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미 시인 1967년 서울에서 태어났으며, 이화여자대학교 법학과를 졸업했다. 2001년 《문학과사회》에 〈나는 쓴다〉 외 3편의 시를 발표하여 시단에 나왔다. 김정환은 이성미의 시집 《너무 오래 머물렀을 때》의 해설 〈변형하는 정신과 상상하는 육체의 변증법〉에서 이성미를 최승자의 뒤를 잇는 시인의 대열에 포함시켰다. 시로여는세상 작품상을 수상했다. 시집으로 《너무 오래 머물렀을 때》 《칠 일이 지나고 오늘》 《다른 시간, 다른 배열》 등이 있다. 칠 일이 지나고 오늘 / 이성미 한 사람이 가자 이어달리기하듯 다른 사람이 왔다. 그는 가면서 또 다른 사람에게, 나를 넘겨주었다./ 나는 파란 바통이 되어 … 이 손에서 저 손으로… 칠 일이 지나고…// 오늘은 일곱 개의 태양이 뜬 날.// 오늘은 일곱 나라..
번역문과 원문 자리에서 일어나 한가로이 걷노라니 산이 깊어 누가 다시 이 길을 지났으랴! 산그늘은 온통 안개 낀 듯 어둑한데 숲속 눈은 절로 꽃으로 피었구나. 괴이해라! 소나무는 바위에 서려 늙어가고 가련해라! 부처는 암자 벽화 속에 많구나. 종 울리니 절밥이 다 됐나 보다 까악까악 까마귀들 쪼아대는 걸 보니. 睡起吾閒步 수기오한보 山深誰復過 산심수부과 峰陰渾欲霧 봉음혼욕무 林雪自開花 임설자개화 石怪盤松老 석괴반송로 菴憐畵佛多 암련화불다 鐘鳴齋飯熟 종명재반숙 啼啄有寒鴉 제탁유한아 - 박태관(朴泰觀, 1678~1719), 『응재유고(凝齋遺稿)*』 권상 「관음사에서[觀音寺]」두 번째 수[其二] * 凝齋遺稿: 朴泰觀의 詩集이다. 『응재유고』에는 김창흡과 이병연의 비평 27항이 실려 있다. 해 설 이 시를 쓴 ..
자연에 직선은 없다. 불국사 가는 길, 토함산 고갯길 모롱이를 돌 때마다 굽이굽이 동해바다가 숨었다, 드러났다 한다. 고갯길이 바다를 품고 있는 것 같은 푸근한 마음, 곡선이 내게 주는 자연의 맛이다. 탐험가와 원주민의 단거리 경주 일화가 있다. 탐험가는 모든 걸 경쟁과 승패로만 보는 문명인이었기에 앞만 보고 빨리 달렸다. 원주민은 곡선으로 달리며 꽃과 바다를 눈에 가득 담으며 느리게 달리는 자연인이었다. 누가 더 지혜로운가. 누가 더 행복한가. 쭉쭉 뻗은 고속도를 달리다 보면 바둑판 모양의 논을 볼 때가 많다. 사각형은 농지 관리가 편하고, 농기계 사용도 수월하다. 경계가 분명해 토지분쟁의 소지가 없고, 생산량 측정에 많은 도움이 된다. 구체적인 직선이 추상적인 곡선보다 깊이는 없을지 몰라도 생활에 편..
TV에서 갯벌의 먹거리 체험과 관련된 방송을 한다. 벌교에 여행 가서 다양한 꼬막 요리를 먹었던 기억이 떠오른다. 전국에서 생산되는 꼬막 중 벌교산이 최고로 대접받는다. 인근 고흥반도와 여수반도가 감싸는 벌교 앞바다의 여자만汝自灣갯벌은 모래가 섞이지 않고 오염도 되지 않아 꼬막 서식지로는 최적이라고 한다. 여자만의 갯벌은 생명의 땅이고, 꼬막은 생존을 위한 식량이다. 오래전부터 꼬막 채취는 여자들의 몫이다. 길이 2m, 폭 50㎝ 정도의 널빤지로 만든 널배를 타고 갯벌을 샅샅이 훑어야 한다. 배라고는 하지만 동력이 없어 갯벌에서만 사용할 수 있는 일종의 갯벌용 스키라고 할 수 있다. 왼쪽 무릎을 꿇은 채 널배 위에 올려진 플라스틱 양동이에 가슴을 기대고 엎드려 작업한다. 오른발로 갯벌을 밀어 이동하면서 ..
