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에 이동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 경기만 등대를 찾아' 중에서 선박을 움직여 대양을 건너가는 항해사는
지나던 발걸음을 멈춘다. 골목시장 포장집에서 붕어빵 틀을 치우고 어묵 솥을 걸었다. 주황색 포장 천막에 '오뎅끼데스까'라고 쓴 비닐 간판이 재치 있다. 동강 난 무가 뜨거운 육수 속에 담기고 굵은 대파 사이로 청홍초가 띄워졌다. 펄펄 끓는 국물 속에 잠긴 어묵들이 얌전하다. 뿌옇게 피어오르던 김이 바람에 흩어져 내린다. 마치 자욱했던 물안개가 사라지듯 가뭇없다. 짭조름한 물 냄새가 난다. 때로는 냄새가 시간을 돌려놓기도 하는 법. 내게도 순식간에 기억 속으로 빠져들게 하는 음식 냄새가 있다. 강물같이 파란 재첩국 내음을 맡으면 "재칫국 사이소" 외치며 발품을 팔던 어머니의 여윈 목소리에 선뜻 숟가락을 들지 못하고, 첫 소풍 때 아버지가 조선간장을 뿌려 토관같이 둘둘 말아 주었던 김밥의 고소함은 아직도 코..
알랭이 그의 "행복론"에서, '파리의 경찰서장이 가장 행복한 사람'이라고 한 말은, 언제 생각을 해 보아도 재치 있고 의미심장한 말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경찰서장이 가장 행복한 사람이라고 하는 것은, 예기하지 않았던 사건들이 뒤를 이어 기다리고 있고, 직책상 그것을 처리하지 않아서는 안 되기 때문에, 할 일이 없어 하품을 하거나 적적한 느낌이 들 때는 결코 있을 수 없기 때문인 것이다. 이 말은, 사람이란 일을 하는 데서 행복을 누릴 수 있고, 행복을 차지하기 위해서는 일을 해야 한다는 뜻으로 풀이할 수 있겠다. 사실, 일에 열중하고 있노라면, 몸과 마음에 일종의 리듬이 생겨 쾌적한 느낌을 맛볼 수 있고, 일한 자리가 생기게 되므로, 역시 일종의 정복감 같은 것을 느낄 수 있게 된다. 더구나 특정한..
내가 그를 처음 만난 곳은 동네 목욕탕에서였다. 탈의장에서 옷을 벗다 말고 나는 한동안 그를 지켜보았다. 그는 한쪽 손으로 벽을 더듬어 가고 있었다. 탈의장 안에 다른 사람은 없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욕탕 문의 손잡이를 찾아내고는 곧장 안으로 들어갔다. 욕탕 안은 한산했다. 나와 그 외에 목욕하는 사람이 둘. 그는 다시 손끝으로 벽을 더듬더니 샤워기 아래에 섰다. 손끝으로 물 온도를 가늠 하던 그는 곧장 샤워를 했다. 비누칠을 하고 두 번 거푸 머리를 감는 모습도 보였다. 샤워가 끝난 뒤에는 양치질이 있었다. 들고 온 작은 손가방에서 그가 칫솔을 꺼냈다. 그는 다시 한쪽 손으로 벽을 더듬어 가기 시작했다. 그의 손에 치약이 잡혔다. 그러나 그는 치약을 스쳐갔다. 그가 찾는 것은 치약이 아니..
