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적(目的)도 없는 동경(憧憬)에서 명정(酩酊)하던 하루이었다. 어느 날 한낮에 나는 나의 「에덴」이라던 솔숲 속에 그날도 고요히 생각에 까무러지면서 누워 있었다. 잠도 아니오 죽음도 아닌 침울(沈鬱)이 쏟아지며 그 뒤를 이어선 신비(神秘)로운 변화(變化)가 나의 심령(心靈)위로 덮쳐 왔다. 나의 생각은 넓은 벌판에서 깊은 구렁으로- 다시 아참 광명(光明)이 춤추는 절정(絶頂)으로- 또다시 끝도 없는 검은 바다에서 낯선 피안(彼岸)으로- 구름과 저녁놀이 흐느끼는 그 피안(彼岸)에서 두려움 없는 주저(躊躇)에 나른하여 눈을 감고 주저앉았다. 오래지 않아 내 마음의 길바닥 위로 어떤 검은 안개 같은 요정(妖精)이 소리도 없이 오만(傲慢)한 보조(步調)로 무엇을 찾는 듯이 돌아다녔다. 그는 모두 검은 의상(衣..
해마다 고향집 화단에는 갖가지 꽃이 피고 졌다. 수국, 연산홍, 쩔쭉, 상사화, 노란나리, 원추리, 사루비아. 고향집에 갈 때마다 그것들을 그윽이 바라보았다. 어찌 그리 곱더냐. 꽃이라서 예쁘더냐. 조물주한테 나에게 올 사랑과 관심까지 독차지하였더냐? 나는 꽃들을 보며 그렇게 속삭이곤 했다. '화무십일홍'이라는 말처럼 그 생명력이 너무 짧아 우리로 하여금 인생의 덧없음과 유한성을 자각하도록 하기에 더욱 아름답게 보이는지 모를 일이었다. 각각의 꽃은 특유의 매력이 있으되, 특별한 사연과 인연으로 내 마음을 차지하고 있는 건 아니었다. 수수밭에서 자라는 수수들처럼 '꽃'이라는 하나의 개념 아래 몰개성의 개성을 가진 것으로 인식될 뿐이었다. 그러던 어느 해 4월이었다. 고향집을 방문 했을 때 영산홍과 모란이 ..
영화 에서 주인공 미키 루크는 무시로 술을 마신다. 길거리에서, 공원 벤치에서, 침대 위에서 쉼 없이 병나발을 불어대는 장면은 퍽 인상적이다. 그는 취해서 걸핏하면 사람들과 시비를 붙고 싸움질을 한다. 그는 별다른 직업도 없고 안락한 가정도 없다. 삼류 건달이 보낼 법한 일상을 날마다 되풀이하고 있다. 술 마시는 것 못지않게 그가 즐겨하는 것이 하나 있다. 라디오를 들고 다니면서 음악을 듣는 일이다. 술과 음악, 이 둘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는지도 모른다. 옛날 희랍인들은 바커스 축제 때 왕창 술을 마시고 북장단에 맞추어 미친 듯이 춤을 추었다. 엑스터시한 상태에서 신과 합일하기 위해서이다. 그들에게 있어서 술과 음악이란 접신하는 데 필요 불가결한 요소였다. 미키 루크에게 있어서 술이란, 특히 ..
여름이 되면 슬며시 당기는 음식이 닭개장이다. 음식점에선 좀체 맛볼 수 없다. 이건 우리 어머니의 주특기 음식 중 하나다. 닭개장이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어릴 때부터 어머니 옆에서 유심히 지켜봤다. 지금은 나도 마음먹으면 거뜬히 끓여낼 자신이 있다. 닭은 집에서 키운 놈이 좋다. 푹 삶아서 식힌 뒤에 뼈에서 발라낸 살을 잘게 찢어 준비해둔다. 고기가 귀하던 시절, 이걸 한 솥 끓이면 우리 집 여섯 식구가 두 끼는 먹을 수 있었다. 그건 닭개장에 넣는 채소와 국물 덕분이다. 닭고기와 채소의 절묘한 결합이 닭개장의 맛을 결정한다. 무시래기나 배추시래기를 반드시 넣어야 하는데 나는 부드러운 배추시래기가 더 좋다. 마른 토란대와 고사리를 미리 삶아두는 것도 필수다. 숙주나물을 씻어놓고 대파를 큼직하게 썰어둔다. ..
