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둠을 드리운 장막을 들춘다. 음습한 기운이 끼쳐온다. 가지에 매달려 익어가지 못한 억울함에 신열로 들끓고 있는 걸까. 떫은맛 뱉어낼 때까지 아무도 건져주지 않은 두려움에 떨고 있는 걸까. 좌정한 독 안에 들어앉아 밑바닥의 시간을 세고 있는 감이 있다. 누가 오는지도 모른 채 잎사귀 뒤집어쓰고 요지부동이다. 낮달과 밤달 아래 한 줌의 볕살 들이고 한 모숨의 바람 모아둔 몸이다. 시푸르뎅뎅할 때부터 주황빛 물들 때까지 온몸으로 껴안고 있던 탄닌이었다. 다녀간 천둥과 번개로 속에서 불길이 일고 후려치는 소낙비에 두들겨 맞을 때도 놓지 않고 붙잡고 있던 억센 기운이었다. 떫은맛 빼자고 소금물에 몸을 담근 절박함이 까슬하다. 하루분의 삶을 감당하기 위해 침몰했지만 해가 지는지 동이 트는지 알 수 없는 이 암흑이..

기쨩이라는 아이가 있다. 매끈한 살갗에 맑은 눈동자를 가졌는데, 볼의 혈색은 다른 집 아이들처럼 생기가 없다. 언뜻 보기엔 온통 노르끄레한 느낌이다. 엄마가 너무 귀여워해서 바깥으로 놀러 나가지 못하게 하기 때문이라고, 이 집에 드나드는 미용사가 말한 적이 있다. 엄마라는 사람은 트레머리가 유행하는 지금 세상에, 고풍스럽게 (마게)라는 머리를 나흘마다 꼭꼭 틀어 올리는 여자로, 자기 딸을 '기쨩, 기쨩' 하고 언제나 간난애처럼 '쨩'을 붙여서 부른다. 이 엄마 위에 또 짧은 머리를 한 할머니가 있는데, 그 할머니가 또 '기쨩, 기쨩' 하고 불러댄다. '기쨩, 샤미센 선생님한테 갈 시간이야, 기쨩, 괜히 밖에 나가서 아무 집 아이하고 놀면 못써.' 그런 소리를 한다. 기쨩은 이런 까닭으로 좀처럼 밖에 나와..
2007 전북도민일보 신춘문예 당선 아무리 봐도 그는 신이 내린 건축가임에는 틀림없다. 덫이라 하기엔 짜임새와 균형, 간격이 한 치의 빈틈도 없어 적어도 먹잇감이 걸리기 전까진 아름답고 섬세한 고품격의 구조물이다. 눅눅한 이불을 널려 베란다 방충망을 열어놓은 사이, 거미가 들어와 베란다 들창과 회벽을 축으로 그물을 짰나 보다. 그물의 얼개가 되는 발판실과 세로실은 거미 뱃속의 점액이 공기와 맞닥뜨리는 순간 굳어진 거미줄로, 거미의 이동을 위한 통로이면서 그물의 축을 이룬다. 그러나 정작 사냥의 비결은 가로실에 있다. 가로실은 공기와 접촉을 해도 끈적끈적한 끈끈이로 남아 걸려든 곤충을 옴짝달싹 못하게 한다. 물살처럼 퍼져나간 동심원의 한가운데 블랙홀에 거미는 낮게 엎드려 이 가로실의 미동을 감지한다. 어린..

밤 기차가 가는 소리는 흔히 긴 여행과 고향을 생각하게 해준다. 고향이 그리울 때면 정거장 대합실에 가서 자기 고향 이름을 외치는 스피커의 소리를 듣고 온다는 탁목(琢木)이도 나만큼이나 고향을 못잊어 했던가보다. 아버지기 손수 심으신 아라사 버들이 개울가에 하늘을 찌를 듯이 늘어서 있고 뒤 울안에는 사과꽃이 피는 우리집. 눈 내리는 밤처럼 꿈을 지니고 터키 보석 모양 찬란했다. 눈이 오면 아버지는 노루 사냥을 가신다고 곧잘 산으로 가셨다. 우리들은 곳간에서 강난콩을 꺼내다가 먹으며 늦도록 사랑에서 아버지를 기다렸다. 수염 덥석부리 영감에게 나는 으레 옛날이야기를 해 달라고 졸랐다. 그러면 영감은 "어제 장마당에 가서 팔고 와서 없어." "아이 그러지 말구 어서 하나만." "이거 또 성화 났군. 그렇게 얘..

