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 서러운 꽃이다. 얼마 만인가. 마음먹고 찾아 나선 것도 아닌데 우연히 만난 탱자나무덤불이 반가워 코끝이 시큰하였다. 조랑조랑 달린 꽃봉오리들이 안쓰러웠다. 푸른 기운이 도는 흰색을 보면 괜히 마음이 짠해지는데 눈물방울처럼 맺힌 하얀 꽃잎이 얇아서 더 서러웠다. 내가 다녔던 남해초등학교에는 탱자나무 울타리가 있었다. 나보다 두 배나 큰 키를 자랑하는 그 울타리가 얼마나 우람하였던지 소심한 나는 감히 다가갈 엄두를 못 내었다. 간혹 사내아이들이 개구멍을 들락거리기도 하고 가을에는 손가락으로 가시 줄기를 조심스레 벌려 노란 탱자를 따내기도 하였지만 나는 그런 즐거움을 느끼기는커녕 사나운 가시의 위용에 질려 멀찍이서 경계할 따름이었다. 겨울이 되면 탱자나무 줄기와 가시들이 여위고 비틀린 모습으로 공중을 향해..
춘향! ‘탈선’은 매력적인 낱말이거든, 만약 연극 제목이 「춘향전」이나 「열녀 춘향」이었다면 나는 표를 사지 않았을 테지. 「탈선 춘향전」이란 제목에 끌렸었거든. 아름다운 네 모습이 빛나는 영화를 보면서도, 손에서 놓기 싫을 정도로 재미있게 네 이야기를 읽으면서도, 심지어는 남원을 찾아 광한루를 거닐면서도 2% 부족하던 이유가 아마도 그것이 아니었나 싶어. 여성의 남성 의존적인 삶의 모습을 아무런 비판 없이 받아들이는 듯한 분위기가 부담스러웠어. 선을 그어놓고 그대로 살아가는 것은 안전하긴 하지만 세뇌당하지 않은 자유로운 심성으로는 받아들이기 힘든 일이지. (“꼴값하고 자빠졌네, 엇다 대구 말대가리를 흔들어 싸, (어사또 관을 벗겨 때리며) 너 같은 놈은 광화문 문짝에 네놈 거시기를 뽑아 매달아 놓고 ‘..
구강공화국(口腔共和國)에는 다섯 고을이 있었다. 고을마다 씨족이 모여서 살았는데, 그들은 제 나름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고 건실하였다. 주어진 환경에 만족하며 현실에 잘 적응하는 삶을 꾸려나갔다. 힘을 키우기 위해 소유하는 법이 없었고, 서로의 마음을 읽어가며 행복만을 추구했다. 물론 고을마다 땅의 모양이나 형질이 달라 생업에 차이가 있고, 그들의 됨됨이나 개성도 현격한 특징이 있었다. 씨족이 다르다 하여 서로 등을 돌리고 외면하는 옹졸함은 없었다. 때에 따라서는 함께 하며 어려움을 풀어가기도 하고, 조화롭게 절충하는 데에도 능숙하였다. 간혹 의견이 달라 다투기는 하였으나 별달리 일을 그르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그들은 다른 고을 사람들과 차별화하는 일에 그리 열중이지 않았다. 모두가 다 있을 수 있는..
오래전 꼭 가보고 싶은 섬이 하나 있었다. 지리적 거리도 멀지만 심리적으로는 좀 더 멀게 느껴지는 섬. 쉽게 가볼 수 없는 섬이기에 그 땅을 밟아보는 것도 남다른 감회에 젖을 수 있다. 험한 뱃길에 뱃삯이 비행기 저가항공 요금보다도 비싸다. 육지는 다양한 교통수단을 가지고 있지만, 백령도는 오로지 바닷길만을 이용한다. 일정 기간 예약하고 섬에 들어가지만, 기상이변이 심하여 제때 나올 수가 없어 함부로 들어갈 수가 없다. 시간적 여유와 여행 경비 문제가 해결되어야 맘 놓고 다녀 올 수 있다. 직장을 다니는 동안 마음은 있어도 쉽게 가지 못하는 섬으로 남아 있었다. 서해안 최북단에 자리를 잡고 있는 백령도. 옛날에는 인천 부두에서 190km 떨어진 거리를 12시간 정도 배를 타고서 섬에 가야 했다. 지금은 ..
