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7 제12회 '머니투데이' 경제신춘문예 대상 가게 앞에는 주인공인 휴대폰보다 조연들이 북적인다. 출연하는 조연도 자주 바뀐다. 라면, 각티슈, 세제 등 저가의 생필품에서 노란 장바구니가 달린 고가의 자전거까지 다양하다. 우리 동네에는 ‘백년통신’이란 이름의 휴대폰 대리점이 있다. 하루가 멀다 하고 신제품이 쏟아지는 IT 업종에 ‘백년’이란 상호는 어울리지 않는다 생각하면서도 동시에 묘한 신뢰감을 준다. 몇 달이 못 되어 사라지는 가게들과 달리 백 년 동안 든든히 이 자리를 지키고 있을 것 같은 기분 좋은 착각도 하게 만든다. 당연한 얘기지만 백년통신은 백 년 전부터 우리 동네에서 휴대폰을 판 건 아니다. 개업 1주년 기념 사은행사도 못 하고 문을 닫은 ‘시애틀’이란 미용실 뒤를 이은 가게다. 재작년..

2011 경남신문 신춘문예 당선 ‘좋은 인연’ 모임에 가는 날 오래된 옷 한 벌을 꺼내 손질한다. 집안에 경사가 생기거나 그리운 사람을 만나는 날 평소에 잘 입지 않아 장롱 깊숙이 넣어둔 누비옷을 꺼내 입게 된다. 누비옷은 평생을 입어도 좋을 한 땀 한 땀 수를 놓은 정성이 깃든 옷이라 입을 때마다 흐트러진 마음을 가다듬게 한다. 어느 해 가을, 십 년 넘게 친자매처럼 지내오던 차(茶)벗님과 소원해 오던 누비옷 한 벌씩을 장만하였다. 소재는 값비싸지 않고 질긴 광목에다 자연염색을 한 옷감으로 취향과 개성에 따라 골랐다. 형형색색의 옷감들 사이에서 견본으로 만든 쪽빛으로 깃과 옷고름을 빼어 낸 시대를 거스르는 듯 보이는 누비저고리 하나가 눈길을 붙들었다. 앞 섶 품이 길고 넓어 여유로워 보이고 욕심과 조급..
3월로 들어서니 온 누리가 봄 내음으로 가득한 듯하다. 꼭 기분 탓만은 아닐 것이다. 개암나무 수꽃이 슬그머니 늘어지기도 했거니와, 오리나무 가지에도 푸른 물이 올랐다. 볕 바른 곳에서는 빨간 볼연지를 바른 광대나물이 헤실헤실 춤을 추고, 꽃등에는 봄소식을 물어 나르느라 분주하다. 변함없이 찾아오는 흔하디흔한 풍경이지만, 언제나 느끼는 생명의 경이로움이기도 하다. 한때는 특별한 행위나 생각만이 의미 있는 것이라 여긴 적이 있었다. 푸새 하나를 보더라도 남보다 먼저 봐야 하고, 희귀하거나 자생지가 한정된 야생화를 찾는 일이야말로 진정한 식물탐사라고 생각했다. 그러다 보니 쉬이 만날 수 없는 식물이 어느 곳에서 발견됐다는 이야기가 들리기라도 하면 불원천리, 기어이 카메라에 담아 오고는 했다. '드물거나 색..
읍내를 관통하는 강변 산책로를 걸었다. 강의 둔치에다 인공적으로 만든 길이다 보니, 걷기에는 좋을지 몰라도 나무 한 그루 없는 휑한 길이다. 나름 신경을 써서 여러 가지 식물들을 심어 놓기는 했지만, 철 따라 일부러 심는 꽃들이 어디 잡초만 하겠는가. 가시상치며 달맞이꽃, 뚱딴지같이 토종 아닌 귀화종이 더 무성하게 자라 키를 넘기고 있다. 외국에서 귀화해 온 동식물들이 기존의 토착 생태계에 교란을 일으킨다는 사실은 익히 알려져 있다.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외래종이 들어와서 살지만, 그중에서도 피해가 심각한 종류들은 환경부에서 ‘생태계교란종’으로 지정하여 특별히 관리하는 실정이다. 비교적 근래에 들어온 생물이라 천적도 마땅찮고, 약삭빠르게 잘 적응해 번성하니 그 퇴치에 들어가는 비용 또한 만만찮다고 한다...

2021 경남신문 신춘문예 당선 봄비가 부슬부슬 내린다. 고즈넉한 산길을 걷다가 죽 늘어선 아름드리 고목을 만난다. 빗물이 천천히 몸피를 적시자 늙은 산벚나무가 까맣게 변한다. 겨우내 봄을 기다리던 꽃망울들이 가지마다 터질 듯 부풀어 있다. 세상이 불안과 공포에 떨고 있어도 때맞춰 꽃을 터뜨리려는지 마지막 기운을 모은다. 봄을 알려주는 노거수 사이에 그루터기 하나가 눈길을 끈다. 초라한 몰골이 지난 세월을 말해준다. 살점이 뜯겨나간 조장鳥葬처럼 곳곳에 응어리진 뼈마디가 드러난다. 상주도 백관도 보이지 않는 한쪽 구석에서 조용히 썩어간다. 껍질이 벗겨지고 없는 거무스름한 속살이 조금씩 삭아 내렸다. 억센 뿌리는 자취를 감춘 지 오래고 하늘을 향해 올라가던 우듬지도 기억 속에만 남아 있다. 당당하던 자세는 ..

2021 전북일보 신춘문예 당선 진열대 위로 둥실 달이 떠오른다. 은은한 불빛이 바닥에 고인다. 조명을 받은 항아리는 방금 목욕하고 나온 아낙네 같다. 천의무봉의 살결이 백옥처럼 희다. 아무런 무늬가 없는 데도 마음이 고요하고 편안해진다. 자세히 보면 달항아리는 좌우균형이 맞지 않는 비대칭이다. 보름달이 약간의 기울기를 가진 것처럼. 가슴이 사라졌다. 마취에서 깨어나자마자 왼쪽 가슴을 확인했다. 불룩하게 솟아있던 자리가 분화구처럼 푹 꺼져 있다. 움푹 팬 곳에 낯선 어둠이 만져졌다. 두꺼운 밴드가 선홍색 칼자국을 애써 가렸다. 와락, 울음이 밀려왔다. 재빨리 환자복을 내려 걷잡을 수 없는 슬픔을 덮었다. 이태 전이었다. 부산스럽게 외출준비를 하고 있을 때 왼쪽 가슴에서 심하게 통증이 느껴졌다. 급하게 달..

2021년 한경 신춘문예 당선 남편과 나는 고집이 세고 까다롭고 자존심이 강하다. 그것이 우리가 가진 단 세 가지 공통점이다. 우리는 지구 반대편에서 만났다. 그래서 우리는 서로를 운명이라고 불렀다. 어쩌면 너무 평범한 만남을 더 그럴싸한 의미로 채우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첫눈에 반한 것은 아니었다. 새로운 것에 대한 호기심. 편의점 가판대에서 색다른 과자봉지를 한 번쯤 집어 보고 싶은 유혹 같은 것이었다. 그의 썰렁한 농담에 내가 박수를 치며 웃게 되었을 때, 차비를 아끼려고 늘 걸어서 다니던 그가 불현듯 저녁을 사겠노라 했을 때 우리의 관계도 새로운 국면을 맞이했다. 뜨겁지 않았던 것은 아니었다. 재채기만큼이나 숨겨지지 않았던 설렘, 상대의 의미 없는 행동에도 심장을 쓸어내렸던 떨림. 우리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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