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좋은수필 베스트에세이 10선 호랑나비가 우화했다. 생사를 오가는 날개돋이 과정을 거치고서 드디어 세상의 밝은 빛을 보게 되었다. 애벌레 시절의 생김새와는 전혀 다른, 화려한 날개를 가진 새로운 몸을 얻었다. 나비가 껍질을 벗어던지고 나서 제일 먼저 내지른 고고의 일성은 ‘찍’하고 과거를 털어내는 오줌 한 방울이었다. 그리고는 두어 시간 날개를 말린 다음 드넓은 창공으로 날아올랐다. 나비는 완전변태를 하는 곤충이다. 애벌레에서 번데기로 용화 되었다가 성충으로 탈바꿈한다. 같은 곤충이라도 불완전탈바꿈을 하는 메뚜기나 사마귀들은 어릴 때부터 성체와 비슷한 모습을 하고 있다. 그에 반해 나비는 상상하기 어려운 외양의 변화과정을 거친다. 외모만 그런 것이 아니다. 애벌레는 나뭇잎을 갉아먹지만 나비로 변태..
그녀는 한쪽 다리가 불편하다. 오른발을 내디딜 때는 몸이 한쪽으로 기우뚱한다. 장애등급을 받은 그녀는 시어머니를 모시고 있다. 거기다 이혼한 시동생과 아이들 뒷바라지한 지 8년이 되었다. 동네 어른들은 그녀를 효부라고 한다. 그 말이 칭찬처럼 혹은 놀림처럼 들린다. 어느 날 밤, 그녀가 마트에 조카들 간식을 사러가다 옆집 아주머니를 만났다. 옆집 아주머니는 이제 아이들한테 심부름을 보내고 그녀의 건강부터 챙기라고 했다. 몸이 불편한데도 불구하고 밤 껍질을 깎는 부업을 해서 살림과 시어머니 칠순잔치에 보탠 것을 아는 아주머니는 그녀가 애처로웠던 모양이다. 집에 돌아간 그녀는 시어머니에게 옆집 아주머니가 했던 말을 그대로 이야기했다. 불같은 성미의 시어머니가 어찌 마음을 다스렸는지 다행히 아무 일도 일어나지..
길상호(吉相鎬) 시인 1973년 충남 논산 출생. 한남대학교 국어국문학과, 동대학원 졸업. 2001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등단. 현대시동인상, 시인협회 젊은시인상, 천상병시상, 김종삼시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저서로는 시집 『오동나무안에 잠들다』 『모르는 척』 『눈의 심장을 받았네』 『우리의 죄는 야옹』 『오늘의 이야기는 끝이 났어요 내일 이야기는 내일 하기로 해요』 등과 사진 에세이 『한 사람을 건너왔다』가 있다. 청림문학 동인, 천상병기념사업회 이사, 안양예고 강사. 그 노인이 지은 집 / 길상호 그는 황량했던 마음을 다져 그 속에 집을 짓기 시작했다/ 먼저 집 크기에 맞춰 단단한 바탕의 주춧돌 심고/ 세월에 알맞은 나이테의 소나무 기둥을 세웠다/ 기둥과 기둥 사이엔 휘파람으로 울던 가지들 엮어..
한국의 산을 보다가 두 사진에 마음이 끌렸다. 안개가 자욱한 언덕에 텐트가 있었다. 풀잎에 반쯤 가려진 불이 켜진 노란 텐트가 달무리로 보였다. 동트자 어둠에 가렸던 바위와 능선이 어깨를 걷고 옅은 구름 아래로 펼쳐졌다. 커다란 물돌이가 굽이치며 흘러가는 듯한 산등성이에 마음이 뛰놀다 잠이 들었다. 날이 밝자 배낭을 꾸려 밀양으로 향했다. 영남 알프스산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산꼭대기 아래 흰 바위가 눈부시고 산 아래로 매끄럽게 펼쳐진 구릉의 초원이 이국을 떠올리게 했다. 띄엄띄엄 터를 잡은 집은 네모나고 뾰족하고 고운 지붕, 알알이 붉게 익은 사과가 푸른 산을 물들인다. 어린 날에 보았던 만화에 나오는 하이디와 빨간 머리 앤 그리고 말괄량이 삐삐가 뛰노는 환영을 보는 듯했다. 내 안에 어린 나도 등성이 ..
