촌가의 질화로는 가정의 한 필수품, 한 장식품일 뿐만 아니라, 그들의 정, 그들의 사랑의 용로이었다. 되는대로 만들어진, 흙으로 구운 질화로는, 그 생김생김부터가 그들처럼 단순하고 순박하건마는, 지그시 누르는 넓적한 불돌 아래, 사뭇 온종일 혹은 밤새도록 저 혼자 불을 지니고 보호하는 미덥고 덕성스러운 것이었다. 갑자기 확확 달았다가 이내 식고 마는 요새의 문화 화로와는 무릇 그 본성이 다른 것이다. 이 질화로를 두른 정경은 안방과 사랑이 매우 달랐다. 안방의 질화로는 비록 방 한구석에 있으나, 그 위에 놓인 찌개 그릇은 혹은 '에미네'가 '남정'을 기다리는 사랑, 혹은 '오마니'가 '서당아이'를 고대하는 정성과 함께 언제나 따뜻했다. 토장에 무를 썰어서 버무린 찌개나마 거기에는 정이 있고, 말없는 이야..
이제로부터서는 차차로 겨울에는 보기 드물던 비가 내리기 시작할 때다. 꽃을 재촉하는 봄비로부터 우울한 가을비에 이르기까지 혹은 비비하게, 혹은 방타하게, 혹은 포르티시모로, 혹은 피아니시모로, 불의에 내리는 비가 극도로 절약된 자연 속에 사는 도회인의 가슴에까지도 문득 강렬한 자연감을 일으키면서 건조한 대지를 남김없이 적실 시기는 이제 시작된 것이다. 참으로 비는 눈과 한가지로 도회인에게 남은 오직 하나의 변함없는 태고 시대를 의미하며, 오직 하나의 지묘한 원시적 자연에 속한다. 겨울에 변연히 내리는 편편백설이 멀고 먼 동경의 성국을 우리가 사는 곳에까지 고요히 고요히 싣고 와 우리에게 여러 가지의 아름다운 시취를 일으킬 수 있음에 못지않게 또한 비는 우리에게 경쾌하고 청신한 정감을 다양 다모하게 일으킬..
문득 어쩐지 몸에 이상이 있음을 느낀다. 몇 차례씩이나 근심스러이 손을 머리에 대어 본다. 그렇다면 머리도 좀 더운 것 같다. 드디어 병은 찾아 온 것일까? 한동안 앓지 않았으니 병도 올 때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약간 억울하기는 하나 조용히 누워 몸을 풀어 버리는 것도 무방하겠지. 진실로 병은 나를 찾아온 것일까? 아무리 생각하고 따져 보아도 그럴 리가 없는 데 이 이상은 그러나 어인 까닭이뇨? 하여간 병의 심방이 틀림없음을 우선 확증하는 것이 절대 필요하므로 여러 가지 방법에 의하여 이전의 건강 상태와 현재의 증상을 혼자서 묵묵히 비교하여 보곤 한다. 원래 인생이란 순순하지 못할 뿐 아니라 흔히는 괴롭고 또 재미조차 없는 물건인데, 이 위에 병까지 뒤집어쓴다면 어이하나? 생각할수록 여러 가지가 마음에 ..
철학을 철학자의 전유물인 것처럼 생각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그러나 그렇게 생각하는 것도 무리한 일은 아니다. 왜냐 하면 그만큼 철학은 오늘날 그 본래의 사명--사람에게 인생의 지식을 교시하려 하는 의도를 거의 방기하여 버렸고, 철학자는 속세와 절연하고 관외에 은둔하여 고일한 고독경에서 오로지 자기의 담론에만 경청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철학과 철학자가 생활의 지각을 완전히 상실하여 버렸다는 것은 참으로 슬픈 일이다. 그러므로 생활 속에서 부단히 인생의 예지를 추구하는 현대 중국의 '양식의 철학자' 임어당이 일찍이 '내가 이마누엘 칸트를 읽지 않는 이유는 간단하다. 석 장 이상 더 읽을 수 있었을 적이 없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는데 이 말은 논리적 사고가 과도의 발달을 성수하고 전문적 어..
