다 입동 立冬이 눈앞이다. 한더위가 엊그제 같은데 찬 기운이 옷깃을 여미게 한다. 점심 후 간편한 등산복을 입고 두척산으로 향했다. 아파트 베란다에서 매일같이 보는 산인데도 정상 등산은 1년에 고작 서너 번 한다. 서원골 입구에 주차를 했다. 건너편 노랗게 단풍 든 은행나무가 장엄하게 서 있다. 조선 중기 대학자인 한강 정구 선생이 심었다고 전하는 수령 500여 년이 된 나무다. 이곳은 정구 선생과 그의 제자 미수 허목을 배향한 회원서원 터로 지금은 부속건물이었던 관해정만 오도카니 자리를 지키고 있다. 주차장 앞에 마산씨름체육관이 보인다. 1970•80년대 한국 씨름을 주름잡았던 김성률, 이승삼, 이만기, 강호동 장사 등이 활약한 기념으로 건립한 씨름장으로 알려져 있다. 잘 정돈된 진입로를 따라..
사람은 누구나 죽는다. 어느 누구도 죽음을 면할 수는 없다. 모든 사람이 죽음을 기정사실화 하고 인정한다. 그런데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죽음에 대하여 천연하고 태연한 듯하다. 나 아닌 다른 사람의 일로 여기려 한다. 다분히 의도적이라 할 수 있다. 솔직히 말해서 죽음이 두려워서 그럴 것이다. 인간에게서 죽음만큼 심각하고 중요한 문제는 없다. 누구나 죽음을 생각해보지 않은 사람이 없을 것이다. 유신론자나 무신론자 할 것 없이, 믿는 종교의 유무를 떠나서 한번쯤은 내세(來世)에 대한 생각을 했음직하다. 종교는 인간의 죽음에 대하여 저마다 다른 정의와 다양한 관념을 가진다. 그러나 종교는 달라도 인간의 내세문제를 추구한다는 점에서는 궁극적으로 같은 맥락이다. 이 세상에서 인간의 영과 육이 삶의 끝이라면 어떻게 ..

가끔 평소 알고 지내는 지인들을 만나면 “요즈음 어떻게 지내? 뭘 하면서 소일 하는가?” 라고 묻는다. 퇴직 후에 뚜렷한 직장에 재취업했다는 소식을 들은 바 없기 때문일 것이다. 사실 서너 군데에서 손짓도 했지만 탐탁스럽게 여기지 않고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지내고 싶어서 몸이 묶일 정도의 소속은 두지 않고 지낸다. “대학 강의 나가고, 글 쓰고, 운동도 하면서 지냅니다. 백수가 왜 이렇게 바쁜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면 됐어, 하여간 바쁘면 좋아.” 대다수 사람들이 바쁜 건 좋다고 말한다. 날마다 하는 일이 특별히 많은 것 같지도 않은데 정말로 하루가 짧다. 어찌나 시간이 잘 가는지 번쩍하면 일주일이고 한 달이 번개다. 일상을 벗어나 교외로 나가는 일도 어렵다. 공직에 있을 때도 그랬지만 그 때는..

- 정진권의 「비닐우산」을 읽고 - 전혀 낯설지가 않다. 정진권의 「비닐우산」은 읽는 내내 온기가 전해진다. 쉽게 접할 수 있는 평범한 생활을 통해 서민들의 소소한 행복을 나타냈다. 난해하거나 현학적이지 않아 쉽게 읽힌다. 그렇다고 글이 가볍거나 헤픈 것은 아니다. 주변에서 경험하고 보아왔던 일상적인 소재에서 출발하지만 갈수록 몰입하게 한다. 가벼운 이야기로 시작된 글이 점차 삶에 투영되면서 자연스럽게 공감하게 하는 힘이 있다. 「비닐우산」을 읽다 보면 지나친 욕심이나 허세를 부리지 않고 오직 현실에 충실한 소시민의 모습이 떠오른다. 주제가 무겁거나 어렵지 않아 별도의 설명 없이도 오래도록 뒷맛이 남는다. 정진권(1935∼2019)은 충북 영동에서 태어나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국어교육과와 명지대학교 대학원..

언덕 아래로 마주 보이는 아파트 공장에서 인부 여남은 명이 열심히 철근을 자르거나 나르고 있다. 그 옆으로 거푸집을 조립하고 있는 서너 사람의 일꾼이 더 눈에 띈다. 커다란 쇠손으로 쉴새 없이 흙을 파내어, 줄지어 늘어선 덤프트럭의 짐칸을 금새 채워 버리는 굴삭기도 한 대 아련한 굉음을 내면서 시야에 들어선다. 지금은, 그늘에 서 있어도 하릴없이 땀샘이 솟구치는 뜨거운 여름 한 낮, 저들은 그야말로 작열하는 태양 아래 온 몸을 드러낸 채 저렇게 무아지경으로 일에 몰두하고 있는 것이다. 누군들 굳이 쉴 새 없이 몸을 움직여야 비로소 연명하는 자들의 저 수고로운 삶을 최상의 인생살이라고 감히 주장할 것인가. 그럼에도 내게는 땀 흘리며 살아가는 저들의 일상이 신선하고 삽상(颯爽)하게 느껴진다. 땀방울의 무채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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