한 칸 폭에 대여섯 걸음 작은 웅덩이 가에 노랑꽃창포 가족이 살고 있었다. 나는 그들의 무심한 사십년지기였다. 노랑꽃창포는 초여름의 문턱에서 좁고 무성한 잎사귀 사이로 길쭉한 꽃대를 올려 듬성듬성 노란 꽃 한 번 피우면 그뿐 더는 사람들의 눈길을 끌 만한 매력이 없어 보였다. 그래선지 내 고장 사람들은 개난초'라 불렀다. 논배미가 밭으로 바뀌면서 창포 가족한테 변고가 생겼다. 쓸모가 없어진 웅덩이가 메워지고 창포 무리는 뿌리째 뽑혀 돌무더기에 널브러져 죽어 가고 있었다. 언덕 아래 후미진 진창에 있는 것들은 이미 목숨을 잃었다. 뽑아내기가 까다로워 제초제를 뿌린 듯했다. 나는 한낮의 참상에 넋을 놓았다. 겨우 숨이 붙어 있는 세 뿌리를 추슬러 남새밭 가에 심었다. 두 해가 지나니 창포 삼 남매는 몰라보게..
라디오도 텔레비전도 흔하지 않은 시절, 여름밤 시골 풍경은 적막하고 무서웠다. 눅눅하고 짧은 밤, 보이지도 않는 도깨비가 골목길을 막았고 간간이 들리는 새끼 떠나보낸 어미 고라니 울부짖음은 들어보지도 못한 귀신 울음소리만큼이나 무서웠다. 먹물 같은 어둠이 장막을 치고 온 집을 둘러싼 감나무들로 인해 연못만큼 작아진 하늘에서 별빛 쏟아져 내리면 밤이 깊어도 쉬이 잠들지 못했다. 일찍 홰에 오른 닭들도 꿈을 꾸는지 부스럭댔다. 여름비 추적추적 내리는 날이면 동사 뒤 창고에 있던 상여에서부터 어룽어룽 희끄무레한 인憐불이 날아 나와 숲속을 떠다니고, 숲을 감싸고 흐르는 개울에는 밤이 찾아오자마자 꽁무니에 인불을 단 개똥벌레 날았다. 신비神祕와 전설傳說이 어둠을 장식하는 고향 여름밤은 무덥고 서늘했다. 사계절 중..
강시일 시인 경북 영덕 출생. 경북대학교 대학원 언론홍보학 석사, 동대학 신문방송학과 박사 수료. 2006년 《현대시문학》으로 등단. 저서로는 시집 『나의 바다』와 문화유적답사기 『경주 남산』, 『역사기행 경주』 1,2권, 『경주 힐링로드』 1,2,3,4권, 『새로 쓰는 삼국유사』 1,2,3권, 공저로 『문두루비법을 찾아서』가 있음. 2015년 경북문협 작품상, 2016년·2018년·2019년 (사)대구경북기자협회 올해의 기자상, 2017년 경상북도문화상, 2019년 《문장》 수필부문 신인상 수상. 문학동인 volume 동인 세상을 의심하다 / 강시일 세상이 나를 의심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사사건건 비밀번호를 호명한다/ 내 통장의 입을 여는 입구에서 비밀번호를 요구한다/ 컴퓨터로 거래하는 일도 인내와..
꽃은 주고받는 것이었다. 연인에게 받은 장미 한 다발, 친구의 전시회에 건넨 수국 한 송이, 화원을 지나다 사 온 프리지어 한 묶음, 모두 뿌리에서 잘린 시한부 생명이다. 반쯤 살아있는 것들은 가볍게 주고받는다. 감탄으로 안았다가 시들기 전에 물구나무서기를 시킨다. 식탁 전등에 검게 마른 장미가 매달려 있다가 툭 떨어져 바스러진다. 밥상으로 낙상한 것이 아니라 천만다행이라며 행주로 쓸어 담는다. 팔순을 넘긴 엄마는 꽃을 키운다. 아기를 대하듯 조심스러운 손길로 꽃잎을 쓰다듬는다. 엄마의 베란다 온실에는 어떤 꽃이라도 피어있다. 크건 작건 흔하건 귀하건 꽃이면 웃음이 피어난다. 도로를 단장하느라 길가에 심어 놓은 이름 모를 꽃들에게도 감탄사를 보낸다. 그러고 보니 어버이날 드린 카네이션도 물에 담가 두고 ..
- Total
- Today
- Yesterda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