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아지 발바닥만한 섬에서 태어났다. 순풍에 돛 달고 세월아 네월아 지냈다. 앞길이 구만리 같은 호시절이었다. 집안 살림은 죽이 끓는지 밥이 끓는지 모르고 책만 들여다보는 아버지는 밤마다 호랑이 담배 먹을 적 이야기를 들려주셨다. 객지에 있는 자식들에게 보내는 편지를 쓸 때는 내가 방바닥에 엎드려 아버지가 불러주는 입말을 받아 적었다. 당구 삼 년에 폐풍월이라고 그때부터 호랑이 그리려다 고양이를 그리기도 했지만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를 끼적거리고는 했다. 고슴도치도 제 새끼는 함함하다고 한다더니 될성부른 나무는 떡잎부터 다르다고 아버지는 내가 소설가가 되리라 굳게 믿었다. 오르지 못할 나무는 쳐다보지도 말아야 하는데 앉아 삼천리 서서 구만리인 아버지의 믿음에 나도 꿈을 꾸게 되었다. 참깨가 기니 짧으니 ..
미륵골 빈집에 혼자 남았습니다. 이 집에서의 혼자라는 말에는 적적함과 즐기고 싶은 고요가 함께입니다. 슬쩍 두렵기도 하고 심심하기도하고 그럽니다. 홀로 집을 지켰던 모친이 요양원으로 떠나고 빈집이 된 지 삼 년. 어쩌다 보니 나흘간 머물 요량으로 여차여차해 왔습니다. 책을 펼쳐 보지만 눈도 침침하고 유튜브를 몇 편 봤더니 데이터는 한정이 없네요. 이참에 댑싸리 밑에 개 팔자로 즐겨보자 했건만 일이 눈에 들어옵디다. 남아도는 볕이 아까워 이불이며 먼지 묻은 소쿠리며 신발들을 씻었습니다. 고들빼기꽃에 앉았던 배추흰나비가 바지랑대에 앉았습니다. 나비 눈에도 꽃 시절 다 지난 어수룩한 중년 여인의 고독감이 읽혔던가 봅니다. 일 다 하고 죽은 무덤 없다더니 잔일에 끝이 없군요. 사람이 기거하지 않으니 오죽이나 하..
추석을 앞두고 아파트 택배 보관함에는 선물 상자가 쌓여 있다. ‘보리굴비’라고 적힌 상자에 눈길이 간다. 삼십여 년을 남편이 다니던 직장의 사원 아파트에서 살았다. 주민 대부분이 같은 회사 가족이다 보니 일반 아파트에서는 느낄 수 없는 애환이 많았다. 회사에서 일어난 일이 그날 해가 지기도 전에 전해졌고, 곤혹스러워하는 쪽은 주로 가장들이었다. 상대적으로 아내들은 행복해했다. 현금으로 지급되던 보너스 소식까지 고스란히 전해져서 한 푼도 새 나갈 수가 없었다. 너나들이하며 지내는 사이에서는 집집의 숟가락 개수까지 알 정도였다. 그러다가도 인사 발령 때나 명절 즈음이면 만나기를 삼갔다.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내 경우는 그랬다. 물론 상자 한두 개는 받았다. 비누나 치약이 담긴 생활용품이나 스팸, 참치 같은 ..
추석을 사흘 앞두고 시아버지의 제사가 있었다. 일 년에 몇 번 안 되는 시댁 가족이 모두 모이는 날이다. 시차를 두고 모이는 식구들을 기다리며 이런저런 밀린 집안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느닷없이 윗동서가 지난주에 집을 계약하러 온다고 했는데 소식이 없다고 한다. " 계약이라요? 어떤 집이요?" 나는 놀라서 되물었다. " 이 집 내놨잖아? 몰랐어? " 나는 집안에 돌아가는 일을 모르고 있었다는 충격만큼이나 이 시골집을 팔기로 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이 집은 남편을 비롯한 다섯 형제가 태어나 자란 집이다. 내가 남편과 결혼 할 때 둘째 아들인데도 불구하고 식구가 되려면 1년은 같이 살아야 한다고 해서 다니던 직장도 그만두고 신혼을 보낸 집이기도 하다. 그때는 옛날 집이었고, 우리는 사랑채..
