짱짱한 여름 햇살이 마을 구석구석에 내려앉는다. 성안숲의 소나무는 강렬한 빛의 기운을 받아 기개에 날개를 달았다. 모습은 드러나지 않지만, 자양분을 위로 밀어 올리고 있을 뿌리가 눈앞에 어른거린다. 마을 입구로 들어선다. 길게 이어진 돌담길이 굽은 나무줄기 같다. 뿌리가 준 양분을 곁가지로 배달하는 줄기처럼 골목길은 이 집 저 집으로 삶의 지혜를 수없이 날랐으리라. 돌담을 이루는 돌의 모습이 가지가지다. 길쭉한 돌과 납작한 돌, 둥근 것과 모난 것, 머리보다 큰 돌과 주먹보다 작은 돌이 각자의 자리에서 평안을 붙잡고 있다. 이런저런 사람이 만나 서로 보듬고 감싸며 살아가는 한밤마을 사람들의 일상을 보는 듯하다. ‘골목 끝에 무엇이 있을까.’ 설레는 마음이 걸음을 재촉한다. 돌담을 벗어나자 잔디 깔린 넓은..
모래밭에 섰다. 바다를 보기 위해 가파른 하루를 내던지고 달려왔다. 통성명을 생략한 채 다짜고짜 성내며 달려드는 바람으로 휘청인다. 속내를 터놓기도 전에, 옷깃을 풀어헤치고 머리카락을 헝클어트린다. 이방인의 침입을 허락하지 않겠다는 듯 싸늘한 한기까지 몰고 와 겁박한다. 바람과 내통한 파도는 거세게 밀어닥치며 모래톱을 후려친다. 어스름이 다가와 사위를 다독여보지만, 뿌리라도 뽑을 것처럼 포효하며 요동치는 바람으로 속수무책이다. 바다를 쟁여 넣으려 호기롭게 나섰던 나는 주춤한다. 쪽빛 숨결을 들이마시는 건 고사하고 숨통을 틀어쥐는 바람의 위력에 뒷걸음친다. 허둥대다가 뭔가에 툭 걸린다. 돌이다. 주먹만 한 돌이 모래밭에 처박혀 있다. 발꿈치에 걸리지 않았다면 알아채지 못했을 외진 곳에 오도카니 붙박였다. ..
모니터가 연신 빽빽거린다. 그래프의 파동도 눈에 띄게 느슨해졌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의료진을 호출하지 않는다. 그들 역시 구경꾼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자식이라는 참담한 이름으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고작 기기의 타전을 당신의 고별사인 듯 참담하게 받드는 것뿐이다. 아버지는 수식어를 즐기지 않는 분이셨다. 다정다감한 어록을 자랑하는 달변가는 더더욱 아니셨다. 당신 안에서 거르고 걸러진 언어들만 간결체의 어투로 나지막이 발설되곤 했다. 그래서일까. 아버지의 입에서 때와 장소에 위배되는 헛문장이나 비문이 흘러나오는 것을 보지 못했다. 말줄임표가 자주 등장하는 아버지의 수사법은 쉬 해독될 수 없었다. 나는 징검돌처럼 띄엄띄엄 도달하는 몇 마디만으로 미꾸라지 밸 따듯 당신을 건너뛰었다. 오독으로 ..
아파트 현관문 앞에만 서면 가슴이 두근거리고 호흡이 가빠진다. 집에 들어가야 하는데, 잠시 머뭇거리다가 큰 숨 한번 뱉어내고 비밀번호를 꾹꾹 눌렀다. 아이들이 먼저 알고 뛰어나온다. 막내 얼굴에 그리움이 묻어있었고, 아이들의 눈을 보니 마음이 시렸다. 막내가 안기면서 “엄마, 방금 언니가 나 놀렸어.”, “아이고, 그랬어, 왜 너는 동생을 놀려?” 하면서 일상의 대화를 안고 거실로 들어왔다. 그 순간 내 눈을 사로잡은 것은 베란다에 가득 쌓여있는 배추들. 앗, 김장이다. 순간 몸이 얼어버려 막내를 잡고 있던 손을 놓아버렸다. 큰딸은 순식간에 차가워진 엄마의 표정을 감지하고 조용히 동생들을 데리고 방으로 들어갔다. 예민하게 나의 마음을 알아채는 아이들과 달리 시어머니는 오히려 며느리의 늦은 귀가에 역정을 ..
