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회 경북일보 문학대전 은상 파란 하늘에 빨간 댕기가 팔랑거리고 옥색 치마가 풀썩인다. 널뛰기는 정월이나 단오, 추석에 하는 전통 놀이이다. 두 사람이 널빤지 위에서 신명나게 구르고 뛰는 한 판 놀이이다. 어렸을 적, 아이들은 동네를 한 바퀴 돌아 세뱃돈 모금이 끝나면 하나둘 배꼽마당으로 모였다. 구슬치기도 하고 제기를 차다 보면 쿵덕 쿵덕 하는 소리가 들렸다. 처자들의 널뛰기가 시작된 것이었다. 우리는 어느 틈에 하던 놀이마저 팽개치고 달려가 구경삼매경에 빠졌다. 처자들은 널을 뛰기 전에, 멍석을 둥글게 말아 만든 널받침을 이리저리 옮겨가며 자리를 골랐다. 이윽고 널빤지 위에 올라 눈 맞춤을 하면서 호흡을 가다듬었다. 슬슬 리듬을 타기 시작하더니 무릎을 굽혔다가 힘껏 굴러 하늘 높이 솟구쳤다. 널뛰는..
제2회 경북일보 문학대전 은상 여행 사진을 들여다본다. 유난히 기둥을 배경으로 찍은 사진이 많다. 기둥에 기대어 서 있는 내 모습은 다른 어떤 곳에서보다 안정감 있고 편안해 보인다. 기둥은 공간을 형성하는 기본 뼈대가 되는 구조물이다. 위의 하중을 받아서 아래의 바닥으로 적절하게 분산시키는 역할을 한다. 건물이 제대로 공간을 유지하고 서 있게 하는 장치이다. 우리나라에 언제부터 기둥이 사용되었는지 확실하지는 않다고 한다. 다만 신석기 시대의 수혈 주거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가 추측할 뿐이다. 수혈의 안 가장자리에 구멍을 파서 세우거나 바닥에 직접 세워서 윗부분의 구조물을 지탱하게 한 것이 기둥의 시작이라고 본다. 몇 해 전, 인생길에서 복병처럼 숨어있던 힘든 일을 만났다. 건강이라는 물리적인 기둥과 바른 ..
협상에 있어서 양보는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가? 선의의 양보가 상대방을 부드럽게 한다는 생각은 우리가 관대하게 나가면 상대방도 스스로 자비로워질 것이라는 전제를 깔고 있다. 그러나 협상의 현실은 전혀 그렇지 않다. 즉, 선의의 양보는 상대방을 부드럽게 하는 것이 아니라 더욱 강경하게 만든다. 그것이 나쁜 상대와의 협상일 때는 더욱 그러하다. 게빈 케네디가 쓴 책 『협상』에서는 양보의 허구에 대한 의미 있는 예화를 싣고 있다. 북구 툰드라 지방에 ‘비오른 맥캔지’라는 세일즈맨이 있었다. 이 친구는 맥주를 팔러 다녔는데 꽤 인기도 있었고 신망도 컸다. 어느 날 오후 변경의 한마을에 캔 맥주를 팔러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늑대 한 마리가 자신의 뒤를 따라온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조금 전 큰 사슴 한 마리를 총으..
제2회 경북일보 문학대전 은상 늙수그레한 당목 하나가 먼 산마루를 바라보고 있다. 타종을 멈춘 지 오래되었나 보다. 발갛게 얼어있는 몸 위로 켜켜이 가라앉은 먼지가 아버지의 백발처럼 덥수룩하다. 이마를 쓸어 올리듯 당목을 어루만지다가 흠칫 놀란다. 나무의 결을 따라 딱딱하고 꺼칠꺼칠한 삶의 이력이 손가락 끝에 까맣게 묻어나온다. 종을 치는 막대기를 당목이라고 한다. 박달나무나 고래의 뼈로 만들어서 쇳소리가 날 만큼 단단하다.?종이 소리를 울리는 동안 당목은 수도 없이 제 몸을 부딪쳤다. 한번 타종할 때마다 되돌려 받은 충격이 일파만파 육신을 흔들어 놓았던 모양이다. 옹이 없이 매끈하던 몸은 여기저기 갈라지고 닳아서 굳은살이 박였다. 귀가 떨어져 나가도 아무도 눈여겨보지 않는다. 비천상을 조각한 종신처럼 ..
