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 이틀을 잠만 잤다. 때를 잊은 채 잠에 빠졌다. 동면하던 생물들이 기지개를 켠다는 경칩도 지났건만 잠 속을 파고들었다. 평소 늘어지는 성질이 못되니 수면시간도 짧다. 하루 네댓 시간을 자며 살아왔던 내가 이불 속에서 옴짝달싹 못했다. 정신을 가다듬고 책상 앞에 앉아보았지만 가라앉는 몸을 가눌 수 없었다. 소태 같은 밥을 겨우 한 술 뜨고는 엉금엉금 기어 침대로 갔다. 창백한 낯빛이며 푹 꺼진 눈의 몰골, 나사 하나가 빠진 것 같은 정신이 흉하기 그지없었다. 잔뜩 긴장되어 있던 전신까지 놓자 모든 것이 솜처럼 풀렸다.화장실을 다녀오는 일을 빼고는 검불처럼 너부러져 잠만 잤다. 휴대폰도 멀리 했더니 무슨 일이 있냐고들 아우성이었다. 내게는 어울리지 않는, 평소와는 다른 나를 별견하며 가만히 생각에도 잠겼..
김치와 고등어 / 백금태 시큼한 김치 한 쪽을 썩둑썩둑 썰어 냄비 바닥에 깔았다. 양파와 파도 길쭉길쭉하게 잘라 옆에 곁들였다. 그 위에 금방 어물전에서 사 온 살아 펄펄 뛸 것 같은 고등어를 손질하여 얹고 고춧가루를 듬뿍 뿌렸다. 고등어가 잠길 듯 말 듯 물을 잘박하게 붓고 가스 불을 댕겼다. 시간이 흐를수록 온 집안이 김치의 시큼한 맛과 고등어의 구수한 냄새에 푹 빠졌다. 몇 년이나 냉장고 밑바닥에 묵혀 있던 김치와 고등어가 서로를 품으며 깊은 맛을 뿜어낸다.그 김치는 부산에 사는 언니가 삼 년 전에 담가 준 것이었다. 직장 다니는 동생이 안쓰러운지 툭하면 김치 상자가 택배로 배달되곤 한다. 그해는 동생에 대한 언니의 사랑이 더 깊었는지 아니면 바닷가에 사는 것을 자랑이라도 하고 싶었는지 멸치젓, 새..
붉은 아가미를 헐떡이며 즐겁게 내달리는 고등어 떼를 TV화면으로 보았다. 수학여행 길에 오른 아이들처럼 생기가 넘쳤다. 그물이 서서히 조여올 때까지도 고등어는 무리지어 유영을 즐겼다. 건져 올린 것은 고등어의 몸통일 뿐, 고등어의 푸른 자유는 이미 그물 밖으로 다 새어나가고 있었다. 싱싱한 고등어를 보면 잘 생겼다는 느낌이 든다. 동그란 눈 속에는 검푸른 바다가 출렁이고, 방추형으로 생긴 몸매는 어느 각도에서 봐도 맵시가 난다. 짙은 색을 띤 등에는 물결무늬가 일렁인다. 제가 가본 바다를 기억하기 위해 고등어는 제 몸에다 그 바다의 물결을 새겨두었을까고등어의 모양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등과 뱃살의 대비다. 군청색을 띤 등은 눈부시게 흰 뱃살 때문에 마치 '눈 속에 묻힌 댓잎'처럼 보인다. 활기차고 ..
(대구교육대학교 국어교육과 교수) 1. 집 정리를 하다가 옛날 앨범이 하나 나왔다. 접착식이다 보니 잘 붙어있는 것까지는 좋은데 문제는 너무 달라붙어버린 데 있다. 사진과 앨범이 한 몸이라도 된 듯 찰싹 붙어버린 것이다. 이러다가는 사진을 다 버릴 것 같아서 지체 없이 떼어내기 시작했다. 딸애가 인터넷을 검색하더니 헤어드라이어로 열을 가한 후 떼면 잘 떨어진단다. 다행히 잘 떨어지는 편이어서 조심조 심 한 장 한 장 떼어냈다. 그러다가 초록빛 한복을 입고 환하게 웃고 계신 아버지 사진을 한 장 발견했다. 평소와 다르게 곱게 입고 계셨다. 아버지의 회갑날이었던 것 같다. 그런 날이 아니고서야 저렇게 차려입고 계실 리가 없다. 왼손으로는 술잔을 든 채 오른손으로 누군가를 가리키시는 포즈였다. 잔뜩 취기가 오..
