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개 마루턱에 방석소나무가 하나 있었다. 예까지 오면 거진 다 왔다는 생각에 마음이 홀가분해진다. 이 마루턱에서 보면 야트막한 산 밑에 올망졸망 초가집들이 들어선 마을이 오른쪽으로 넓은 마당 집이 내 진외가로 아저씨뻘 되는 분의 집이다. 나는 여름방학이 되어 집에 내려오면 한 번씩은 이 집을 찾는다. 이 집에는 나보다 한 살 아래인, 열세 살 되는 누이뻘 되는 소녀가 있었다. 실상 혼수를 따져 가며 통내외까지 할 절척(切戚)도 아니지만 서로 가깝게 지내는 터수라, 내가 가면 여간 반가워하지 아니했고, 으레 그 소녀를 오빠가 왔다고 불러내어 인사를 시키곤 했다. 소녀가 몸매며 옷매무새는 열 살만 되면 벌써 처녀로서의 예모를 갖추었고 침선이나 음식솜씨도 나타내기 시작했다. 집 문 앞에는 보리가 누렇게 패어 ..
제5회 경북일보 문학대전 수필 금상 젖은 빨래는 묵직하다. 머금은 물이 버티지 못하고 아래로 떨어진다. 누군가의 눈물처럼 흐른다. 지속적으로 떨어지는 물방울은 주변을 물바다로 만들기도 한다. 그렇게 범람 했던 자리라도, 시간이 흐르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물기가 마른다. 내 눈물도 그랬을까. 산후조리 중이었다. 산후도우미 아주머니는 9시에 출근이라, 아침에는 남편이 집안일을 도와줬다. 아이가 일찍 깨면 분유를 타서 가져다주고, 쌀을 씻어 안치고, 쓰레기까지 말끔히 정리했다. 그 날은 다른 날보다 바빠 보였다. 나는 5살 첫째와 태어난 지 한 달도 안 된 둘째의 사이에 누워 뒤척였다. 남편은 욕실에서 한참을 나오지 않고 텀벙대는 물소리만 들렸다. “자기야, 뭐해?” 내 물음에 그는 바로 응답했다...
실존과 초월, 주체와 타자, 안과 밖, 정신과 몸, 모든 경계에 이를 때 우리는 문을 통해 넘나들고 때로 양존하는 순간을 맞기도 한다. 그래서 세계는 온통 문이다. 그 문들을 통해 한 세계에서 다른 세계로 가는 길 또한 무수히 많다. 우리는 수많은 문을 통과하며 살아가지만 똑같은 문은 없다. 같은 문을 통과해도 그 경험은 매 번 다르다. 매 순간 변화하는 세계의 사물들은 비슷한 것 같아도 모두 다르기 때문이다. 한 사람의 긴 생의 여정에서, 크고 작은 통과제의를 거칠 때마다 문을 통하지만 우리는 자신이 드나들었던 문들을 일일이 기억하지 못한다. 다만 그 길을 지나며 변화하고 나아갈 뿐이다. 때론 기억하지 못한다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이던가. 사립문(대문) 동짓달 깊은 밤, 꿈결인 듯 잠에서 깨어나다 사립..
피하고 싶지만 그럴 수 없다. 반드시 극복해야 할 대상이다. 겹겹이 쌓인 산허리 중에 그나마 쉬운 곳에 길을 냈으나 편히 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몇 굽이 돌고 돌아 가쁜 숨 몰아쉬며 가풀막을 힘겹게 올라야 넘을 수 있다. 재를 처음 넘어 본 것은 초등학교 2학년 초, 설구산에 온통 붉은 꽃물이 들었던 시기였다. 어머니 손을 잡고 타박타박 걸었다. 노산의 늦둥이로 태어나 체구는 작고 병약해 두 번의 강을 건너고 재를 넘는 십리 장터를 다녀오는 것은 무리였다. 소풍을 앞두고 옷이랑 신발을 사준다는 달곰한 유혹이 없었다면 재를 오르다 벌렁 드러누웠을 일이다. 기억 속의 주치재는 높기만 했다. 그런데도 이 재를 넘어야 영월이나 제천, 원주를 갈 수 있었고 주천 중학교는 물론 장터에 가느라 곡식을 이고 진 사..