제2회 경북일보 문학대전 금상 장아찌를 담글 때마다 늘 아쉬운 게 누름돌이다. 마땅한 누름돌이 없어서다. 누금돌이란, 장아찌를 담글 때, 항아리 속 재료가 뜨지 못하게 맨 위에 얹어서 지그시 눌러주는 묵직한 돌덩이를 말한다. 대개, 채석장에서 깬 듯, 날 서고 반듯한 돌덩이 보다는 세월의 물살에 닳고 닳아 둥그스름하고 묵직하고 반들반들한, 그런 돌덩이를 누름돌로 쓴다. 양파나 깻잎 등, 해마다 장아찌를 한두 번 담는 것도 아닌데 나는 매번 장아찌 담글 때서야 누름돌을 챙기곤 한다. 생각해보니, 내가 평생토록 살림고수가 못 되는 이유가 바로 그런 부분이었지 싶다. 여름철에 오이지 담글 때는 반드시 누름돌로 눌러야 한다. 그런데, 우리는 남쪽 출신이라서 서울내기들처럼 오이지를 즐겨 담지 않는다. 서울사람들은..
제6회 경북일보 문학대전 수필 동상 바다로 향한 귀는 늘 젖어 있다. 날마다 촉수를 세운 채 물결의 변화를 재빨리 감지하고자 자꾸만 바다 쪽으로 귀를 늘어뜨린 탓이다. 고기잡이가 주업인 사람들의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것은 자연이 부리는 요술이다. 아무리 철저히 단속하고 준비해도 일 년에 한두 번은 혼쭐이 나곤 한다. 그래서 흐리면 흐려서 걱정, 안개가 끼면 사위를 분별할 수 없어 걱정, 물빛이 지나치게 맑아도 걱정이다. 그런 걱정이 모여서 도대불이 생겼다. 도대불은 제주 어부의 길잡이 불빛이었다. 제주지역에서 칠십 년대 초반까지 솔칵이나 생선 기름, 석유 등을 이용하여 불을 밝히는 민간 등대다. 지형이 높은 곳에 주변의 돌로 해안의 특성에 맞게 원뿔형, 원통형, 상자형, 표주박형 모양으로 담을 쌓아 등명..
제6회 경북일보 문학대전 특별상 이웃집 할머니가 다녀가셨다. 여간해서는 남에게 싫은 소릴 하시지 않는 분인데 단단히 벼르고 오신 모양이었다. 갑작스런 일이라 우리도 적잖이 놀랐다. 시골살이를 하러 오기 전부터 이웃과 잘 지내고 싶어 마음 준비를 많이 했었다. 이사 와서는 집집이 떡도 나누고 음식을 만들어 경로당에도 가져다 드렸다. 어르신을 뵈면 살갑게 인사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우리 아이들도 인사성 바르다고 좋아들 하셨다. 그런데 집에서 키우는 강아지 때문에 이웃의 핀잔을 받게 되었다. 청송으로 귀농을 결정하고 암수 강아지 한 쌍을 분양받았다. 오래 사귀던 친구와 이별할 아이들을 위한 배려였다. 청이와 송이로 이름을 지어 주었다. 그중 송이는 잘 생긴 수컷이다. 송이가 어느새 자라 어엿한 총각이 되었다..
등대 아래 방파제에 앉아 바다를 바라본다. 눈앞에서 파도가 밀려왔다 밀려간다. 파도는 무슨 사연이 저리 많은지 금세 모든 이야기를 다 해줄 듯 다가왔다 사라진다. 밀물로 왔다가 썰물로 몸 바꾸어 떠나는 파도에는 언제나 만남과 헤어짐이 넘실댄다. 밤이 되어 사람들이 모두 돌아간 해변에는 갈 곳 없는 바닷새 몇 마리가 어둠 속을 서성이고 있다. 세월 지나면 잊히는 것이 있는가 하면, 아무리 세월이 지나도 오히려 자꾸만 떠오르는 것이 있다. 오래전부터, 돌아가신 아버지에 대해 언젠가는 글로 정리해봐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좀처럼 시작하지 못한 채 세월이 흘러갔다. 대해서 무언가 글로 남긴다는 것이 왠지 불경스러운 일로 여겨졌고 그 기억을 함부로 훼손한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아버지의 아들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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