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노을이 출렁이며 창을 넘어온다. 저물며 빚어내는 선연한 빛이 동살보다 눈부시다. 들녘에 선 대추나무 가지가 휘늘어졌다. 주렁주렁 매달린 저 열매처럼 자식들이 여럿이면 무엇하나? 할아버지는 오늘도 자신의 몸집보다 더 커다란 휠체어에 할머니를 앉히고 조심조심 산책을 한다. 저녁들판에 낮게 깔린 노을이 황혼에 든 두 노인의 어깨 위로 곱게 번진다. 저물녘의 풍경이 평온하다. 가을 들을 물들이고 나무를 물들이는 것이 어찌 지는 해의 손길뿐이랴. 저무는 해가 천천히 숨을 고르는 동안 휠체어를 미는 할아버지의 손길도 잠시 멈춘다. 할아버지는 노을빛으로 물든 할머니의 얼굴을 슬쩍 어루만지더니 어깨 위에 흘러내린 머플러를 다시 여미어 준다. 할아버지 역시 이곳 요양병원에 입원 중인 환자이다. 당신의 육신 또한 ..
회사에 여고를 갓 졸업한 신입 사원이 들어왔다. 키도 작고 얼굴도 복숭아처럼 보송송하다. 어쩌다 사원들끼리 우스갯소리라도 하면 뺨에 먼저 꽃물이 번진다. 한번은 실수한 일이 있어서 나무랐더니 금방 눈물을 방울방울 떨어뜨렸다. “우유를 더 좀 먹어야겠군.” 혼잣말을 하면서 돌아서다 말고 물어 보았다. “올해 몇 살이지?” 그러자 신입 사원은 손수건으로 눈 밑을 누르면서 가만가만히 대답하였다. “스무 살이에요.” 여자 나이 스무 살……. 소녀에서 성인으로 턱걸이를 하는 저 나이. 무엇이거나 그저 우습고 부끄럽기만 한 저 시절. 나는 문득 돌아가신 어머니가 생각키웠다. 우리 어머니가 하늘의 별로 돌아 신 나이가 바로 저 스무 살이었던 것이다. 열일곱에 시집와서 열여덟에 나를 낳고 ..
층층으로 된 5톤 트럭에 닭들이 한가득 실려 간다. 닭장 문은 바깥쪽으로 단단히 잠겨 있다. 농장 주인이 닭장 트럭에 마구 집어 던졌을 때의 모습인 양, 꺾인 날갯죽지를 미처 정리하지도 못한 어정쩡한 자세로 좁은 철장에 꽉 끼어 있다. 사력을 다해 파닥거려 보지만, 움직이지 않는 편이 더 낫다는 것을 깨닫기까지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도대체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인지. 앞으로 어떤 운명에 처하게 되려는지, 불안한 차체의 흔들림과 함께 이런 갑작스런 외출이 그저 낯설고 황망할 뿐이다. 트럭이 비탈길을 휘돌아간다. 중심을 잃을 때마다 시간의 속도를 발톱으로 제어해보려는 닭들은 간헐적인 신음소리를 낸다. 하지만 속도는 잡지 못하고 애꿎게 뽑힌 제 몸의 겉 털만 철망 사이에 어설프게 꽂힌다. 위..
오래전, 공직에 있을 때다. 차관이 국장을 부르더니 장관의 경고를 전했다. ‘회의 때 장관 뜻에 반反하는 의견을 말하지 말라.’였다. 귀를 의심하고 넋을 잃은 국장은 장관과 다른 의견을 말했던 두어 번의 일을 더듬어낼 수 있었다. 대면의 일자(一) 충고와 삼자를 건너는 갈지자(之) 힐난詰難은 모양새만 봐도 네 배의 강도强度로 세게 꽂힌다. “중지衆智를 모으자는 회의 아니던가요?” 목에 걸린 가시를 내뱉듯, 국장의 대꾸는 받은 힐난의 충격보다 더 불손했다. 처신을 살피게 해 주려다 머쓱해진 상관의 면전에 뱉어낸 부하의 다음 한 마디에는 더욱 가시가 돋아있었다. “목에 칼이 와도 해야 할 말은 해야지요!” 피의 왕 연산은 신하들에게 신언패愼言牌를 채워 입을 봉쇄하고, 유일하게 진언進言했던 내관 김처선金處..