5월은 신록의 계절, 계절의 여왕이라 한다지만 사실 5월만큼 힘겨운 달도 없다. 어린이날. 어버이날이 지나면 곧이어 스승의 날 , 부부의 날이다. 여기에 집안의 대소사까지 겹치게 되면 그야말로 허리가 휘어지도록 한 달이 내내 버겁다. 더군다나 올해는 작년부터 불어 닥친 불황으로 경제가 더욱 어려우니 그저 내 가족 하루 무탈하게 지내는 것으로 만족하는 게 보통 서민들이 바라는 오늘의 현주소다. 나 역시 크게 다르지 않아 5월로 접어들면서 몇 번이나 지갑을 여닫으며 주판알을 튕겼는지 모른다. 그것도 그럴 것이 조그만 자영업을 하는 남편은 은행대출이 용이하지 않아 몇 번이나 일감을 놓쳤으며 그나마 약간의 여유 돈을 예치해 둔 통장도 그 이자가 대폭 삭감되는 바람에 나는 근근이 살림을 꾸려나가는 셈이다. 그래서..
레슬링 종목 중 그레코로만형이 있다. 자유형과 달리 상체만 공격하는 종목이다. 쓸 수 있는 기술도 단순하고 같은 체급에 덩치도 비슷하다보니 좀처럼 공격할 틈이 생기지 않는다. 시합을 벌이는 선수보다 경기를 지켜보는 사람이 더 용이 쓰인다. 공격할 기회를 찾으려고 서로 손을 부딪는 모습을 보다보면, 답답해하는 시청자의 마음을 대신해 경기 장면을 해설하는 사람의 입에서 ‘빠떼르 줘야 합니다.‘라는 말이 나온다. 경기방식도 낯설고, 잡았다하면 곧바로 승자와 패자가 가려지는 씨름을 봐왔던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지루하기 그지없다. 김홍도의 풍속화 '씨름'을 보면 짚신과 갖신을 가지런히 벗어놓은 채 상투 튼 두 사람이 씨름을 하고 있다. 누가 이기든 관심 밖인 듯 등을 돌린 채 우두커니 서있는 엿장수에 시선을 빼앗기..
제16회 시흥문학상 우수상 시월의 가을볕이 베란다 창틈으로 날아들어 건조대에 닿는다. 빨래 건조대엔 제 할 일을 다 끝내고 한가하게 햇빛의 따사로움을 만끽하는 옷들이 서거나 누워 있다. 한동안 늦가을의 쌀쌀함을 막고 몸의 온기를 데워주고 반듯하게 맵시도 나게 해 주었으니 이제 맘껏 가을볕의 휴식을 즐길 수 있지 않느냐며 뽐내는 듯하다. 건조대 한쪽 귀퉁이에 널린 천 조각에 무심히 시선이 닿는다. 아내의 베이지색 면바지를 자르고 덧대어 테두리따라 촘촘히 꿰맨 걸레다. 근 오륙 년을 아내의 다리와 동고동락하다 옷의 수명을 다해 박복하게도 걸레가 되었다. 집안 구석구석을 누빈 세월에 닳아 올이 성기고 때깔마저 잃어 주위 옷들의 눈을 피해 제 스스로 한데로 나와 있는 것 같다. 나는 이 걸레에 별스런 애착이 간..
스산한 가을날 오후, 짙은 가을빛에 이끌려 비탈진 돌계단을 오른다. 아내와 보름 만에 나선 산행길이다. 돌계단 양옆 단풍나무 잎사귀에 가을 햇살이 뛰논다. 산의 형상이 물고기라면 눈의 자리에 암자가 있다. 암자를 지나 몇 발짝 오르면 화강암으로 된 돌부처가 토굴 속에 광배를 끼고 앉아 있다. 가슴 한켠에 불심이 자리한 건 아닌데도 그의 엄숙하고 숙연한 분위기에 매번 발목이 잡혀 아내와 나란히 서서 합장하며 숨을 고른다. 오늘도 두려움 반, 경건함 반으로 그를 쳐다본다. 삶의 행적을 훤히 꿰뚫어 보는 듯한 눈매가 서늘하여 매번 그의 앞에서 옷깃을 여민다. 이제 무뎌질 만도 한데 표정이 깊고 무거워 도무지 심중을 헤아릴 수 없다. 보름 전과는 사뭇 다른 표정이다. 손톱달처럼 눈을 내려뜨고 나를 꾸짖는 듯 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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