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려진 섬처럼 널브러져 있다. 닻을 내린 채 접안 순서를 기다리며 휴식을 취하느라 꿈쩍도 하지 않는다. 먼 길을 돌아온 배는 사력을 다한 마라톤 선수처럼 누구의 시선도 의식하지 않고 지친 몸을 바다에 뉜다. 언제부터 정박하고 있었는지도 알 수 없는 대형 화물선을 향해 바지선 한 척이 힘겹게 다가간다. 배는 암초에 뿌리를 내렸다. 어쩌다 파도가 철썩거려도 본체만체한다. 간을 보듯 부딪치던 물결도 제풀에 지쳤는지 이내 잦아든다. 잔물결에도 들썩거리는 작은 배와 달리 가끔 항구를 드나드는 큰 배가 만든 너울이 힘차게 밀려와도 수문장처럼 제자리를 지킨다. 때로는 탯줄을 자르고 세상에 첫발을 내디딘 안태본 조선소가 멀리 보여도 가만히 바라볼 뿐 말이 없다. 묘박지錨泊地는 닻을 내린 배들이 머무는 곳이다. 여객선이..
바야흐로 온 세상이 꽃길이다. 고인쇄박물관 뜨락에도 봄꽃잔치가 벌어졌다. 모닥모닥 핀 영산홍이 온몸을 활짝 열어젖혔다. 삼색제비꽃, 흰색 철쭉꽃, 낮달맞이꽃도 저마다 꽃술을 치켜올렸다. 푸르른 하늘 허공에 상형문자가 만화방창 찍혔다. 꽃을 눈에 담고 박물관 안으로 들어섰다. 맨 먼저 금속활자 조형물 ‘직지’가 눈길을 끌었다. 활자 장인이 오 년여 간 피나는 노력 끝에 복원한 금속활자이다. 전시관에는 직지와 시대별 인쇄문화 및 한국의 금속활자와 구텐베르크의 금속활자, 활자의 제작과정, 인쇄술 등이 전시되어 있었다. 하나하나 감상하니, 삶을 바꾸기 위해 혼을 쏟아낸 선조들의 숨결이 깊게 느껴졌다. 천천히 돌아보는데, 특이한 모양을 한 물건이 눈에 띄었다. 원통형 나무 모양에 작은 솔방울 같은 것이 다닥다닥 ..
빛은 지문이고 서사시다. 등대는 땅의 끝과 바다가 시작되는 경계에서 뱃길을 인도한다. 뱃사람에게 위안을 주는 나침판이며 길라잡이다. 어둠 속에서 깜박이는 불빛은 지루하고 긴 항해가 끝나가고 있음을 알려주어 안도감을 느끼게 하는 메시지다. 고독과 낭만의 대명사로 마음을 훔치는 마력을 지녀 뭇 발길을 불러들이기도 한다. 천 년을 이어온 등대의 불빛은 희망을 이끄는 언어이고 위안을 주는 상징이었다. 인류는 선사시대부터 끊임없이 바다로 나아갔다. 뗏목이나 통나무배를 타고 어로 활동을 하였다. 좀 더 멀리 나가면서 두려움을 안고 검푸른 바다에 밤낮으로 배를 띄웠다. 생명을 탄생시키는 원천이라는 것을 알았을까. 호기심으로 찾아 나선 뱃길이 세계를 연결하는 수많은 바닷길을 만들어냈다. 거친 파도를 거느린 바다는 불안..
아들이 손을 흔들었다. 얼마 전 직장을 따라 타지역으로 나간 아들을 보며 나도 따라 손을 흔들었다. 열차가 플랫폼을 떠나 소실점에서 사라질 때까지 멍하니 서서 바라보았다. 열차가 밟고 지나간 평행 레일 위에 아지랑이가 피어오른다. 오늘 나는 철길 위에 이별의 시詩 한 소절 뿌렸다. 돌아오는 길, 하늘로 솟은 건물들이 압도적이다. 건물들은 저마다 높이를 자랑하며 존재감을 드러낸다. 그 옆에는 새로운 빌딩이 철을 수직으로 세우며 높이 치솟는다. 철은 이 시간에도 강인한 힘으로 문명을 드높인다. 철이 있어 우리는 하이테크 문명을 구가한다. 가히 신철기시대라고 할만하다. 철철철, 철이 넘칠수록 인간은 번영을 누렸다. 철을 화덕에 넣어 빨갛게 달구고 두들기고, 그 과정을 되풀이하면서 인간도 강인해졌다. 철기로 무..
