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 군에게 김 군이 다녀간 어젯밤에 나는 잠을 이루지 못했소. 김 군에게 보내는 이 편지는 쓰고 싶으면서도 실상은 쓰고 싶지 않는 글이오. 왜냐 하면 너무도 어리석은 일을 적어야 하기 때문에, 너무도 슬픈 사연을 담아야 하기 때문이오. 그러나, 나는 이 글을 꼭 써야만 한다는 무슨 의무감 같은 것을 느끼었소. 그래서 이 붓을 들었소. 어젯밤 우리가 만난 것은 참으로 오랜만의 일이었소. 얼마나 반가웠는지 모르오. 우리는 여러 가지 이야기를 나누었소. 아, 거기서만 끝났더라면 얼마나 좋았겠소. 그대는 품속에서 그대의 돌아가신 어머니의 사진 한 장을 꺼내어 내게 보여 주었소. 나는 그대의 어머니를 생전에 뵈온 일이 없었기로 반가이 받아들었소. 그런데, 그대의 가신 어머니는 한 눈을 상하신 분이었소. 그것을 본..
아무도 없는 방에서 울어보신 적 있나요? 저는 울고 싶을 때가 많았지만, 나약한 제 모습 보는 게 두려워 참았습니다. 한번 울기 시작하면 거짓말 조금 보태서 한 양동이의 눈물을 흘려야 했으니까요. 참고 참아도 눈물이 핑그르르 돌면 속 입술을 잘근 깨물며 견딘 때도 있었습니다. 그렇게 버티다가 본능적 속심이 이성적인 현실을 이길 경우, 꼼짝 없이 봇물이 터지고 말았습니다. 누가 볼까 민망하여, 아니 누구에게 못난 모습 들키기 싫어 빈 방에 들어가 펑펑 울었습니다. 그러다가 누군가 방문 여는 소리가 나면, 한쪽 구석에서 솜이불을 뒤집어쓰고 꺽꺽 목을 놓았습니다. 제3자가 말릴 엄두를 못 내게끔 이불자락으로 온몸을 돌돌 싸서 틀어쥐고 앙금이 죄다 토해지도록 용을 썼습니다. 울 장소가 정 마땅찮을 시, 재래식화..
"과묵한 사람이 좋아요"라고 대답했던 것은 내 사춘기 시절의 취향이었다. 한일자로 굳게 다문 입모습에서 나는 이제 더 이상 의지나 매력 같은 것을 느끼지 않게 되었다. 매력이라니, 어림도 없다. 특별한 일이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나는 근래에 들어 점차 과묵한 사람이 싫어진다. 말이 없는 사람은 우선 그 속마음을 알 수 없으니 쉽게 가까워지지가 않는다. 침묵은 금이요, 웅변은 은이라고 하였지만 어떤 경우의 침묵이나 늘 금이 되는 것은 아니다. 침묵은 녹이 슨 구리가 될 때도 있고, 삭은 막대기가 될 때도 있는 것이다. 엘리베이터 안에서 잠시 만난 사람일지라도 표정이 있는 사람이 따뜻하게 느껴진다. 무표정한 표정은 데스마스크와 다를 바가 없다. 그에게서는 인간의 훈김이라곤 찾아볼 수가 없을 것이다. 때로는 ..
돌을 벗 삼아 곁에 두고 묵묵히 앉아 있다. 망중한(忙中閑)이라 할까. 때로 이러한 한적한 시간이 가물거리는 인간의 심혼에 생명의 불길을 당겨 줄지도 모른다. 마침 권솔은 모두 외출하고 빈집에 혼자 있다. 창 밖에는 신록의 물결이 연신 너울거리고 있다. 한동안 버려뒀던 수석이란 이름의 돌들이 저마다 몸짓을 하며 가슴으로 다가온다. 돌에도 정이 오가는 것일까. 하나하나 먼지를 닦고 손질을 해본다. 모두가 한결같이 돋보인다. 10여 점 되는 돌들이 그렇게도 모두가 개성이 뚜렷할까. 질감이 다른가 하면 그 형태며 색감이 다르고, 선과 굴곡이 서로 상이한가 하면 균형이며 조화며 규모가 또한 다르다. 어찌 그뿐이랴. 오랜 수마(水磨)와 풍화작용에서 얻은 돌갗의 세련미며 모양새의 추상미는 더더구나 다르다. 수석인들..