제13회 현대수필문학 대상 그해 여름이 유난히 길고 무더웠던 것은 날씨 탓만은 아니었다. 내가 '서대문 큰집'에서 돌아오던 여름에는 대통령 부인 육영수가 피살되고 세상은 더욱 험악해졌었다. 다음 해에 나는 수필집 《그래도 살고 싶은 인생》 과 평론집이 판매 배포 금지되고 경희대도 떠나게 되었다. 가깝던 문단 친구들도 멀어져 갔다. '철새들'이 다 떠난 자리에서 기약 없는 긴 방학이 시작되자 나도 가족들을 데리고 그곳을 떠났다. 나는 한강 너머 양녕대군(讓寧大君) 묘 곁의 약수터로 이사했다. 그리고 날마다 손자 손을 잡거나 업어주며 약수터에 나가 앉아 멀리 한강 너머를 바라보는 일이 많았다. 처서도 지나고 여름이 다 갈 무렵의 어느 날 저녁이다. 환한 형광등 불빛을 찾아서 방으로 귀여운 손님객이 날아들었다..
제6회 경북일보 문학대전 수필 동상 꽃보다 어여쁜 섬으로 간다. 파도 일렁이는 부두에 찢어질 듯 나부끼는 깃발을 보면, 살아 움직이는 섬으로 왜 떠나야 하는가를 실감한다. 난 설레는 가슴을 안고 섬으로 쏜살같이 달음박질한다. 뱃전에 하얗게 부서지며 출렁이는 파도도 나에겐 신선한 감동이다. 낯선 섬으로 떠나는 여정은 삶의 또 다른 쉼이다. 섬은 큰 맘 먹어야 갈 수 있다. 배를 타고 오갈 수 있는 섬은 뱃멀미가 따른다. 특히, 비바람이 조금이라도 몰아치면 오가는 배가 전면휴업이다. 육지와 동떨어진 섬은 시종일관 낯선 풍경이 펼쳐진다. 망망대해에 당그라니 고립된 느낌과 동시에 예상 밖의 묘한 해방감을 준다. 나는 지금 투박한 자연 그대로의 섬으로 간다. 섬은 잔재미가 있어 즐겁다. 불리는 이름만 들어도 흥미..
제6회 경북일보 문학대전 수필 동상 창밖이 뿌옇다. 무채색으로 천천히 변하는 광경은 하늘과 땅이 아주 작은 움직임만으로 서로에게 다가가는 것 같다. 컴컴한 어둠 속에서 앞으로 나가기 위해 손을 휘젓는 사람처럼, 하늘에서는 땅 쪽으로 나있는 길이 잘 보이지 않는가 보다. 허공에 정지된 채 방향을 선뜻 잡지 못하고 여기저기 기웃거린다. 망설이는 눈은 마치 공중에 떠 있는 민들레 꽃씨 같다. 혹은 밍밍하고 탄력없는 밥풀에 살짝 숨어있다 그윽하게 입안에 번지는 식혜의 맛처럼 달콤한 느낌으로 다가온다. 눈으로만 바라보는 사랑처럼, 날리는 속도는 더디고 방향이 일정치 않다. 그래서 신비롭다. 소담스럽고 기운차게 펑펑 쏟아지다가 운명처럼 닿는 순간 더러 녹으면서도 순식간에 쌓이고 있다. 아무도 밟지 않은 눈길에 발자..
제6회 경북일보 문학대전 수필 은상 할머니 가슴에 뚫린 구멍은 오직 당신만이 볼 수 있다고 했다. 아마도 심장을 관통하고 있었을 것이다. 전쟁 중 행방불명된 아들 덕주 때문에 생겨난 구멍은 해마다 깊어지고 넓어졌다. 가끔 그 구멍을 들여다보고 싶었다. 구멍이 점점 더 넓어져 할머니를 삼켜버리는 건 아닐까, 할머니가 그 구멍 안으로 빠져버리는 건 아닐까 두려웠다, 할머니가 입을 벌리고 잠들어 있었다. 벌린 입 사이로 할머니의 생이 드나들었다. 들숨으로 할머니에게 덕주가 들어갔고 날숨 속에 할머니 안의 덕주가 나왔다. 뼈만 앙상한 가슴팍이 오르락내리락 쉴 새 없이 움직이고 있었다. 할머니가 무언가를 먹는 행위는 연명을 위한 단순한 반복처럼 보였다. 말이 드나드는 구멍인 입으로 한탄, 체념, 절규의 언어가 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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