훤칠한 붕어가 목상에 누웠다. 입을 벌리고 희멀건 눈을 뜬 채 초점도 잃었다. 목욕재계 마치고 꼼꼼히 물기를 닦았으나 황망히 떠나올 적 입었던 비늘옷 그대로다. 몸은 축 늘어졌으되 유선형의 몸매가 매끈하고 지느러미는 한껏 펼친 모양으로 줄에 엮여 고정되었다. 거칠게 치뻗은 모습이 펄떡거렸을 생명의 움직임을 감지하게 한다. 가지런한 비늘 위로 차가운 물감이 덮인다. 생전의 몸피와 흡사한 색으로 배합되었다. 붓으로 드문드문 안료를 올리고 색깔의 틈이 부드럽게 이어지도록 공을 들인다. 지느러미 사이도 놓치지 않고 촘촘히 공간을 채운다. 이승의 마지막을 곱게 화장化粧시키어 생기를 불어넣는다. 몸단장이 끝나면 물을 뿌려둔 정갈한 한지를 덮어 꼼꼼하게 누른다. 마르기를 기다리면 겉피에 남아있던 습과 종이의 물기가 ..
짱짱한 여름 햇살이 마을 구석구석에 내려앉는다. 성안숲의 소나무는 강렬한 빛의 기운을 받아 기개에 날개를 달았다. 모습은 드러나지 않지만, 자양분을 위로 밀어 올리고 있을 뿌리가 눈앞에 어른거린다. 마을 입구로 들어선다. 길게 이어진 돌담길이 굽은 나무줄기 같다. 뿌리가 준 양분을 곁가지로 배달하는 줄기처럼 골목길은 이 집 저 집으로 삶의 지혜를 수없이 날랐으리라. 돌담을 이루는 돌의 모습이 가지가지다. 길쭉한 돌과 납작한 돌, 둥근 것과 모난 것, 머리보다 큰 돌과 주먹보다 작은 돌이 각자의 자리에서 평안을 붙잡고 있다. 이런저런 사람이 만나 서로 보듬고 감싸며 살아가는 한밤마을 사람들의 일상을 보는 듯하다. ‘골목 끝에 무엇이 있을까.’ 설레는 마음이 걸음을 재촉한다. 돌담을 벗어나자 잔디 깔린 넓은..
모래밭에 섰다. 바다를 보기 위해 가파른 하루를 내던지고 달려왔다. 통성명을 생략한 채 다짜고짜 성내며 달려드는 바람으로 휘청인다. 속내를 터놓기도 전에, 옷깃을 풀어헤치고 머리카락을 헝클어트린다. 이방인의 침입을 허락하지 않겠다는 듯 싸늘한 한기까지 몰고 와 겁박한다. 바람과 내통한 파도는 거세게 밀어닥치며 모래톱을 후려친다. 어스름이 다가와 사위를 다독여보지만, 뿌리라도 뽑을 것처럼 포효하며 요동치는 바람으로 속수무책이다. 바다를 쟁여 넣으려 호기롭게 나섰던 나는 주춤한다. 쪽빛 숨결을 들이마시는 건 고사하고 숨통을 틀어쥐는 바람의 위력에 뒷걸음친다. 허둥대다가 뭔가에 툭 걸린다. 돌이다. 주먹만 한 돌이 모래밭에 처박혀 있다. 발꿈치에 걸리지 않았다면 알아채지 못했을 외진 곳에 오도카니 붙박였다. ..
모니터가 연신 빽빽거린다. 그래프의 파동도 눈에 띄게 느슨해졌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의료진을 호출하지 않는다. 그들 역시 구경꾼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자식이라는 참담한 이름으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고작 기기의 타전을 당신의 고별사인 듯 참담하게 받드는 것뿐이다. 아버지는 수식어를 즐기지 않는 분이셨다. 다정다감한 어록을 자랑하는 달변가는 더더욱 아니셨다. 당신 안에서 거르고 걸러진 언어들만 간결체의 어투로 나지막이 발설되곤 했다. 그래서일까. 아버지의 입에서 때와 장소에 위배되는 헛문장이나 비문이 흘러나오는 것을 보지 못했다. 말줄임표가 자주 등장하는 아버지의 수사법은 쉬 해독될 수 없었다. 나는 징검돌처럼 띄엄띄엄 도달하는 몇 마디만으로 미꾸라지 밸 따듯 당신을 건너뛰었다. 오독으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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