나는 매화를 볼 때마다 항상 말할 수 없이 놀라운 감정에 붙들리고야 마는 것을 어찌할 수 없으니, 왜냐 하면, 첫째로 그것은 추위를 타지 않고 구태여 한풍을 택해서 피기 때문이요, 둘째로 그것은 그럼으로써 초지상적인, 비현세적인 인상을 내 마음속에 던져 주기 때문이다. 가령 우리가 혹은 눈 가운데 완전히 동화된 매화를 보고, 혹은 찬달 아래 처연히 조응된 매화를 보게 될 때, 우리는 과연 매화가 사군자의 필두로 꼽히는 이유를 잘 알 수 있겠지만, 적설과 하늘을 대비적 배경으로 삼은 다음에라야만 고요히 피는 이 꽃의 한없이 장엄하고 숭고한 기세에는, 친화한 동감이라기보다는 일종의 굴복감을 우리는 품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니, 매화는 확실히 춘풍의 태탕한 계절에 난만히 피는 농염한 백화와는 달라, 현세적인, ..
책을 읽어도 눈에 잘 들어오지 않는다. 이런 때는 방안에 번듯이 누워 눈만 멀뚱거린다. 움직이는 무엇이 있으면 그나마 방안에 생기가 돌겠다는 어쭙잖은 생각에 끌린다. 어쩌다 움직이는 것이 있기는 하다. 먼지가 그것이다. 나는 대단한 발견이라도 한 듯 심심하던 마음이 즐거워진다. 고놈도 심심했을까. 무슨 곡예비행이라도 하듯 꼬리를 치며 방안 여기저기를 날아다니고 있다. 무리를 지어 날아다니거나 단독비행을 즐기는 놈도 있다. 이쪽 벽에서 저쪽 벽면 쪽으로 낙하산을 타듯이 방바닥으로 유유히 날아 앉는 놈도 있다. 우주유영을 하는 듯한 먼지의 세계가 뜻밖이다. 창문을 통해서 들어오는 긴 세모꼴을 닮은 햇빛이 서치라이트처럼 먼지의 향방을 찾아준다. 먼지의 유영을 나는 조금 더 깊이 보기로 한다. 꽁지가 달린 세균..
잿빛으로 우중충한 하늘이 무거워 보인다. 무슨 사건이라도 금방 터질 것 같다, 전에도 잿빛 하늘이 없었던 바는 물론 아니다. 그때는 비가 오거나 눈이 왔다. 그것은 잿빛의 알갱이 같았다. 푸른 빛깔만이 하늘의 몫이 아니라고 알갱이는 떨어지면서 수군대는 듯 했다. 자리에서 일어나 유리창에 달라붙은 잿빛 하늘을 다시 본다. 멀리 뜬 바다가 하늘을 앞세우고 유리창에 바짝 달라붙어 있다. 바다 또한 잿빛이다. 바다와 하늘의 동심일체를 보다가 나는 깨닫는다. 그것은 근심에 가득 찬 정체불명의 정물화 아닌가 하고. 잿빛은 본래 움직이지 않는 빛깔이라는 생각이 든다. 하늘이 푸른빛을 띠고 있을 때는 구름의 발걸음이 빨랐다. 바다도 예외는 아니어서 배들이 금방 이쪽 연안에서 저쪽으로 사라지곤 했다. 그런데 작은 배들이..
걸레는 밥상에 올라가지 않는다. 밥상에 흘린 밥알과 김치가닥과 생선 뼈다귀를 훔치지 않는다. 상다리 바닥 주변에 엎지른 된장국물을 내시처럼 살살 훔칠 뿐이다. 밥상에 올라앉는 걸레가 있다면 그것은 결례다. 행주가 할 일을 함부로 차지하는 분수 모르는 얌체머리다. 남의 몫을 탐내어 가로채는 찰거머리, 그런 거지발싸개도 설치는 판국이다. 있는 허물과 없는 허물로 남을 짓밟고 헐뜯는 낯짝 두꺼운 인사가 버젓이 명함을 내민다. 그러나 걸레는 그가 할 일을 안다. 방바닥을 닦아내고 책장 아래 먼지를 닦아내고 창틀에 몰래 앉은 오래된 곰팡이를 쓸어낸다. 발바닥을 닦는 발걸레도 있다. 걸레가 되기 전에 걸레는 몸을 닦는 타월towel이었다. 머리에 쓰고 목에 걸기도 했다. 그러나 세월이 지나는 사이 타월은 올이 낡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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