신용목 시인 1974년 경상남도 거창에서 태어났다. 고려대학교 국어국문학과와 대학원을 졸업하고, 2000년 《작가세계》 신인상으로 등단했다. 시작문학상, 육사시문학상 젊은시인상, 노작문학상, 현대시작품상, 백석문학상 등을 받았다. 시집으로 《그 바람을 다 걸어야 한다》 《바람의 백만번째 어금니》 《아무 날의 도시》 《누군가가 누군가를 부르면 내가 돌아보았다》 《비에 도착하는 사람들은 모두 제시간에 온다》 등이 있다. 성내동 옷 수선집 유리문 안쪽 / 신용목 잉어의 등뼈처럼 휘어진/ 골목에선 햇살도 휜다 세월도 곱추가 되어/ 멀리 가기 어려웠기에/ 함석 담장 사이 낮은 유리/ 문을 단 바느질집이 앉아 있다/ 지구의 기울기가 햇살을 감고 떨어지는 저녁/ 간혹 아가씨들이 먼발치로/ 바라볼 때도 있었으나/ 유리..
가을은 소리로부터 오는가 보다. 낙엽 구르는 소리, 벼 익는 소리, 편지 쓰는 소리, 기러기 날아가는 소리가 소리를 물고 소리가 되어 끝없이 번져 나간다. 가을 음악회, 나도 가을이 되어 음악회를 따라나선다. 잎 떨어진 나뭇가지에 음표가 된 참새가 겨울을 부르며 배경 음악처럼 조용히 깔린다. 허수아비 옷깃에서 뛰쳐나온 귀뚜라미가 비올라를 들고 무대 뒤편에서 별들을 재우느라 귀뚜르르, 뚜르르, 뚜르르 흥얼거린다. 가랑잎이 하프 소리를 머금고 시나브로 떨어지고, 콘트라베이스를 활로 긁으며 갈대가 웅웅거린다. 개울물에 떠내려가는 나뭇잎에서 오카리나를 불고 있는 벌레소리도 멀리서 들린다. 첼로를 켜는 억새의 춤사위가 나긋나긋하다. 작은북을 두드리는 대숲 소리가 고즈넉한 오솔길을 불러 모은다. 백파이프를 불며 군..
집에 오니 아들이 팽이를 돌리고 있었다. 요즈음 팽이는 내가 어릴 적 돌리던 줄팽이와는 많이 달랐다. 실내에서도 층간소음 없이 돌릴 수 있도록 바닥에 놓는 팽이 판이 따로 마련되어 있고, 발사 장치에 팽이를 물린 후 부착된 끈을 잡아당기면 거기에서 분리된 팽이가 회전력을 얻어 판 위에서 돌아간다. 아들은 흔들거리면서도 쓰러지지 않고 돌아가는 팽이가 신기한 듯 연신 환호성을 질러댔다. 나는 방해가 되지 않도록 슬그머니 아들에게 다가갔다. 판 위에는 한 쌍의 팽이가 사이좋게 마주 돌고 있었다. 혹시 상대방이 먼저 쓰러지지나 않을까 서로를 격려하고 있는 듯했다. 평생을 의지하며 살아온 부부처럼. 판 위에서 돌아가는 팽이의 모습은 우리의 인생 여정과 흡사했다. 엄마 뱃속에서 나오자마자 목청을 돋우며 우는 아이처..
산골의 가을은 목덜미에서부터 온다. 스산한 기운이 뒷목을 파고들어 등뼈로 스미면 보랏빛 바람 닮은 가을 들꽃은 핀다. 시린 등을 핑계 삼아 화덕 앞에 앉았다. 화르르 타는 장작위에 지난여름 말려둔 인진쑥 몇 가닥을 올린다. 온기 사이로 그윽함이 밀려든다. 너울거리는 불길 속에 어린 계집아이 하나가 보인다. 손바닥만 한 라디오를 옆에 끼고 쇠죽솥 아궁이에 불을 지핀다. 어린이 연속극은 끝난 지 오래다. 골목에선 꼬맹이들 노는 소리가 뒷덜미를 끌어당긴다. 계집아이의 골난 입술이 십 리 밖까지 튀어 나간다. 땔감을 한꺼번에 밀어 넣고 솥뚜껑을 뚫어져라 노려봐도 김이 날 생각을 않는다. 굵은 장작이라도 있다면 넣어두고 달아날 텐데 불쏘시게 같은 짚으론 어림도 없는 일이다. 아이들이 집으로 돌아가 버릴까 애가 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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