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5 제15회 수필과비평문학상 수상 왼손은 오른손이 부럽기만 해. 같이 태어났건만 늘 양지(陽地)니까. 반가운 사람을 만나면 오른손이 얼른 악수를 청하지. 어차피 왼손은 나서려는 생각도 없는데 말이야. 간혹 분에 넘치는 사람을 만날 때면 마지못해 왼손의 도움을 청하기도 하지. 그럴 때마다 얄미워 도와주고 싶지 않아. 하기 싫은 일은 왼손에게 미루고 좋은 일은 혼자 다 하려는 오른손 때문에 한두 번 속상한 게 아니거든. 왼손은 자신이 음지(陰地)라고 생각해. 오른손보다 몇 갑절 일해도 돌아오는 건 뒷전이기 때문이지. 오른손의 보조 역할만 하는 데다 한마디로 심부름꾼이야. 설거지할 때도 오른손은 부드럽고 예쁜 그릇만 가려서 닦아. 계란찜을 하여 냄비가 눌어붙었거나 닦기 힘든 솥단지는 슬그머니 왼손에게 미..

짜장면은 좀 침침한 작은 중국집에서 먹어야 맛이 난다. 그 방은 퍽 좁아야 하고, 될 수 있는 대로 깨끗지 못해야 하고, 칸막이에는 콩알만한 구멍들이 몇 개 뚫려 있어야 한다. 식탁은 널판으로 아무렇게나 만든 앉은뱅이어야 하고, 그 위엔 담배 불에 탄 자국들이 검게 또렸하게 무수히 산재해 있어야 정이 간다. 고춧가루 그릇은 약간의 먼지가 끼어 있는 게 좋고, 금이 갔거나 다소 깨져 있으면 더욱 운치가 있다. 그리고 그 안에 담긴 고춧가루는 누렇고 굵고? 억센 것이어야 한다. 식초병에도 때가 끼어 있어야 가벼운 마음으로 손을 댈 수 있다. 방석도 때에 절어 윤이 날듯하고, 손으로 잡으면 단번에 쩍하고 달라붙을 것 같은 것이어야 앉기에 편하다. 짜장면 그릇의 원형이 어떤 것인지에 관해선 알아본 바 없으나, ..

2016 경남신문 신춘문예 당선 꽃을 그린다. 하얀 고무신에 정성을 들여 다섯 개의 빨간 꽃잎과 중앙에 노란 수술도 그려 넣는다. 붓 끝에서 작은 꽃밭이 생겨났다. 세상에서 하나뿐인 꽃신이 될 것 같다. 색감을 깔끔하지만 조금 밋밋한 느낌이다. 파란색과 노란색의 물감을 섞어 초록색 잎을 피워놓으니 바람이라도 살랑대며 불어올 것 같다. 마음 같아서는 하늘을 날아오르는 비천상飛天像이라도 그려보고 싶지만, 붓끝은 그런 마음을 쉽게 허락하지 않는다. 단장을 마친 꽃 신발을 신고 다녀야 할 것인지, 아니면 장식용으로 두어야 할 것인지 망설여진다. 때가 묻어서 씻게 된다면 애써 그려 넣은 꽃물이 빠지지 않을까 하는 기우가 앞서기도 한다. 가진 만큼 걱정도 많아진다고 하더니, 산란한 마음이 저울질을 한다. 어린 시절..

2009년 동양일보 신인문학상 당선 웅장한 조각품 앞에서 입이 딱 벌어졌다. 간단하게 구경만 하기는 너무 미안한 작품들이었다. 책 속에서 흑백사진으로 보던 얼굴을 화강석 조각품으로 마주하니 더 그러했다. 이루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작품 중에 훌륭한 인물이 대부분이었다. 큰바위얼굴 조각공원은 국내외 역사에 길이 남을 만한 얼굴전시장이었다. 그토록 흠잡을 데 없는 인물로 남기 위해 얼마나 자신을 다듬었으며, 추잡한 것들을 얼마나 많이 버렸을까 싶었다. 내게는 석수장이 친구가 있다. 그 엄청난 작품들을 둘러보면서 친구가 조각하던 현장에서 보았던 일이 떠올랐다. 채석장에서 나온 원석이 작게는 몇 톤, 크게는 수백 톤이나 되는 것도 있다고 했다. 원석에다 쪼개고 싶은 부분에 먹줄을 놓고 정으로 작은 홈을 여..

