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 마당에 외로운 백구는 아래턱을 괴고 먼 산을 바라보고 있었다. 애절하게 그리워한 사람은 늘 곁을 지켰던 신성일, 본명은 강신영이다. 노년 10년을 같이 보낸 영천시 괴연동 성일 가에는 가을이 깊었다. 그는 대구 반촌인 인교동 청기와 외갓집에서 태어났지만, 영덕에서 유년 시절을 보냈다. 외할머니댁의 한옥에 대한 그리움 때문인지 그도 한옥을 짓고 살았다. 대목수인 삼척 한국 전통 가옥학교 이진섭 교수가 기역자형으로 만든 작품이다. 오대산 월정사 부근의 직경 35센티 금강송을 36개 세우고 지붕은 청기와 팔작지붕을 얹었다. 처마 선은 날렵하고 힘이 넘쳐 보였다. 집은 사는 사람의 기운을 닮은 듯 멋이 넘치고 강건해 보였다. 누마루에 누웠다. 옛날 산채가 많이 나고 약재를 채취했다는 채약산을 바라본다. 동으..
길을 세 번이나 헤맸을까. 드디어 창수면 신기리 병풍바위에 닿았다, 둘러싸인 암벽들 아래는 경사가 심하다, 이곳에 사람들이 모였을 터가 보였다. 터를 따라 난 2021년 ‘영해동학혁명기념회’가 복원해 놓은 탐방로를 따라 영해 접주였던 박하선의 옛 집터에 왔다. 병풍바위 양쪽으로 수피(樹皮)가 거칠고 마구 자란 나무들이 서로 엉켜 있었다. 영해 읍성이었던 영해면 사무소에서 이십여 리 떨어진 곳에 병풍바위가 지킨다. 그 틈바구에 1미터가량 자란 한 그루 상수리나무 우듬지에는 빈 둥지가 있다. 새가 떠난 빈 둥지를 보자 ‘새들에 울음소리는 하느님에 울음 소리라’고 하던 해월 신사의 법설(法說)이 생각난다. 모든 살아 있는 것들은 천지 기운인 생명력으로 살고 있다는 생명 사상을 깨우치려 한 말이 아닐까. 혁명의..
김행숙 시인 1970년 서울특별시에서 태어나 고려대학교 국어교육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 국어국문학과에서 석사학위와 박사학위를 받았다. 1999년 《현대문학》에 「뿔」 등이 추천되어 등단했다. 노작홍사용문학상, 전봉건문학상, 미당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강남대학교 한영문화콘텐츠학과 교수이다. 시집으로 『사춘기』 『이별의 능력』 『타인의 의미』 『에코의 초상』 『적막한 손』 『무슨 심부름을 가는 길이니』 등이 있다. 1월 1일 / 김행숙 공중으로 날아가는 풍선을 보면/ 신비롭습니다. 손바닥만 한 고무풍선에/ 공기를 모으면 점점 부푸는 것,/ 점점 얇아지는 것…… 꼭 잡고 있던 아이의/ 손을 놓치면 영영 잃어버리는 것……// 추운 겨울밤 손바닥을 오므려서/ 그렇게 할 수 있다면……/ 길거리의 가난한 사람들이 ..
2021 매일 시니어문학상 수상작 먼 산자락을 휘감은 물안개가 서서히 옅어지며 강은 아침을 맞는다. 물결은 잔잔하게 흐르고 이따금 가마우지에 쫒긴 물고기들이 강물 위로 튀어 올랐다가 잽싸게 달아난다. 고기잡이 배 위에 백로 한 마리 하염없이 홀로 서 있다. 그물을 걷어 올리는 어부의 손길을 뚫어져라 바라보던 녀석이 애처로이 고개 떨구면 어부는 못이긴 척, 작은 고기 서너 마리를 던져준다. 백로는 긴 목을 주억거리며 단번에 물고기를 집어 삼킨다. 나른한 강 수면에 비친 백로의 모습이 어인일로 낯이 익다. 요즘 나는 부쩍 시간을 잊은 채 세상 풍경을 바라보는 일이 잦다. 여름이면 나와 아버지는 서로를 찾으면서 눈을 맞추기 바빴다. 집 근처의 금강으로 투망 메고 고기 잡으러 가고 싶기 때문이었다. 누가 더 좋..