입이 푼푼한 항아리에 가을빛이 흥건하다. 각진 소금에 살찐 새우등이 톡톡 터지는 소리가 오후 햇살을 튕긴다. 소금의 짠맛에 구부렸던 고집마저 내려놓았는가. 딱딱하고 날카롭던 껍질이 흐물흐물 녹아내려 색의 절정을 이루었다. 뽀얗게 우러난 빛깔이 곱기도 하다. 작은 몸에 담았던 바다가 풀어져야 맛의 결정체를 이루는 추젓. 구룡포 조용한 마을 한 자락에서 가을의 깊은 맛을 내던 추젓이다. 배릿한 바다 냄새 속에 꾹꾹 눌러 보내온 추젓을 풀자 고모의 눈물이 철철 흘러넘친다. 소금과 새우가 만들어놓은 뽀얀 국물 속에는 고모의 처절한 삶이 녹아있다. 쉬이 놓지 못하고 떠나보낼 수도 없는 바다가 담겼다. 가을 바다를 넉넉히 품은 추젓을 고종 동생은 무척이나 좋아했다. 한 숟가락 듬뿍 떠서 콩나물국에 넣고 휘휘 저으면..
찬바람이 어시장을 휘돌고 간다. 시리고 헛헛한 속을 데워줄 뜨끈한 국물이 생각나 장바구니를 들고 나온 참이다. 동태, 대구, 도루묵을 견주다 손질된 아귀가 눈에 들어왔다. 싱싱한 애와 곤, 간과 위 내장도 함께 좌판에 진열되어 있어 보기에도 풍성하다. 겨울이면 어촌에는 아귀가 지천으로 널린다. 한때 동해안 집집의 마당과 옥상에는 오징어가 많이 널렸다. 어느 날부터 오징어가 자취를 감추자 아귀가 그 자리를 차지했다. 머리 떼어내고 내장을 발라내고 빨래처럼 줄에 널어 반 건조시킨다. 멀리서 보면 깃발 같기도 한 것이 무슨 점령군처럼 기세등등하기도 하다. 예전에는 아무도 아귀를 거들떠보지 않았다고 한다. 물고기 씨가 마른 요즘에야 사람들의 눈길을 받는다. 거무튀튀한 색깔에 몸체는 두루뭉술한데 험상궂은 머리가 ..
묘하게 알아보기 어려웠던 기억이 난다. 생전보다 특별히 부으시거나 살이 빠지신 것도 아닌데도. 가만히 들여다보자 그제야 익숙한 이목구비가 눈에 들어왔다. 돌아가시기 전 담도가 막힌 탓에 온통 누렇게 변해 있었기는 해도, 확실히 명절 때마다 뵈었던 그 얼굴이 맞았다. 기묘했다. 그냥 주무시고 계신 것처럼 보이다가도, 어느 순간 보면 또 아예 사람인 적 없었던 밀랍인형처럼 보였다. 왜 옛사람들이 사람이 죽으면 영혼이 빠져나간다고 생각했는지 짐작할 것도 같았다. 생명의 마지막 흔적마저 자취를 감춘 얼굴은 마른 강바닥 같았다. 강이었고, 강의 모양을 하고 있지만, 넘실거리는 뭔가가 사라져 버렸기에 강이라고 하기에는 어색하고 이질적인. 천성이 감성적인 엄마는 할머니 옆으로 다가가 떨리는 목소리로 “어머니, 먼저 ..
돌담 위에 소담스레 쌓인 눈을 참 오랜만에 본다. 담장 아래 뒹구는 강아지 똥도 모처럼 예쁜 눈꽃을 피우고 있다. 이번 겨울은 유난히 눈이 오지 않아 아쉬웠는데, 삼월 하순에 이곳에서 함박눈을 보게 되다니. 계절을 넘어선 몽환적인 풍경에 속절없이 분주했던 몸과 마음을 눈송이에 실어 살포시 내려놓는다. 모처럼의 눈 소식에 안동의 시골 마을 조탑리로 한달음에 달려왔다. 아름다운 설경에 대한 기대와 눈처럼 순수하고 따뜻했던 동화작가 권정생 선생의 흔적을 오롯이 느껴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마을 어귀에서부터 순백의 무채색 세상이 펼쳐진다. 고샅길에 들어서니 문득 시간이 멈추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냥 이대로 이 풍경 속에 머물 수 있으면 얼마나 행복할까. 지금, 이 순간 이곳에 있는 것이 참으로 감사하다.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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