주제꼴이 초췌하여 가끔 푸대접을 받는 일이 있다. 호텔 문지기 한테 모욕을 당한 일까지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대수롭지 않은 일이다. 나는 소학교 시절에 여름이면 파란 모시 두루마기를 입고 다녔다. 그런데 새로 빨아 다린 것을 입은 날이면 머리가 아파지는 것이다. 그러다가 두루마기가 구겨지고 풀이 죽기 시작하면 나의 몸과 마음은 한결 가벼워졌다. 중학교 시절에는 고꾸라 교복 한 벌, 그리고 여름 후시모리 한 벌을 가지고 2년 동안 입었다. 겨울 교복 바지는 절어서 윤이 나고, 호떡을 먹다 떨어뜨린 꿀이 무릅에 배여서 비오시는 날이면 거기가 끈적끈적하였다. 저고리 후끄는 언제나 열려 있었다. 교복을 사서 처음부터 채우지 않고 입던 터이라 목이 자린 뒤에는 선생님이 아무리 야단을 치셔도 잠글래야 잠글 수가 ..
동기들 모임에서 '등산은 왜 하는가?'가 화제에 오른 적 있다. 그러자 누가 선뜻 '산이 거기에 있기에' 힐러리경의 말부터 꺼낸다. '그 말은 멋만 부렸지, 좀 애매한 이야기 아닌가' 하고 반문했더니, 멋진 대답 둘이 나왔다. '고마 간다.' '꽃 보러 간다' 였다. '고마'란 진주 사투리로 그냥 아무 뜻 없이 간다는 말이고, 꽃 보러 간다는 것은 순전히 우스개 말이다. 꽃이 무엇인가. 해어화(解語花), 즉 등산 오는 여인 보러 간다는 것이다. 한바탕 웃었다. 불경이나 성경을 읽고, 필묵(筆墨)으로 한시를 써보거나, 바둑을 두거나, 노장(老莊)을 배워보는 것이 노년의 취미일 것이다. 그 외에 가장 어울리는 취미는 답산(踏山)일 것이다. 백발노인이 지팡이 짚고 산기슭 거니는 모습은 신선을 연상시킨다. 등반..
지름티 고개는 이제 본래의 산등성이로 돌아갔다. 마을의 서북쪽 갈뫼봉과 동북쪽의 유지봉을 이어주는 산등성이, 마을을 병풍처럼 둘러치고 있는 이 산등성이의 중간쯤, 산세가 기개(氣槪) 죽이고 주저앉은 자리가 지름티 고개다. 이 고개는 협촌(峽村)인 우리 마을 버들미에서 대처(大處)인 충주로 나가는 길목으로, 걸어다닐 수밖에 도리가 없던 시대에는 괴산 장에서 충주 장으로 옮겨가는 보부상(褓負商)들도 넘나들던 지름길이었다. 한때는 온종일 인적이 끊이지 않던 큰 고개였으나, 정부 방침에 의해서 운행결손을 보조해 주는 벽지노선이 개설되고 하루 두 번씩 군내버스가 드나들더니 고개의 인적이 끊어지고 말았다. 지름티 고개뿐이랴. 전국의 고개는 교통수단의 발달과 더불어 다 사라졌다. ‘사람 사는 한 평생이 고개 하나를 ..
어느 날 글을 쓰려고 컴퓨터를 열었다 문장 한 줄을 쓸 때까지는 몰랐다 자판을 눌러도 마침표가 찍히지 않는다는 것을 이게 웬일이지 쉼표와 물음표도 마찬가지다 부호를 찍을 수 없게 되자 숨이 막혀 오고 다음 문장을 이을 수 없다 자판이 이상해진 것 같아 입력의 문자표를 찾았다 일반 구두점에 필요한 문장부호들이 주르륵 다 들어있다 오늘은 화원의 꽃을 보듯 그 모습이 화사하고 정겹다 열기만 누르면 된다 좀 번거롭지만 어쩔 수 없지 그런데 그조차도 안 된다 느낌표 쉼표 따옴표 말줄임표 다 있는데 도대체 왜 안 되는 건지 한 줄에서 더 나가지 못한 채 부호가 있는 자판이란 자판을 한 번씩 눌러보고 있는데 갑자기 화면에 이상한 글이 뜬다. “우리 찾으려고 애쓰지 마. 활자의 종노릇이 싫어서 떠나는 거니까. 소리 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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