강을 건너야 할 나룻배는 보이지 않는다. 나룻배로 양쪽을 이어주던 뱃길은 끊어진 지 오래다. 커다란 돛에 팽팽한 바람을 담고 낙동강을 오르내리던 황포돛배도 흔적이 없다. 제방 위에 박제처럼 전시된 돛배의 모형만이 메마른 뭍에 닻을 내리고 젖은 그림자를 말리고 있을 뿐이다. 강의 내밀한 이력이 켜켜이 쌓인 강바닥을 콘크리트 다리로 우악스럽게 딛고 서 있는 무심한 삼강교가 세월의 비정함을 느끼게 한다. 세 강이 만난 곳이다. 태백에서 발원하여 모데미풀을 적시고 온 낙동강이 안동을 지나 서쪽으로 흐르다가 이곳에서 남쪽으로 크게 방향을 튼다. 소백산에서 발원한 내성천은 비룡산을 감고 휘돌아 용틀임을 하고, 문경의 사불산을 떠나 흘러온 금천을 온몸으로 맞아들인다. 세 강은 한줄기 낙동강이 되어 도도한 장강의 ..
수직으로 곧게 뻗은 대나무 군락, 속을 비운 대들이 하늘을 찌를 듯하다. 흘러넘치는 푸르른 본능 사이사이로 햇살이 부서져 내린다. 댓잎에 튕긴 빛이 눈이 부시도록 반짝인다. 바람이 불자 일제히 우듬지를 출렁이며 허공에 부서진 소리를 쓸어 담는다. 대나무들은 하룻밤에도 훌쩍 키가 자란다. 늦게서야 자라는 대는 죽죽 뻗고 싶지만, 햇볕은 먼저 큰 친구들이 차지한다. 시간이 갈수록 초라한 모습이 도드라진다. 버스럭거리는 낙엽만이 골골이 파인 상처를 감싸줄 뿐이다. 속 깊은 자괴감에 비하면 겉면을 타고 내리는 고통쯤은 참을만하다. 제때 자라지 못한 몸뚱이는 결핍의 흔적을 고스란히 남긴다. 시간이 갈수록 마디를 파고드는 골이 깊어진다. 생장의 마디마다 사연을 간직한 채 낮은 자세로 사는 법을 터득해야만 한다. 골..
두부는 순하다. 뼈다귀도, 발톱도, 간도, 쓸개도 없다. 단호한 육면 안에 방심한 뱃살을 눌러 앉히고 수더분한 매무시로 행인들을 호객한다. 시골 난장부터 대형마트까지 앉을 자리를 가리지 않지만 조심해서 받쳐 들지 않으면 금세 귀퉁이가 뭉개지고 으깨진다. 날렵하게 모서리를 세워 각 잡고 폼 잡아 봐야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위태로운 제국이 몸이라는 것을 스스로도 알고 있는 눈치다. 생살을 갈라도 소리하지 않고 날카로운 칼금에도 피 한 방울 흘리지 않는다. 슴슴하면 슴슴한 대로 얼큰하면 얼큰한 대로 주연이든 조연이든 탓하지 않고 부드럽게 어우러지는 그는 어둠의 집에서 막 출소한 젊은이에게 숫눈 같은 육신을 송두리째 보시하기도 한다. 괜찮다고, 지난 일은 잊으라고 저 또한 진즉 열탕 지옥을 견디고 환골탈태로 새..
그가 오늘의 기분을 고른다. 기분은 Y혹은 y. 바로 나다. 존재감은 목에 감기는 그 순간부터이다. 엄숙할 때의 나는 Y, 바람에 날리듯 경쾌한 기분의 나는 y라서 때때로 달라지는 그의 감정을 살핀다. 옷장에는 서른 남짓한 내 동료들이 있다. 신입 몇을 제외하면 대부분 한물갔다. 오래된 친구들을 그가 선뜻 내치지 못하는 것은 그날그날 기분과 분위기에 맞는 구색을 맞추기 위함이다. 그는 오늘 빨간 바탕의 흰 점박이 나를 골랐다. 가장 무난한 선택이다. 어제의 한랭전선을 밀어내고 맑은 고기압을 회복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어제는 며칠 동안 시장조사를 하고 통계를 내어 작성한 보고서가 퇴짜를 맞은 날. 보고서를 훑던 상사가 그의 머리 위로 비행접시를 날렸다. 핏발선 상상의 목에 묶인 기분만큼 그의 기분도 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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