2021 매일 시니어문학상 수상작 사립문 열고 들어서면 감나무 사이로 금반지처럼 둥근 달이 떠 있는 옛집, 그 시댁이 내 추억 속에는 늘 있다. 반짝이는 달빛을 받으며 맨드라미가 장독대를 받치고 있는 집이다. 적적하고 외로운 날이면 나는 마음속에서 무작정 그 집을 찾아간다. 못다 한 사랑 남기고 떠난 시어머니가 툇마루에 앉아 그 시절처럼 나를 기다리고 있는 듯하다. "아가, 한이 엄씨야." 어머니는 나를 늘 다정하게 불렀다. 입담 좋은 이야기로 살기가 바빠 메마른 나의 가슴에 화사한 융단을 깔아 주었다. 어머니의 이야기로 저녁은 푹신했고 부드러웠다. 잠이 오지 않는 밤에는 꽃이 피지 않았는데도 어머니와 함께 있으면 이야기꽃으로 화사했다. "아가, 한이 엄씨야. 아무리 힘들어도 꾹 참고 살다 보면 좋은 날..
정재학 시인 1974년 서울에서 태어나 1996년 《작가세계》를 통해 등단하였다. 2001년 한국외국어대학교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했다. 시집으로 『어머니가 촛불로 밥을 지으신다』, 『광대 소녀의 거꾸로 도는 지구』, 『모음들이 쏟아진다』가 있다. 박인환문학상, 한국시인협회 젊은시인상을 수상했다. 그는 “시인에게 시 쓰는 이유를 물어보면 ‘그냥 좋아서’, 달리 할 말이 없다. 더 멋진 의미가 있으면 좋으련만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다. 발표된 시의 주인은 시인이 아니다. 시인의 의도보다는 독자들이 주체적으로 시 속으로 들어가면 된다. 감상이나 해석이 천차만별인 것도 시의 매력이다. 한 가지로만 해석되는 교과서 시들은 그런 점에서 불행한 시가 아닐까.”(동아일보)라는 말을 독자들에게 남긴다. 어머니가 촛불로..
2021년 제12회 경북문화체험 전국수필대전 입선 코로나19가 창궐한다. 직장, 식당, 체육관 어디를 가도 안전한 곳이 없다. 바깥을 나가려면 마스크를 끼어야 하고, 집에만 머물자니 숨이 막힌다. 이 재난에 할 수 있는 것이 별로 없어 인터넷에 들어가 여행기를 읽는다. 어딘들 나를 끌어당기는 곳이 있으면 재난을 피해 가볼 심산이다. 재난이 들지 않는 곳은 어떤 곳일까. 내로라는 명승지는 거의 다 가봤어도 삼재불입지는 생소하다. 가고 싶은 곳, 찾고 싶은 것, 궁금증이 머리끝까지 솟아올라 좀체 가라앉지 않는다. 인터넷을 뒤적이며 이것저것 알아본 뒤 날을 벼르다가 봉화 춘양에 있는 각화산으로 핸들을 돌린다. 각화사는 신라 신문왕 때 원효가 지은 절이다. 인근에 있던 남화사를 옮기면서 ‘그 절을 생각한다’는 ..
2021 매일 시니어문학상 수상작 강 둔치는 온통 꽃밭이다. 시민의 정서를 배려해 만든 화단에는 튤립과 수선화가 줄지어 앉았고 그 둘레를 따라 조팝꽃이 띠를 이루며 흐드러지게 피어 있다. 아름다움에 취한 사람들이 여기저기서 셔터를 눌러댄다. 눈은 여유로운 분위기에 취해 있으면서 머리로는 조팝꽃에 대한 팍팍한 기억과 보호받지 못한 그분들 모습이 어른거린다. 어려운 시기에 태어나서 몹쓸 병마로 서러운 생을 살다간 그들을 생각하니 마음이 아리다. 여섯 살 어림의 봄이다. 진달래가 진 고향마을 산야는 조팝나무가 점령했다. 긴 가지에 자잘한 꽃송이가 닥지닥지 붙은 꽃나무가 밭둑이나 산기슭에 지천으로 깔렸다. 꽃 모양이 튀긴 좁쌀 같다 하여 좁쌀밥나무 즉 조팝나무라 부른다. 가까이에서 보면 좁쌀처럼 까슬까슬한 식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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