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대 아래 방파제에 앉아 바다를 바라본다. 눈앞에서 파도가 밀려왔다 밀려간다. 파도는 무슨 사연이 저리 많은지 금세 모든 이야기를 다 해줄 듯 다가왔다 사라진다. 밀물로 왔다가 썰물로 몸 바꾸어 떠나는 파도에는 언제나 만남과 헤어짐이 넘실댄다. 밤이 되어 사람들이 모두 돌아간 해변에는 갈 곳 없는 바닷새 몇 마리가 어둠 속을 서성이고 있다. 세월 지나면 잊히는 것이 있는가 하면, 아무리 세월이 지나도 오히려 자꾸만 떠오르는 것이 있다. 오래전부터, 돌아가신 아버지에 대해 언젠가는 글로 정리해봐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좀처럼 시작하지 못한 채 세월이 흘러갔다. 대해서 무언가 글로 남긴다는 것이 왠지 불경스러운 일로 여겨졌고 그 기억을 함부로 훼손한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아버지의 아들이 ..

입춘과 우수가 지나면 봄이 본격적으로 밀려온다. 천지사방에서 꽃송이들이 연이어 터지고 싱그러운 세엽細葉이 무성해지면 계절의 변화에 무딘 사람조차 한번쯤은 “봄이 왔네!” 하고 거든다. 그럴 쯤이면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이라는 말도 무색해진다. 대자연의 변신을 경이롭게 바라보면서 사람들은 봄이 늦다고 불평하였던 자신의 투정을 쑥스러워한다. 인간의 가벼운 마음을 경고하려는 듯, 춘래불사춘의 의미도 봄이 아니라 간절히 기다리는 그 무엇이 오지 않을 때를 지칭하는 말로 바뀐다. 봄에 가장 먼저 피는 꽃을 영춘화迎春化라고 부른다. 봄을 맞이하는 첫 꽃은 가늘디가는 줄기 하나에 긴 겨울을 몰아내려는 화등花燈을 내건다. 그래도 사람들은 꽃이 제때 피지 않는다거나 찔끔찔끔 핀다고 투정을 한다. ‘봄이 왜 안 오냐, 봄이 ..

작년 초겨울이었나 봐요. 어느덧 은행 열매 냄새는 나지 않고 낙엽 밟는 소리가 청명한 아침이었습니다. 나뭇잎 몇 장 겨우 달린 가로수 아래에서 유치원 버스를 기다리는데, 딸아이가 난데없는 얘기를 꺼내는 겁니다. "엄마는 자유가 좋아?" 분명 어떤 생각 끝에 한 말일 텐데 도무지 그 머릿속을 가늠할 수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대답만큼은 분명하게 할 수 있었지요. 두 번도 생각할 것 없이요. "그러엄. 좋아하지. 엄청 좋아해." 아이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자기도 그렇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이 녀석, 자유가 뭔지는 아는 걸까요? "자유는, 은행잎이 바람 때문에 떨어지지 않는 거야. 자기가 떨어지고 싶을 때 스스로 내려오는 거." 자연은 위대한 스승이고, 그 스승으로부터 깨달음을 얻는 건 어른들만이 아니었던 ..
내 얼굴에는 생각하는 괄호 하나가 산다. 말하는 입의 가장자리에 앉아 말하지 않는 침묵의 힘을 담고 있다. 입술이라는 것이 말하는 날개라면 이는 입가에 어른거리는 민무늬 날갯짓이다. 팔랑팔랑 말의 언저리를 따라 다니지만 수많은 갈래의 인생을 일획으로 담은 웅숭깊은 무늬다. 언제부터 이 괄호가 시작되었는지는 모르겠다. 미세하게 찾아왔을 시작을 눈치채지 못했지만, 아마도 기슭이 편하다는 걸 알아가던 즈음이지 싶다. 어쩌면 처음부터 변방을 좋아해서 수척한 테를 일찍 만들어버렸는지도 모르겠다. 슬픔을 감미롭게 좋아한 반가사유상처럼 턱을 자주 괴었던 내 지난날들이 거기에 담겼으리라. 햇살과 바람에도 모습을 숨기지 않았던 무모함에 이제야 미안한 마음이 든다. 그 누구의 것도 아닌 얼굴이라는 가장 내 것에게 어리석게..

