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시 동구 신암2동 1235번지’. 신도극장 부근 강남약국 골목 잡화상들을 지나 몇 구비 꺾어 돈 그곳은 고등학교 시절 자취집입니다. 우리 집 전화번호조차 까먹는 터에 그 주소가 기억난다니 희한합니다. 그뿐이겠습니까, 마당 가운데 공동수도에 젖줄처럼 매달려 연명하던 고만고만한 삶들도 그려집니다. 우리 문간방 옆으로 동대구시장 생선 좌판 장수 부부, 곱사 아이를 생손 앓듯 건사하던 아낙네, 5·16쿠데타로 몰락한 자유당 정권 전직 국장네 식구, 다소곳이 합숙하던 여대생 둘, 노는 꼴 보기 싫다는 어미 성화에 들볶여 머리핀 공장에 다니던 말만 한 계집애 가족이 디귿 형태로 포진하고, 늙은 내외가 오동통 곱살한 며느리 봉양을 오지게 받던 주인집이 일자로 채워지면 저 일천구백하고도 70년대의 성냥갑 같은 기..
통제부 감찰실에서 근무하던 때였다. 해군본부에서 청렴도 측정업무 상태를 검열하러 내려왔다. 때는 바야흐로 서슬 퍼런 5공 시절이라 살얼음판 같았다. 삼청교육대를 운영하여 안녕과 질서에 역행하는 껄렁패를 무차별로 잡아넣던 시대였다. 철밥통으로 회자하던 공직사회를 정화한다며 청렴에 반하는 사람을 일벌백계하던 때이기도 했다. 어느 사안보다 긴장하지 않을 수 없는 검열이었다. 수석 검열관이 누구신가를 공문을 받아 미리 알고 있던 감찰실장은 나를 검열장에 올려보냈다. 검열관 주○○ 대령, 교육사령부 교육훈련처장을 역임할 때 내가 모신 분이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옛 부서장을 뵐 겸 검열장에 들어서며 구호와 함께 경례를 척 올려붙였다. “필승!” 서류를 뒤적이던 주 대령님이 안경 너머로 나를 알아보며 미소 지었다. ..
이층 아주머니가 이사 갔다. 나는 곧 뜰의 배경을 바꾸듯 새 손님맞이 할 준비를 했다. 오래된 난방 배관을 촘촘하게 깔고, 외풍을 막으려 벽에 석고보드도 댔다. 기름보일러를 가스보일러로 바꾸고, 도배도 새로 하고 장판도 깔았다. 여러 부동산에 세를 내놓으며 조용한 사람을 부탁했다. 육십 대 부부가 와서 집을 둘러보았다. 그들은 이층을 설핏 보고 내려오더니 나를 위아래로 쭉 훑어본 후 대문을 나갔다. 며칠 뒤에는 노모와 둘이 산다는 사십 대 남자가 집을 보러 왔다. 술에 찌든 것처럼 얼굴이 퍼석퍼석했고 표정도 어두웠다. 여러 사람이 다녀갔다. 나는 사람을 고르고 오는 사람은 집을 골랐다. 그러는 사이에 서로 적합한지 여러 잣대를 들이대었다. 어느 날 사십 대 아주머니가 혼자 집을 보러 왔다. 우리네 옛 시..
약속하지마는 불유쾌한 결과가 누구나 그 신변에 일어났을 때 사람들은 이것을 횡액(橫厄)이라고 하여 될 수만 있으면 이것을 피하려고 무진 애를 쓰는 것이 보통이지마는, 어떤 의미에서는 인간이란 한 사람도 예외없이 이러한 횡액의 연속연을 저도 모르게 방황하는 것이, 사실은 한평생의 역사일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배를 타다가 물에 빠져서 죽었는가 하면, 소나기를 피하여 빈집을 찾아 들었다가 압사(壓死)를 한 걸인도 있었다. 그러는 동안에 이 축들은 대개 사람에게까지 대수롭지 않게 여겨질 때는 무슨 수를 꾸며서라도 그 주위의 사람들의 기억 속에 제 존재를 살리려는 노력이 시작된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도 꼭 알맞은 정도의 결과를 가져 온다면 여러 말 할 바 아니로되, 때로는 그 효..
