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는 내리는 게 아니라 태어난다. 태어나는 순간에는 자진(自盡)한다고 말하는 게 더 적절하다. 직립으로 생을 마치는 비의 강렬하리만치 단순한 생 앞에서는 모든 것이 고개를 숙인다. 대지를 북가죽처럼 두드리는 비의 기세를 바라보면서 나무가 곧다, 깃대가 곧다, 탑이 곧다, 사람도 그러할 수 있다고 되뇌어 본다. 수평이 주는 평온을 마다하고 수직의 고통을 잃지 않으려는 것은 지조일까, 오기일까. 여름의 무더위를 식힐 겸 정자의 고향인 함양을 찾았다. 지리산 자락에 자리한 함양으로 가는 길은 몇 구비를 돌고 돌았다. 산줄기를 따라 흐르는 계곡도 뱀처럼 휘돈다. 물길과 찻길이 굽으니 마을 골목도 반달처럼 굽고 주민들의 발걸음도 느릿해 보인다. 백 개가 넘는다는 정자조차 눈발같이 흩뿌리는 계곡수 곁에서 다..
“아이고, 온 집안에 잎사귀들 뿐이네.” 아내는 청소를 하면서 혼잣말을 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온 집안 곳곳에는 펼쳐진 식물도감과 주워온 나뭇잎들로 어지러이 흐트러져 있었습니다. 나는 창밖의 팔공산을 바라보았습니다. 그것들은 그 숲속에서 주워 온 것들이었습니다. 아버지가 생각이 났습니다. 평생을 아버지와 같은 삶을 살지 않겠다는 다짐을 하며 살아왔으면서도 결국 나는 아버지를 닮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시골에서 초등학교에 다닐 때의 일이었습니다. 지금도 그렇겠지만 그 당시에도 부모님 직업을 조사하는 일이 자주 있었습니다. 그것도 공개적으로 하였습니다. “부모님이 농사짓는 사람 손들어.” 선생님이 말씀하시면 반 아이들 대부분이 손을 들었습니다. 그러면 선생님은 대충 훑어보시고 이번에는..
온 천지가 붉은색이었다. 가도 가도 끝이 없는 넓은 벌판은 온통 자운영(紫雲英) 꽃밭이었다. 그 가운데로 이어진 방죽길을 걸어가는 어머니의 흰색 저고리도 붉은색으로 물들었다. 어머니를 졸졸 좇아가는 나의 얼굴이며 온몸은 붉은 자운영 물감을 덮어쓰고 있었다. 꿀과 꽃가루가 유채보다 더 많은 자운영, 그 꽃밭에는 꿀벌들이 윙윙 소리 내며 날아다니고, 흰나비 노랑나비 호랑나비가 숨바꼭질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파란 하늘에 햇살도 눈부신 화창한 봄날, 어머니는 보퉁이 하나는 머리에 이고 다른 하나는 손에 들고 딸네 집으로 나들이에 나섰다. 마흔아홉에 낳았다고 하여 ‘쉰둥이’로 불린 나는 어머니가 가는 길이라면 어디거나 졸졸 따라갔다. 자나 깨나 농사일을 하는 어머니와 50살 나이 차이의 코흘리개 막내둥이와는 ..
--인간은 사회 속에서 사물을 배울 수 있다. 그러나 영감을 받는 것은 오직 고독 속에서다-- 괴테 제일의 탄생 사람은 두 번 태어난다. 한 번은 존재하기 위해 태어나고 한 번은 생활하기 위하여 태어난다. 우리는 어머니의 뱃속에서 출생하여 이 세상에 내던져진다. 나의 몸뚱이가 태어나는 것이다. 그것은 나의 생명의 탄생이요 신체의 탄생이다. 필자는 이것을 제 1의 탄생이라고 일컫는다. 그러나 인간에게는 제 2의 탄생이 있다. 자아가 탄생하고 나의 정신이 태어나는 것이다. 우리는 청년 시대에 이것을 경험한다. 사람은 제 2의 탄생과 더불어 참된 자기가 되고 진실한 인간이 될 수 있다. 동물에는 제 1의 탄생밖에 없다. 동물은 정신 탄생과 자아의 탄생을 모른다. 오직 인간만이 제 2의 탄생을 갖는다. 인간은 ..