애기똥풀, 며느리밥풀꽃, 홀아비꽃대. 우리나라 풀꽃들을 보면 황토 내음과 바람의 숨결과 이슬의 감촉이 느껴진다. 너무나 순진하고 착해 보여 눈물이 핑 돌 것만 같은 풀꽃들이 낯설지 않은 것은 언젠가 한 번 대지의 품속으로 돌아가게 되면, 무덤가에서 웃어줄 꽃이기 때문일까. 풀더미 속에서 누구의 눈길도 받지 못하고, 이름 한 번 불려지지 않을 듯한 부끄럼 잔뜩 머금은 풀꽃들을 보면, 가만히 다가가 귀엣말을 나누고 싶다. 풀꽃의 표정은 시골 아낙네처럼 수수하다. 치장을 하지 않아 눈을 끌지 않으나 순박하고 단아하다. 우리 산등성이의 고요하고 은근하게 이어지는 임의 눈썹 같은 곡선, 어둠을 걷어내는 여명이 창호지문을 물들일 때의 눈부시지 않으나, 마음이 환해지는 그 삼삼하게 맑은 빛깔을 품고 있다. 애써서 가..
천막 안에 앉아 있을 수 없는 달, 사슴이 뿔을 가는 달, 또는 들소가 울부짖는 달ㅡ인디언이 부르는 7월의 다른 이름들이다. 1년을 반으로 접어 나머지 절반을 새로 시작하는 7월은 살아있는 그 어떤 것도 가만히 내버려두지 않는다. 초록은 보다 원숙해지고 열매는 더욱 단단해지며, 곤충이나 동물은 부지런히 짝짓기를 하고 알을 낳고 허물을 벗는다. 1년 중 생명력이 절정에 이르는 시간, 바로 7월이다. 지하철이 답답한 터널을 빠져 나오자 오후의 햇빛이 객차 구석구석을 비추었다. 꾸벅거리며 조는 사람들 머리 위에도 햇빛이 머문다. 나는 눈이 부셔서 뒤로 한 발 물러섰다. 사람들 물결에 밀려 계단을 오르고 내리는 사이 내 몸을 지탱하는 발은 굽 높은 구두 속에서 조여들고 있었다. 힐을 신고도 잘 뛰어다니던 때가 ..
들녘에 피어나는 들국화는 피고 싶어서 핀다. 꽃더러 왜 피느냐고 묻지 말라. 살아있음의 가장 확실한 모습임을……. 내가 수필을 쓰는 것도 마찬가지다. 어느 시인은 나에게 “가슴으로 오는 소리를 듣고, 가슴으로 글을 쓰는 사람"이라고도 하고, 어느 분은 “혼魂으로 쓰는 글"이라고 한다. 삭여 보면, 본능적인 욕구의 표현행위로 보는 것이 아닌가 싶다. 작가가 작품을 쓸 때 그는 곧 자신의 생명을 피우는 작업이라 생각한다. 수필이라는 나의 꽃은 암울했던 시기에 구원의 손길로 왔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작가가 된다거나 지면에 발표하려는 꿈을 갖지 못하고 살아가는 과정에서 부딪히는 고통이 글을 쓰게 하였고, 그렇게 함으로써 살아날 수 있었다. 누구에게 기대어 위로 받고 싶거나 스스로 무너질 때 차오르는 비애를 기..
산골의 아침은 제주도에서 온 배가 닿은 항구만큼 시끄럽다. 어스레한 박명 속에서 감자밭이 모습을 드러낼 즘 뻐꾸기, 산비둘기, 방울새, 곤줄박이 이름도 알 수 없는 새들이 뽕나무 가지 사이에서 뭐라고 뭐라고 조잘거린다. 도시 사람들은 산골에 살면 촉촉한 감정이 되살아나 낭만이 뚝뚝 떨어질 거로 생각할지도 모른다. 먹을 것도 마냥 있고 하늘도 마냥 푸르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밤꽃이 자지러지게 피면 아무 데나 똥을 싸는 새들이 슬슬 나의 부아를 돋운다. 새들과 쌈박질하면서 여름을 보내는 엉덩짝 펑퍼짐한 아줌마가 있다는 것을 사람들이 좀 알아주었으면 좋겠다. 빨래에다 방정맞은 초랭이처럼 똥을 싸놓고선‘나 잡아봐라.’삐융 날아간다. 머리를 찧고 싶다. 산뜻이 저기 박달나무에 둥지를 틀면 여북 좋을까만 내 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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