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을 들었다. 차가운 심장을 가진 칼이 번쩍, 뜨거운 빛을 뿜는다. 날카로운 날을 쓱, 한번 행주로 닦아준다. 다섯 손가락에 힘을 골고루 실어 칼자루를 잡는다. 칼자루가 손에 착 달라붙는다. 체온을 나눈 지 오래되었다는 뜻일 거다. 믿고 있다는 의미로 받아들인다. 친숙함에서 우러나는 편안함이기도 하다. 이젠 칼날을 허공에 놓을 시간이다. 수평으로 허공에 꽂힌 칼날, 냉정하다. 뭔가를 잘라야 할 때의 그 냉철함이 손끝에 전해진다. 칼의 본분은 자르는 것, 남겨야 할 것과 잘라내야 할 것의 차이를 분명히 아는 갈은 이지적이다. 가차 없이 잘라내 버리는 일에 익숙한 칼은 감정을 낭비하지 않는다. 지상으로부터 오 센티미터 허공에 걸린 긴 칼이 표적을 예리하게 관찰하고 있다. 자신이 꽂힐 자리를 가늠하는 듯 섬세..
어머니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푸른빛이 곰비임비 몰려오더니 어머니의 꽃무늬 모자를 안고 가버렸다. 어머니를 숨겨준 푸른빛이 내 주위에도 낭창낭창 흐른다. 어머니가 사라짐과 동시에 수런대던 바람소리도 잦아들었다. 어머니를 품은 자연은 어머니를 잠시 쉬게 하려는가 보다. 갑자기 찾아든 적요(寂寥)는 오히려 날 흔들어 놓는다. 몸을 낮추고 가만 귀를 기울인다. 자연의 온갖 숨소리가 칸타빌레(cantabile)로 들려온다. 어느덧 나는 술래가 된다. 온 마음을 모아 어머니와의 교감을 시도한다. “어머니! 어디쯤 계세요?” 부르면 어머니가 금방이라도 여기저기서 나타날 것 같다. 모든 푸른색의 중심인 어머니는 보이지 않아도 보이고, 보여도 보이지 않는다. 어머니의 몸속에 흐르는 푸른색은 눈이 아닌 마음으로 보아야 한..
2020년 제2회 순수필문학상 색이 터졌다. 이른 아침, 갈색 화분에서 잎 하나가 고개를 뾰족 내밀었다. 연필심만큼이나 자그마한 싹이다. 날 때부터 초록 옷을 입은 싹은 흙 속에서 단연 돌올하다. 흙의 진통은 언제부터 시작되었을까. 눈치 채지 못하게 생명을 잉태한 후 조용히 품고 있었나 보다. 큰일을 하고도 짐짓 태연한 걸 보니 흙의 몸에는 신비로운 비밀이라도 있는 모양이다. 갓 태어난 초록은 수직의 상승을 꿈꾸는 듯 너볏하다. 소생의 계절은 흙의 아우성으로부터 시작된다. 초록의 움직임에 땅속은 분주해지고 대지는 서서히 몸을 연다. 겨우내 웅크리고 있던 안오한 음지를 박차고 모험 속으로 뛰어든 초록들은 여리지만 당차다. 봄은 기다림과 어울림의 계절이다. 기다림 속에는 봄을 봄답게 하는 초록의 존재가 있다..
선생님! 전번 설날 세배 갔을 때 앉으시는 모습이 불편해 보여 걱정하는 저에게 '나이 들면 다 그렇지' 하며 웃으시던 얼굴이 영 잊혀지지 않고 있습니다. 퇴직 후 자주 가시던 등산도 뜸해졌다니 이를 어쩝니까. 선생님의 세월이 벌써 그렇게 되었음이 안타깝습니다. 지난 2월 하순, 교장으로 승진 발령을 받고 우선 전화부터 드렸었지요. 비록 전화기를 통해 들려오는 음성이었지만 '축하하네. 정말 축하하네' 하며 저보다 더 기뻐하셨던 기억이 납니다. 까까머리 제자였던 저의 세월도 흐르고 흘러 이렇게 되었습니다. 고등학교 3학년 때였습니다. 월요일 아침 운동장 조회 시간에 선생님께서는 줄의 중간쯤에 서 있는 저에게 다가와 교무실로 오라는 명을 내리셨습니다. 잔뜩 주눅이 들어 찾아간 저에게 '토요일 날 왜 그랬느냐'..