늙으면 햇살 잘 드는 공터에 집 한 채 지어놓고 지금까지 읽었던 책들로 서점이나 하며 살고 싶다. 판매를 하진 않을 테니 정식 서점은 아니겠고, 굳이 용도를 말하라면 책 읽는 어른들의 문화공간이라 할까. 다 늙어서 웬 책이냐고 물어오면, 세상 이야기 두루두루 나누면 그게 다 책 얘기지, 라고 말할까 한다. 일생이 소박했으니 집이 클 필요는 없겠고, 꽃들과 다감했으니 유일한 사치는 그런 것에나 부릴까 한다. 이왕이면 오솔길을 내어 책을 읽으러 오는 길이 산책길이면 좋겠고, 노란 물감으로 멋을 부린 집 주위로는 키 낮은 해바라기를 심어 아예 ‘노란 집'이라 불리면 더욱 좋겠다. 고흐가 사랑했던 아를도 이만큼 노랬을까 생각하면서 먼 나라 화가 흉내로 짜릿한 기쁨도 맛보겠지. 이름도 벌써 찜해 두었다. ‘노랗게..

제7회 경북일보 문학대전 가작 하늘이 너무 예쁘다. 구름 꽃이 피어있다. 드라이브라도 가야겠다. 코로나19 종식 때까진 사회와 생활 속 거리두기 실천이다. 인적이 드문 곳을 생각하다보니 사찰이 떠올랐다. 산속에 있으니 공기도 좋겠다, 초록의 푸새도 실컷 볼 수 있겠다, 9살 딸아이와 나섰다. 의성에 있는 고운사로 목적지를 정했다. 지난해, 가을 문학기행으로 다녀온 곳이다. 문학기행 복습도 할 겸 자연 속을 아이와 걷고 싶다. 고운사 입구까지 무성한 나무들이 터널을 이루고 있다. 아이는 초록 터널을 지나며‘와아’감탄의 소리를 지른다. 주차장엔 차가 없다. 아주 조용하고 평화롭다. 일주문과 천왕문 사이의 흙길을 이리저리 뛰어다닌다. 아이를 천왕문에 서게 하고, 나는 일주문에 서서 셀카봉을 길게 뽑아 사진 속..

제7회 경북일보 문학대전 가작 뱃사람들의 술추렴은 닻을 내리자마자 이어진다. 오촌 아제도 고등어 한 손 들고 돼지국밥집에 앉았다. 주인 아지매 인심 한번 후하다. 해삼 두 토막 덤으로 내주며 긴 의자를 닦아준다. 아제는 오늘도 순정(純情) 맡기고 막걸리 두 병 외상 긋는다. 선창에 앉아 그물코를 꿰매던 아버지도 술을 마셨다. 아버지의 노래는 한이 서린 듯했고, 뜻도 모르는 가사는 눈물이 나게 했다. 항구는 청춘을 저당 잡힌 어부들의 전당포였다. 어류 작황이 예전만 못하다며 곳곳이 생인손 앓는 소리가 들린다. 바다 속에서 사라진 게 어디 한두 가지랴. 선원마저 열에 여덟은 외국인이다. 그들은 이미 우리나라 바다에 익숙한 듯 무슨 일이든 척척 해낸다. 안면 튼 사람들과 혀 짧은 우리말로 곧잘 인사도 나눈다...

제7회 경북일보 문학대전 가작 벗어놓은 허물들이 전혀 허물이 되지 않는 장마당 한켠, 갈매 하늘 같은 다듬돌이 묵언 수행하듯 앉아있다. 늙은 할배의 좌판에는 시간의 저쪽에서 모여든 잡다한 물건들이 환생이라도 하려는 듯 눈을 반짝인다. 벼룩시장의 가판대에서 청석의 다듬돌을 만나면서 우물 같은 상념이 두런거리는 이야기를 듣는다. 그리고 나는 열 두어 살의 계집애 신이 내렸는지 갑자기 혀가 짧아진다. “옴마야 할배야 이 다듬돌 얼마야?” 어느새 유년의 기와집에 선다. ‘고뿔도 안 걸릴 년 서방 잡아 처먹고도 입맛도 안 다신 년. 방망이질 소리가 접점을 찍는다. 할매는 씩씩거리며 휘모리장단으로 다듬이질을 몰아가고 그 장단이 버거운 엄마는 슬그머니 방망이를 밀어놓고 일어선다. 분명하게 할매는 엄마를 향한 욕은 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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