요즘 지성의 해설과 지성 옹호의 논책에 이 땅의 많은 논객이 동원에 있다고 하지만은 그 지성이난 한개 심리적 경향은 휴먼이즘이 성하게 문제된 다음에 온 문제이고 그것이 이땅에 소개된 것은 구라파(歐羅巴)에서 문화옹호회의가 있은 후 최재서(崔載瑞)씨가 그것을 설명하고 주장한 다음 김오성(金午星)씨와 서인식(徐寅植)씨가 다같이 문제를 위급한 줄로 믿는데 주로 문학에 있어서 이것을 말한 이는 외씨였고 철학과 지성을 운운한 분이 그 다음 두 분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런데 조선문화의 전통 속에는 지성을 가져보지 못했다고 하는데 좀 생각해 볼 문제입니다. 가령 구라파의 교양이 우리네 교양과 다르다는 그 이유를 르네상스에서 지적한다면 우리네의 교양은 르네상스와 같은 커다란 산업문화의 대과도기를 경과하지 못했다는 것일 ..
‘마 순경’이 사라질 모양이다. 마 순경은 과속을 막으려 도로변에 설치한 가짜 경찰이다. 차가 내달릴만한 도로를 귀신같이 옮겨 다니며 근무한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밤낮으로 서 있는 마 순경을 발견할 때면 머리끝이 쭈뼛 선다. 자라 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란다는 속담을 실감한다. 마 순경을 차고 때려 분풀이를 하는 사람이 있는 모양인데, 이해가 간다. 가뜩이나 부대끼는 세상살이에 가짜에까지 골탕을 먹으니 오죽하랴. 경찰관서에서는 백성이 괴롭히고 관리마저 어려워 없애야겠다고 볼멘소리를 한다. 선글라스와 경광봉을 슬쩍해 가기도 한다니 심하긴 하다. 다시 착용시켜봤자 기어이 손을 탄다는 데야 할 말 없고, 도로변이라 복장이 쉽게 지저분해질 테니 골치도 아팠겠다. 마 순경이 안전에 도움이 된다지만, 국..
내가 다니던 G여고 앞에는 자그만한 서점 하나가 있었다. 봄 부터 초겨울까지 서점 정면 벽에 등을 기대고 자던 걸인이 있었다. 그는 입을 반쯤 벌리고 웃는 모습으로 잠들고 있었는데 입술사이로, 누렇게 변한데다 부러진 앞니 하나가 보이기도 했다. 서점 앞은 버스 승강장이라 항상 사람들로 붐볐다. 그는 사람들의 시선은 아랑곳하지 않고 단잠에 빠져 있었던 것이다. 어느 날 옷차림이 말쑥한 중년부인이 앞을 지나가며 말했다. "이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사람, 바로 저 사람이네." 그렇게 보아서 그런지 그 부인의 얼굴은 잠 못잔 사람처럼 핼쓱하고 피로해 보였다. 그 사람의 말대로 가장 행복한 사람은 그 곳이 어디든 쉬이 잠들 수 있는 사람이고, 가장 불행한 사람은 남들이 잠드는 시각에 잠 못이루는 사람이 아닐까. ..
Alas! I can not stay in the house And home has become no home to me…… -R.Tagore 나가자! 집을 떠나서 내가 나가자! 내 몸과 내 마음아 빨리 나가자. 오늘까지 나의 존재를 지보(支保)하여준 고마운 은혜만 사례해두고 나의 생존을 비롯하러 집을 떠나고 말자. 자족심으로 많은 죄를 지었고, 미봉성(彌縫性)으로 내 양심을 시들게 한 내 몸을 집이란 격리사(隔離舍) 속에 끼이게 함이야말로 우물에 비치는 별과 달을 보라고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아이를 우물가에다 둠이나 다름이 없다. 이따금 아직은 다죽지 않은 양심의 섬광이 가슴속에서, 머릿속에 번쩍일 때마다 이 파먹은 자취를 오! 나의 생명아! 너는 얼마나 보았느냐! 어서 나가자! 물든 데를 씻고 이즈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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