나무에 잘 오르는 놈은 나무에서 떨어져 죽고, 물 헤엄을 잘 치는 놈은 물에 빠져 죽는다 하니, 무슨 소리뇨? 두 손을 비비고 방안에 앉았으면 아무런 실패가 없을지나, 다만 그러하면 인류 사회가 적막한 총묘와 같으리니, 나무에서 떨어져 죽을지언정, 물에 빠져 죽을지언정, 앉은뱅이의 죽음은 안 할지니라. 실패자를 웃고 성공자를 노래함도 또한 우부(어리석은 사람)의 벽견이라. 성공자는 앉은뱅이같이 방 안에서 늙는 자는 아니나, 그러나 약은 사람이 되어 쉽고 만만한 일에 착수하므로 성공하거늘, 이를 위인이라 칭하여 화공이 그 얼굴을 그리며, 시인이 그 자취를 꿈꾸며, 역사가가 그 언행을 적으니, 어찌 가소한 일이 아니냐. 지어 불에 들면 불과 싸우며, 물에 들면 물과 싸우며, 쌍수로 범을 잡고 적신으로 탄알과..
1 한 사람이 떡장사로 득리하였다면 온 동리에 떡방아 소리가 나고, 동편 집이 술 팔다가 실패하면 서편 집의 노구도 용수를 떼어 들이어, 진할 때에 같이 와--하다가 퇴할 때에 같이 우르르 하는 사회가 어느 사회냐. 매우 창피하지만 우리 조선의 사회라고 자인할 수밖에 없다. 삼국 중엽부터 고려 말일까지 염불과 목탁이 세가 나, 제왕이나 평민은 물론하고 남은 여에게 권하며, 조는 손에게 권하여 나무아미타불한 소리로 팔백 년을 보내지 안하였느냐. 이조 이래로 유교를 존상하매, 서적은 사서오경이나 그렇지 않으면 사서오경을 되풀이한 것뿐이며, 학술은 심, 성, 이, 기의 강론뿐이 아니었더냐. 이같이 단조로 진행되는 사회가 어디 있느냐. 예수교를 믿어야 하겠다 하면, 삼 두락 밖에 못 되는 토지를 톡톡 팔아 교당..
돈세탁 상식 / 엄현옥 견디기 힘든 소음이었다. 녀석은 세상의 모든 고통을 안고 물속에서 덜덜거렸다. 탈수 때면 통증으로 몸을 쥐어짜며 비명을 지르기 일쑤였다. 두어 번 서비스를 받기도 했다. 서비스 기사가 다녀가면 쓸 만했으나, 며칠 후 고질병은 재발했다. 참을 만큼 참았다. 십년지기와의 작별을 서두르기로 했다. 새로 들인 세탁기는 몸체부터 듬직했다. 빛나는 회색빛 사각면체에 뚜껑이 유리여서 세탁조가 훤히 보였다. 탈수 시에도 미미한 기계음만 들렸다. 소리 없이 강한 녀석이었다. 뚜껑에는 손바닥만 한 스티커가 붙어 있었다. 고딕체로 번쩍거리는 스티커의 제목은 ‘세탁상식’이었다. ‘세’라는 글자 앞에 심플하게 도안한 티셔츠와 물결무늬가 그려져 있어, ‘돈’의 상형 문자처럼 보였다. 그로인해 ‘..
아이고, 시상에, 간밤에 꿈자리가 와 그래 시끄럽덩고. 무시라, 구리이가 글키 큰 건 첨 밧쓴께. 한 놈이 방으로 기 들오디만 고마 내 모가지를 팍 물고 내빼뿌는 기라. 증말루 실코 무서븐 기 배암인데. 을매나 식겁했던지 이불에 땀이 푹 다 젖었더라꼬. 억수로 기분 나뿌대. 마, 일나자마자 꿈 해몽을 안 차자밨나. 아이쿠, 머라카노? 이기 웬 떡잉기요. 복권 사라 카네. 근디 복권을 우째 사능고? 사바야 알제. 일 안하고, 맨날 빈둥빈둥 나자빠져 디비 자거나, 깰바꼬 요행만 바래는 사람이 복권 사는 줄 알았디마, 내가 그 짝 날 판인기라. 안 사고 지나갈라 카이 염팡 당첨될 꺼 가꼬, 사러 갈라 카이 또 와이래 부끄럽노. 모티라도 있으마 숨고 싶다. 혹시 복권 살 때 아는 아지매라도 보마 “아이고 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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