2024 매일신문 신춘문예 당선작 작은 것이라도 굴곡이 생기면 오류를 일으킨다. 괜찮다 싶다가도 어딘가에 걸리면 그대로 멈춘 채 꼼짝하지 않는다. 재빨리 손가락을 움직여보지만 미세한 엉킴에도 상처투성이다. 습기를 먹는 날엔 갈래갈래 찢겨 회복조차 힘들다. 용지함을 열어 엉킨 종이를 빼내고 상태를 확인 후 다시 인쇄를 누른다. 조금 더 두꺼웠다면 걸림이 덜했을 것을. 얇고 가벼워 곧게 굴러가는 것도 힘들고 때론 들러붙기도 해 내부 센스가 존재를 느끼지 못했을 수도 있다. 비침이나 번짐도 심하다. 양면으로 인쇄할 땐 한쪽이 물을 먹은 듯 흐느적거려 다음 길을 제대로 걸어올 수 있을지 걱정스럽다. 이런 일이 되풀이되면 결국 멀쩡한 종이를 들어내고 결이 좀 더 튼튼한 용지로 바꿔 넣는다. 사람도 인쇄용지처럼 무..
2024 경남신문 신춘문예 ‘수필’ 당선작 꿈결인가. 등이 따뜻하다. 눈을 감은 채 가만히 정신을 가다듬자 내 등에 맞닿은 그의 등이 느껴진다. 침대 위아래에서 잠이 들었건만 등과 등 사이 바람 한 톨 비집고 들 틈 없을 정도이다. 그러고 보니 어느 사인가 서로 다른 높이에서도, 등을 돌리고도 편안하게 각자의 잠속으로 빠져들곤 한다. 등을 돌리면 큰일이라도 날 것 같았다. 그러기라도 하는 날에는 마치 우리만의 세상이 끝장나기라도 하는 듯 애틋하던 시절이었다. 세상에 둘만이 존재하는 듯 누구도 끼어들 수 없었던 신혼의 단꿈을 꾸던 때였다. 서로의 앞만 바라보느라 등이 존재하는지조차 몰랐다. 등이 있어도 등이 보이지 않던 시절이 분명, 있었다. 조금씩 거리가 느껴졌다고 할까. 등과 등 사이 거리가 마치 그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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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태환 시인 1960년 부천 출생. 고려대학교 사범대 국어교육과, 동대학원 국문과 석사, 박사. 1984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계해일기」가, 한국일보에 「최익현」이 당선하여 등단, 시집으로 『북한산』, 『수화(手話)』, 『별빛들을 쓰다』, 『복사꽃, 천지간의 우수리』가 있으며 시론집 『미당 시의 산경표 안에서 길을 찾다』, 비평집 『경계의 시 읽기』, 세상읽기 『오늘의 빵에 관하여』 등이 있다. 제2회 윤동주 서시 문학상, 2017 시와 표현 작품상 수상. 최익현 / 오태환 1/ 엎드려서 울고 있다/ 낮게 내려 앉은 대마도의 하늘/ 성긴 눈발, 춥게/ 뿌리고 있다./ 바라보고, 또 바라보아도/ 서릿발 같은 바람소리만/ 어지럽게 쌓이는/ 나라의 산하/ 불끈 쥔 두 주먹이 붉은/ 얼굴을 감춰서/ 설악 같은..
잠실蠶室로 쓰던 헛간에 세간을 전부 옮겨 놓고 나자 하루해가 설핏했다. 둘째와 막내는 돌아가고 나는 안방에서 마지막 밤을 보내기로 했다. 아침 일찍 포클레인이 집을 헐러 오기로 되어 있기도 했지만 나는 내일이면 허물어질 이 집에서 마지막 밤을 보내고 싶었다. 세간을 비워 낸 빈집은 마치 공연을 끝내고 장소를 옮겨 가기 위해서 내부를 비워 낸 서커스단의 빈 천막처럼 썰렁했다. 기우는 늦가을 엷은 저녁 햇살이 아쉬운 듯 마루 끝에 잠시 머물렀다. 마음 둘 곳이 없어 마당에 서성거렸다. 세간이래야 할머니와 어머니가 시집올 때 해 가지고 온 낡은 장롱을 비롯해서 이불과 옷가지 그리고 옹기와 사기들이 전부지만, 우리 식구들의 기쁜 웃음과 허망한 한숨이 밴 피붙이 같은 세간들이다. 그 세간을 비워 낸 집은 집이 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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