입은 정교하게 설계된 콘서트홀이다. 그곳에서는 늘 두 대의 피아노를 위한 협주곡이 연주된다. 막이 오르면 무대 중심에서 주인공인 혀가 상하로 마주보게 놓인 피아노를 앞에 두고 앉아 상아빛 건반을 번갈아 두드리며 노래를 부른다. 물론 훌륭한 오케스트라 단원들이 언제나 뒤에서 성실하게 받쳐주고 있다. 팀파니나 북 등 리듬악기를 연주하는 심장, 첼로나 하프를 켜는 가슴, 바순을 코로 오보에를 목으로 내뿜는 폐…. 공연의 성공 여부는 혀의 신중하고 절제 있는 연주에 달려 있다. 무엇보다도 오케스트라와 조화를 이루는 게 중요하다. 혀가 박자나 리듬, 화음 등을 무시하고 제멋대로 날뛰면 공연은 엉망이 되고 만다. 다행히 자상한 창조주께서는 혀를 두 귀와 한 뿌리에 묶어 놓았다. 혀가 연주하는 어떤 것이라도 외부..
그가 쓰러졌다. 육중한 몸이 바닥에 붙어버린 듯 움직이질 못했다. 방과 식탁 사이에 누운 그는 자신의 힘으로 일어나지도 돌아눕지도 못한 채 눈만 껌벅였다. 한쪽 팔과 다리가 축 늘어져 있었다. 그를 본 순간, 여자의 머릿속에는 어떤 영상이 스쳐 지나갔다. 며칠 전의 꿈 내용이었다. 기분 좋은 꿈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특별히 나쁜 꿈도 아니었다. 잠에서 깬 뒤, 꿈은 곧 잊혔다. 다만 뭔지 모를 복잡한 일들이 한꺼번에 터졌던 기억만 남아 있었다. 어딘가로 한없이 쫓기고 있었던 것 같기도 하고, 주위 사물들이 형체 없이 사라진 것 같기도 했다. 쓰러져 있는 그를 보자마자 왜 꿈이 떠올랐는지 여자는 알 수 없었다. 어떤 예감을 상징하듯 의식은 자꾸만 한쪽으로 흘러갔다. 입던 옷 그대로 그는 구급차에 실..
학이 받쳐 든 술잔 여기 술잔이 하나 있다. 그러나, 이 술잔은 적어도 백유여 년을 창공에 높이 떠 물 흐르듯 흐르고 있는 것이다. 아니, 언제까지나 떠서 흐르고 있을 것이다. 참으로 희한한 일이다. 정말 술잔이 창공에 떠서 물 흐르듯 흐를 수 있단 말인가? 하지만, 그렇게 떠 있는 바에야 어찌하랴. 일찍이 이 땅에 한 무명 도공이 있어, 그 도공의 슬기가 능히 이러한 이적을 나타낸 것이다. 그리하여 지금도 내 눈앞에 선연히 보여 주고 있는 것이다. 이 술잔은 정작 무엇으로 만들어졌을까? 이는 그 무명 도공이 나고 살고 또 죽고, 그리고 죽어서 묻혀 있을 그 어느 외딴 산골짜기의 흙임에 틀림없다. 종생토록 고된 노역으로만 다루어진, 그 곰의 발같이 생긴 무디고 억센 손, 그 손으로 이 흙을 빚어 구워 낸..
늦가을이긴 해도 11월은 어린 우리들에게 오싹하리만큼 추웠다. 추수가 끝난 들판은 폐허처럼 황량했고, 누렇게 말라가는 플라타너스 잎의 버석대는 소리에 더욱 스산하던 그날, 우리는 담임선생님으로부터 폐병을 앓던 순자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훌쩍거리며 우는 아이도 더러 있었지만 나는 아무리 슬픈 생각을 해도 눈물이 나지 않았다. 실감이 나지 않아서였다. 심보가 고약한 것이 탄로날까 봐 침을 찍어 바르고 고개를 숙이고 있으려니 민망하기 짝이 없었다. 방과 후에 선생님을 따라 우리 반 아이들 몇몇이 순자의 집으로 갔다. 시장 통 어물전 뒤에 대문도 없는 가난한 단칸방 앞에서 순자의 어머니는 아이가 입던 옷가지와 책가방을 태우고 있던 참이었다. “어제 화장했심더. 조금만 더 댕기믄 졸업인데 망할 기집애..
- Total
- Today
- Yesterda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