내가 가지고 싶은 철학이 있다고 하면, 곧 조화의 철학이다. 조화된 생활, 조화된 인간, 조화된 가정, 조화된 사회, 조화된 역사, 어느 것 하나도 미 아닌 것이 없다. 조화는 곧 미의 원리다. 서로 성질을 달리하는 둘 이상의 요소가 하나의 전체적인 통일을 이루고 있을 때, 우리는 이것을 조화라고 일컫는다. 조화는 진실로 미 그 자체다. 조화는 결코 타협이 아니다. 타협은 내 주장 내 요구와 네 요구가 서로 대립 충돌할 때, 나는 내 주장과 내 요구의 일부를 죽이고, 너는 네 주장과 네 요구의 일부를 포기함으로써, 제삼의 어떤 절충점을 발견하다. 그러므로 타협에는 반드시 자기 부정의 요소가 언제나 따른다. 그러나 조화는 그렇지 않다. 나는 내 위치에서 내 본질과 내 요구를 주장하고, 너는 네 위치에서 네..
왜 우리는 책을 읽어야 하는가? 만나기 위해서다. 누구를? 인류의 위대한 스승들을. 독서는 인생의 깊은 만남이다. 우리는 매일 가족을 만나고 친구를 만나고 스승을 만나고 동료를 만나고 또 이웃을 만난다. 만남이 없이는 인생이 있을 수 없다. 인생을 끊임없는 조우요, 부단한 해후다. 우리는 같은 시대의 사람을 만나는 동시에 옛 사람들과 만나야 한다. 옛 사람을 어떻게 만나는가? 책을 통하는 길밖에 없다. 독서는 옛 사람들과의 깊은 정신적 만남이다. 만남에는 얕은 만남이 있고 깊은 만남이 있다. 불행한 만남이 있고 행복한 만남이 있다. 소비적인 만남이 있고 생산적인 만남, 창조적인 만남이 있다. '옛 사람을 만난다는 것은 그들의 정신과 만나는 것이요, 그들의 사상과 만나는 것이다. 그들의 정신과의 만남, 사..
벽제에서 돌아온 남편의 눈자위가 부석부석했다. 밤새 마신 술 때문만은 아닌 듯했다. 그 눈 쌓인 밤에, 신고 갔던 구두 대신 납작한 플라스틱 슬리퍼가 겨우 발에 걸려 있었다. 거기가 어디라고 예까지 저러고 왔을까 싶어서 ‘구두는 어쩌구요?’ 하는 물음이 입술 끝에까지 달려 나와 대롱거렸지만 애써 삼켰다. 눈동자 속에 일렁이는 것이 아직 채 가시지 않은 술기운 탓인지 그를 보낸 아쉬움 때문인지를 살피느라 숨을 죽인 내게 남편은 잔뜩 쉰 소리로 입을 열었다. “없어져 버리더만. 산처럼 컸던 덩치가 겨우 네 조각 뼈로 남드구먼. 그것조차도 두루룩 갈아 버리니 삶이 한 줌 먼지더군.” 마음 아프게 무얼 그것까지 다 지켜보았느냐는 내 질책에 힐끗 쳐다보는 것으로 남편은 대답을 대신했다. 그의 부음(..
신의 눈초리 / 류주현1 -문학의 필요성과 그 사명 문학자는 시대의 증인이고 그 작품은 시대의 중언이기를 소망한다. 한 시대의 특성을, 그 시대를 사는 개성 있는 인간을 잘 묘출해 내서 현재를 관조하고 미래를 설계하는 것은 문학자의 사명이고 문학의 본질적인 권능이다. 인간상이거나 시대사조거나 그 고유한 특성이 많은 사람들의 공감을 얻는 작품이면 시간이나 공간을 초월하여 오랜 생명을 갖게 마련인데, 그런 경우 작품에서 창조된 사회상이나 인간사는 우리가 혐오하는 양상일 수도 있다. 또는 가장 일상적인 권태로운 소시민의 외면적인 조소에서 시작하여, 차원 높은 내면세계로의 심화를 상징시키는 설득력 있는 꿈의 조형으로 승화되는 예도 있다. 그 어떤 경우거나 문학은 현실적인 토양에서 싹이 돋아난다. 한 시대, 그 ..
- Total
- Today
- Yesterda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