2011 전북일보 신춘문예 당선 미역에서 풀내가 난다. 미역도 등줄기 꼿꼿한 한그루의 바다나무다. 줄기, 잎사귀, 뿌리의 형태를 제대로 갖추고 척박한 바윗덩어리에 뿌리박고 포자로 번식하여 일가를 이루는 것이 나무의 그것과 다르지 않다. 몇 년 전에 동남아의 어느 바다에서 스킨스쿠버로 물속 여행을 할 기회가 있었다. 소음 한 조각 들리지 않는 고요한 바다 속에 끝없이 이어지는 미역 숲이 마치 육지의 밀림과도 같았다. 우리나라와는 달리 미역을 식용으로 하지 않는 나라이니 사람의 손이 닿지 않은 처녀 숲인 셈이다. 물속에서 천천히 헤엄치며 미역이 물결 따라 일제히 이리저리 흔들리는 것을 꿈꾸듯 바라보았다. 재래시장에 나갔다가 참기름 바른 듯 반질거리는 미역을 사왔다. 철지난 미역이라 날것으로 먹기에는 좀 억세..

2017 동양일보 신인문학상 당선작 겨울은 기별도 없이 오고 있었다. 겹겹의 푸른빛으로 빛나던 하늘도, 햇솜처럼 닿아주느라 분주하던 햇볕도 어느새 창백하리만치 투명하다. 코끝을 타고 들어와 손끝까지 저리게 하는 이른 된바람이 떠나는 가을을 절감하게 한다. 아무리 손끝을 감싸 쥐고 주물러 보아도 임시방편일 뿐이다. 감각이 둔해진 것은 손끝뿐인데 온몸에 냉기가 감도는 듯하였다. 이럴 땐 알싸하게 목구멍을 타고 들어와 알차고 뜨거운 부피로 온몸을 일어나게 해 줄 것이 필요하다. 진한 생강 향을 떠올렸다. 비스듬히 비추던 햇볕이 금방이라도 누워버릴까 걱정이 되었다. 생강을 사기 위해 시장으로 향하는 발걸음이 마음만큼 조급해졌다. 소란함이 들끓어 편안함이 우러나는 곳이 시장이다. 골라 골라, 싸다 싸, 구경은 거..

2020 동양일보 신인문학상 당선 물이 펄펄 끓는다. 그저 멍하니 주전자를 바라본다. 부글부글하던 주전자는 이내 뚜껑을 들썩인다. 불은 노랗게, 파랗게, 빨갛게 시시때때로 변하며 물이 다 끓었음을 온몸으로 알리고 있다. 굉음을 내며 금방이라도 뭔가가 터질 것 같은 느낌이다. 이글거리는 불꽃을 한참 바라보다 나는 힘없이 보리차 티백 하나를 주전자에 넣었다. 터덜터덜 소파로 가 앉은 나는 생각에 잠긴다. 영채가 태어난 뒤로는 한 시도 고요할 틈이 없던 우리 집이었다. 오랜만에 찾아온 고독이 소름 끼치도록 밉다. 눈이 제 아빠를 닮아 서글서글하고, 눈동자는 나를 닮아 투명한 갈색을 띤 애였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애였다. 금방이라도 그 애가 엄마 하며 뛰어올 것 같다. 하지만 정말 이상하게도 난 영채를 ..

2016 제23회 동양일보 신인문학상 당선 한 폭의 수묵화가 펼쳐진다. 시간이 응축된 결 사이로 먹빛 농담들이 그윽하게 번져 있다. 백년의 세월 속에 잠시 머물렀던 시간들이 망설이듯 멈춰 섰다간 일필휘지 굽이쳐 흘렀다. 마을회관을 지으려고 빈 집을 허물면서 베어진 감나무였다. 차탁으로 귀히 쓰인다는 지인의 말을 듣고 찾아간 자리였다. 반으로 자른 단면을 손으로 쓰다듬으니 아릿한 기억들이 묻어나온다. 감이 주렁주렁 달린 시골마을이 열두 폭 병풍처럼 펼쳐진다. 가을걷이가 끝날 무렵이면 담장을 넘어온 가지마다 홍시가 탐스럽게 익었다. 초가집 일색인 마을에서 단 하나 뿐인 기와집이 할머니의 집이다. 고샅길 막다른 곳에 이르면 솟을대문이 어린 나를 압도했다. 거동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증조할아버지가 아래채에 기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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