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토막을 들여다보는 순간 깜짝 놀랐다. 나이테가 없다. 닳고 닳아 찍히지 않는 지문이 있다면 그런 것일까 싶었는데 한옆으로 옹이가 툭 불거져 있다. 여남은 개 바퀴 모양의 자취가 희미하게 보일 뿐이지만 나이테가 다 지워진 토막에 옹이만 남아 있다는 사실이 놀랍다. 나이테는 이미 지워졌어도 그 연륜에 옹이의 뚝심이 들어갔을 테니 얼마나 단단할지 상상이 간다. 우리 집 주방에도 옹이가 빠져나간 자리가 있다. 나무로서는 오래된 상처가 빠져나갔으니 시원할 것 같은데도 뻥 뚫린 자리는 당혹스럽다. 처음 지을 때부터 툭 불거진 게 유난히 눈에 띄기는 했으나, 우리도 옹이가 있다면 그런 식일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우리 살 동안 돌아보고 싶지 않은 기억도 빠져나가면 시원하겠지만 주방의 벽처럼 허전할 수 있다. 필요..
2006 전북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여행을 하다보면 장승촌에 들리는 때가 있다. 수많은 장승들의 이름과 표정이 참으로 기이하고 익살스럽다. 갖가지 이름만큼이나 서로 다른 특징이 들어 있는 장승들을 보고 있노라면 세상의 모든 희로애락을 한 곳에서 전부 보는 느낌이 든다. 조금은 숙연한 마음으로 조심스럽게 올려다 보이는 장승에서부터 아이들 장난 같은 웃음을 짓게 만드는 장승들. 현 시대에 발 맞추려는 느낌으로 다가오는 괴이한 장승이 있는가 하면 살짝 눈을 돌리며 배시시 웃음을 깔게 만드는 짓궂은 장승이 있고 밤길에서 뒷덜미를 잡아 챌 것 같은 으스스한 장승도 있다. 어떤 모습일지라도 그것들은 우리들의 끈끈한 삶의 흔적이 묻어있는 형상들이다. 그것들의 모습은 결코 매끄럽거나 곱지가 않다. 어딘가에 별 쓸모 없이..
평소 자주 다니던 산책로가 엉망이다. 도로 공사를 하기 위해 막아버려 다른 길로 돌아다녀야 한다. 늘 다니던 길이 그렇게 되어 버리니 아쉽다. 어느 땐 나도 모르게 그 길로 들어섰다가 되돌아 나오곤 한다. 하지만 어느 정도 시일이 지나니 자연히 그 길과 멀어졌다. 이제 새로운 코스가 당연한 길이 되어 버렸지만 옛길이 그리워 그 근처를 서성거려보기도 한다. 그러다 달라진 길 모습이 좀 당황스럽기도 했다. 사람들의 발자국 따라 다져졌던 길은 어느새 풀들이 수북해서 선뜻 발 들여놓기가 망설여졌다. 사람이 드나든 흔적이 없어지니 순간에 이렇게 되어 버리는구나 싶다. 문득 맹자의 말씀이 생각난다. ‘孟子謂高子曰(맹자위고자왈)/ 山經之蹊間(산경지혜간)/ 介然用之而成路(개연용지이성로)/ 爲間不用(위간불용)/ 則茅塞之..
분명 잘못된 그림이었다. 어느 산사에서 절 안팎을 둘러보며 벽화를 감상하고 있는데 좀 잘못 그려진 부분이 있었다. 왜 저렇게 그렸을까. 아무리 생각해 봐도 내가 알고 있는 상식과는 다른 그림이었다. 『빈두설경(賓頭設經)』에 「우물 안의 나그네」라는 이야기가 있다. 어떤 사람이 미쳐서 날뛰는 코끼리를 만나 도망치다가 우물 속으로 피신을 하게 되는데 마침 우물터에 있는 등나무 줄기를 타고 들어가 간신히 위기를 모면하고 있었다. 그런데 우물 밑을 내려다보니 무서운 독사가 혀를 날름거리며 먹잇감을 노리고 있는 것이었다. 밖에는 성난 코끼리요, 안에는 독을 품은 독사니 진퇴양난이다. 간신히 등나무 줄기에 생명을 걸고 버티고 있는데 설상가상으로 쥐들이 그 줄을 갉아 먹고 있지 않는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망연..