깊이를 가늠할 수 없었어요. 신령스러움이 느껴졌지요. 세상의 가장 복잡한 번뇌와 가슴 안쪽 고갱이의 사랑을 버무려 보석을 만든다면 아마 그런 빛깔이 아닐까 싶더군요. 졸여지고 졸여진 유장한 세월이 두 개의 눈에서 고요로 깊었어요. 외로움이나 그리움의 포물선을 중용으로 벼린 달관의 모습이라고나 할까요. 친정에 들를 때였지요. 동네 입구 당산나무 아래 구순의 노인이 차창으로 인사하는 나를 올려다보며 걱정했답니다. 납작한 돌을 괴고 앉은 채로요. 차고 물맛이 좋은 방앗간 집 우물이 곧 메워질 것이라는 겁니다. 뜬금없었지요. 동네 우물 없어진 지가 언제인데……. 골짜기 깊숙이 들어앉은 탓에 오랫동안 외면 받았던 친정 동네가 요즘은 전원주택지로 인기가 치솟고 있어요. 외지인들이 들어와 헌집을 부수고 높은 곳엔 축..
골목은 눈부시지 않아서 좋다. 휘황한 네온사인도, 대형마트도, 요란한 차량의 행렬도 없다. ‘열려가 참깨!’를 외치지 않아도 스르륵 열리는 자동문이나. 제복 입은 경비원이 탐색하는 눈빛으로 위아래를 훑어 내리는 고층빌딩도 눈에 띄지 않는다. 길목 어름에 구멍가게 하나, 모퉁이 뒤에 허름한 맛집 하나 은밀하게 숨겨두고, 오가는 사람들의 발자국 소리를 일상의 맥박삼아 두근거리는, 웅숭깊고 되바라지지 않은 샛길이어서 좋다. 골목은 자주 부끄럼을 탄다. 큰 줄기에서 뻗어 나와 섬세한 그물을 드리우는 잎맥과 같이, 골목도 보통 한길에서부터 곁가지를 치고 얼기설기 갈라져 들어간다. 하여 골목의 어귀는 대충 크고 작은 세 갈래 길을 이루기 마련인데 어찌된 일인지 골목들은 입구 쪽을 어수룩이 숨겨두기를 좋아한다. 한두..
우리집과 등성이 하나를 격한 야학당에서 종치는 소리가 들린다. 우리집 편으로 바람이 불어오는 저녁에는 아이들이 떼를 지어 모여 가는 소리와, 아홉 시 반이면 파해서 흩어져 가며 재잘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이틀에 한 번쯤은 보던 책이나 들었던 붓을 던지고 야학당으로 가서 둘러보고 오는데 금년에는 토담으로 쌓은 것이나마 새로 지은 야학당으로 가서 둘러보고 오는데 금년에는 토담으로 쌓은 것이나마 새로 지은 야학당에서 남녀 아동들이 80명이나 들어와서 세 반에 나누어 가르친다. 물론 5리 밖에 있는 보통 학교에도 입학하지 못하는 극빈자의 자녀들인데 선생들도 또한 보교를 졸업한 정도의 청년들로, 밤에 가마니때기라도 치지 않으면 잔돈 푼 구경도 할 수 없는 처지에 있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그네들은 시간과 집안 살림..
흰 구름이 벽공에다 만물상을 초 잡는 그 하늘을 우러러보아도, 맥파만경에 굼실거리는 청청한 들판을 내려다보아도 백주의 우울을 참기 어려운 어느 날 오후였다. 나는 조그만 범선 한 척을 바다 위에 띄웠다. 붉은 돛을 달고 바다 한복판까지 와서는 노도 젓지 않고 키도 잡지 않았다. 다만 바람에 맡겨 떠내려가는 대로 내버려 두었다. 나는 뱃전에 턱을 괴고 앉아서 부유와 같은 인생의 운명을 생각하였다. 까닭 모르고 살아가는 내 몸에도 조만간 닥쳐올 죽음의 허무를 미리다가 탄식하였다. 서녘 하늘로부터는 비를 머금은 구름이 몰려 들어온다. 그 검은 구름장은 시름없이 떨어뜨린 내 머리 위를 덮어 누르려 한다. 배는 아산만 한가운데에 떠 있는 '가치내'라는 조그만 섬에 와 닿았다. 멀리서 보면 송아지가 누운 것만 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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