회색 몸체에 주황색 볼. 꼬리 10㎝, 몸통 15㎝. "깐난아!”하고 부르면 옵니다. 신동아 아파트 근처에서 잃어버렸습니다. 관악산 주변에 있을 것으로 추정합니다. 사례금 100만 원 새를 찾는다고?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걸어 다니는 인간이 날아간 새를 찾을 수 있을까? 조금 더 가니 새를 찾는 전단이 또 있었다. 골목을 다 걸어 나오는 100여 미터 사이에 열 개도 넘는 전단이 붙어 있었다. 잃어버린 아이를 찾는 간절함이 전해져 왔다. 산목숨을 잃어본 사람은 그 간절함을 가늠할 수 있다. 나도 딱 한 번 아들을 잃은 경험이 있다. 세 살 적에 시장엘 데리고 갔다가 물건 사는 데에 정신이 팔려 손을 놓아버렸었다. 겨우 삼십여 분을 찾아다녔을 뿐인데도 그때를 생각하면 지금도 아뜩해진다. 새를..
당시, 우리 동네에는 같은 학년 중학생이 그 애들뿐이었다. ‘숙이’와 ‘식이’. 그들은 꼬박 3년 동안 5리길이나 되는 학교에 함께 다녔다. 초등학교시절부터 꼽으면 어언 9년간이다. 학교가 파해 집에 올 때면 가로등도 없는 길이 그들을 가다렸다. 냇물을 건너고 들길을 지나 산모퉁이를 돌아오려면 부엉이소리 간간 들려오는데, 식이는 숙이와 나란히 걷지도 않고 한마디 말도 붙이지 않았다. 늘 저만치 앞에서 걸었다. 숙이도 식이에게 말을 걸지 않고 조용조용 뒤에서 걸었다. 묘하게도 둘 사이는 늘 한결같은 거리가 유지되었다. 숙이로서는 그 고정된 거리가 종종 의문이었다. 그렇게 학교를 졸업하고 길이 갈려 어엿하니 중년의 강을 건너는 그들. 꼬박꼬박 동창회에 나오는 교양미 넘치는 숙이가 식이의 안부를 묻는다. “갠..
비행기 떼가 날아왔다. 배경은 부엌에서 안방에 이르려면 흙으로 된 단 네 칸을 올라야 하는 초가이다. 부엌엔 부모님이 밥을 짓고 계셨던가. 빗장 열린 부엌문이 양쪽으로 활짝 열리고 토방으로 통하는 샛문도 열려있다. 그런데 한미 훈련 때 티브이에서나 보았음 직한 전투기들이 마당 상공을 날고 부엌으로도 들어와 샛문으로 삐져나가는 등 우리 집에만 집중적으로 몰렸다. 낮게 비행하는 관계로 조종사의 얼굴도 보였다. 샛문 층계에 있다가 겁을 먹고 주저앉은 나에게 비행기 안에서는 정찰 중이니 괜찮다는 말이 우렁우렁했다. 순식간에 겪는 일이라 놀라웠지만 흥미롭고 듬직했다. 머리에 닿을듯하다가 유유히 빠져나갈 땐 묘한 쾌감마저 느껴졌다. 정밀사진기에 몸을 맡긴 것처럼 그들이 우리 집을 세세히 훑는다고나 할까. 그만큼 위..
눈 쌓인 벌판에, 백지와 대면하듯이 혼자서 서라. 막막해서 아무 말도 할 수 없는, 아무 말도 못하다 보니 할말도 없는, 백지가 되라. 천지간에 어스름이 고양이 발걸음같이 깔리더니 눈이 내린다. 함박눈이 적막하게 소복소복 쌓이는 것도 아니고 싸락눈이 싸르락싸르락 소곤대는 것도 아니다. 구물구물 밤벌레 같은 눈이 시름없이 기어 내려온다. 강풍이 시샘하지 않으니 아장아장 하강한다. 하염없이 내린다. 백설아, 나보고 어쩌란 말이냐. 마음의 갈피에 꽂아 둔 누구인가, 그 사람에게 말 걸고 싶다. 설원의 새끼짐승처럼 겅중겅중 눈 속을 헤매고 싶다. 눈밭에 개 뛰듯 뛰고 싶다. 아뿔싸. 유리창에 이마를 대고 서서 뭣, 뭣, 뭣을 하고 싶다고? ‘하고 싶다’는 일종의 허영. 삶의 포장지에 불과하다. 포장지를 찢어야 ..
- Total
- Today
- Yesterda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