인터넷 고스톱은 돈을 딴들 주머니에 들어오는 것도 아니고, 잃어도 내 주머니에서 나가지도 않는다. '옹산화병'(甕算畵餠) 그야말로 헛배만 부르고 실속 없는 게임이다. 하지만 막상 게임을 해보면 그렇지가 않다. 처음에는 잃어도 그만 따도 그만 그저 장난처럼 시작지만 하다보면 패 한 장에 일희일비하게 된다. 행여 싸지나 않을까. 싸놓은 패를 상대가 가져가면 어쩌나. 별 소득도 없는, 그림의 떡을 놓고 독장수셈을 하고 있노라면, 마치 마주 앉아 있기라도 한 듯 상대의 일거수일투족이 눈앞에 어른거리고 콩닥콩닥 뛰고 있는 심장박동 수까지 느껴져 온다. 나는 고스톱 전문 꾼이 아니다. 대충 흐름은 알고 있을 뿐 고스톱을 쳐보지도 않았다. 그런 내가 고스톱에 대해 이야기를 할 수가 있는 것은 컴퓨터 앞에 앉아 게임에..
윙 소리를 내며 냉장고가 돌아간다. 이십오 년을 고장 한 번 없이 늘 한결 같은 소리를 내고 있다. 냉장고를 들여놓던 날 우리 가족은 외식을 했다. 아내는 이제 막 돌이 지난 아이를 안고, 어머니는 아이의 포대기를 든 채 뒤를 따랐다. 그 모습을 보니 어찌나 기분이 좋은지 저녁 먹을 시간이 한참이 지났는데도 배고픈 줄도 모를 정도였다. 그도 그럴 것이 오늘은 보통날이 아니었다. 오늘부로 문간방 류 씨라는 호칭에서 놓여나는 날이었다. 아내와 나는 문간방에서 몇 년을 사글세로 살았다. 하지만 우리 부부보다 정작 고생한 사람은 어머니였다. 삼칠일이 지나고부터 아내가 다시 직장에 나가게 되자 어머니가 아이를 돌보게 됐다. 좁아빠진 단칸방에서 식구 넷이 생활을 하다 보니 불편한 것은 당연지사지만, 어머니는 노심초..
콩콩 마늘을 찧는다. 아래층에 소리가 울릴까봐 사타구니에 백철절구를 끼고 마늘을 찧는다. 절굿공이에 빗맞았는지 메뚜기처럼 마늘한쪽이 절구를 타고 넘는다. 어디로 갔지. 주위를 두리번거리다 손을 뻗는다. 겨우 손이 닿았지만 슬슬 짜증이 난다. 믹스기로 갈면 될 텐데 굳이 절구에 찧어달라는 아내의 마음을 알 수가 없다. 나는 일에서 놓여나고 싶어 물끄러미 아내를 바라본다. 아내는 보채는 아이 보듯 두 눈을 치켜뜬다. 어림없는 소리 하지도 말라는 것 같다. 나는 반항이라도 하듯 쿵쿵 공이를 내리찧는다. "그게, 그렇게 힘들어요?" "믹스기로 갈면 편하잖소!" "찧는 것과 가는 게 같아요!" 아내의 말에 뚱한 표정을 짓지만 뭐라 변명의 여지가 없다. 아내 말마따나 불린 콩을 믹스기에 가는 것은 봤어도 마늘을 가..
산위를 바라본다. 야트막한 산비탈엔 잡초가 우거져있고, 우거진 수풀사이로 붕긋 솟은 봉분들이 눈에 들어온다. 저 많은 무덤 중에 과연 어느 것이 장군의 묘일까. 망우당을 만나 뵈러 온 게 아니라 그의 문중선산을 둘러보러 온 것 같은 생각이 든다. 한참을 헤맨 끝에 산 좌 중앙에 서있는 그의 묘 앞에 선다. 붉은 옷만 봐도 왜적들이 혼비백산했다던 천강망우당장군의 묘는 주위의 무덤과 다르지 않다. 야트막한 봉분, 제물을 차려놓는 상석과 향로를 올려놓는 향로석뿐이다. (병조판서‧함경도관찰사‧망우당 곽충익공의 묘) 비석에 새겨진 글씨를 눈여겨보지 않았다면 그냥 지나칠 뻔했다. 어쩜 이럴 수 있을까. 장군의 무덤치곤 너무 작고 허술하다는 생각이 든다. 유년시절 어머니께 홍의장군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그 모습을 머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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