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겨울의 시인들은 모두 감기에 걸려 있다. 그래서 그들이 시를 쓰는 것은 바로 그들의 기침 소리이기도 한 것이다. 겨울밤에는 문풍지를 울리는 바람 소리나 강에서 얼음 죄는 소리만이 들려오는 것은 아니다. 가만히 엿듣고 있으면, 어디에선가 기침 소리가 들려온다. 기침 소리는 허파의 가장 깊숙한 밑바닥에서 울려 나오는 소리이다. 그 소리는 아직도 허파 속에 생명이 숨 쉬고 있다는 선언이며, 겨울잠에서 깨어나라는 경고의 목소리이다. 기침 소리는 무슨 음악처럼 박자나 화음이나 음계 같은 것으로 울려 오지 않지만, 혹은 언어처럼 명사와 동사 그리고 그것을 수식하는 형용사와 부사 같은 문법(文法)으로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러나 어떤 미열과 고통 그리고 미세한 바이러스를 거부하는 분노 같은 힘들이 묘하게 어울려 ..
어항 물갈이를 했다. 열대어들이 죽고 말았다. 수면 위로 떠오른 물고기들이 나를 원망하는 것 같다. 뜰채로 건져 쓰레기통에 버리고 창밖을 기웃거린다. 딸아이가 돌아올 시간이다. 오랜 객지 생활의 외로움을 물고기 키우는 재미로 대신한다는 말에 마음이 켕긴다. 상경한 날부터 집안일에 옷매무새까지 내 잣대를 대고 눈칫밥을 먹이자 "바야흐로 엄마의 눈치시대가 도래했다."며 흘끗거렸다. 어쩌다 이 지경이 되어 안절부절못하는 내 모양새를 남편이 본다면 "참, 당신은 눈치가 없어서 탈이야."라며 또 눈치 없이 끼어들 게 뻔했다. 나는 눈치에 둔감한 편이다. 아니, 너무 예민한지도 모르겠다. 눈치가 나보다 힘이 더 세서 굽실거릴 때도 많다. 하루가 다르게 변하는 세상이다 보니 눈치를 보는 횟수가 늘어났기 때문이다. 낯..

오늘 밤에도 귀뚜라미 울음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가을도 깊어 밤이면 창문을 닫고 잠들 만큼 기후도 선선해졌는데, 그 귀뚜라미가 베란다 어느 구석에서 아니면 책장 뒤에 아직도 살고 있다면 가냘픈 울음소리라도 들려줄 것 같은데 아무리 귀를 기울여도 들리지 않는다. 지난여름 책을 정리하다 책장 구석에서 튀어나온 한 마리 귀뚜라미를 발견하고 놀랍고 반가워 손안에 잡아들고 싶은 기분이었다. 베란다로 뛰어나간 귀뚜라미는 이내 화분들 속으로 자취를 감추어 버렸지만 그날 이후 고향에 돌아간 사람처럼 공연히 마음이 부풀고, 올 가을에는 견고한 아파트 공간에서도 귀뚜라미 울음소리를 들을 수 있을 것 같아 마음이 들뜨기까지 했었다. 그 한 마리 귀뚜라미를 생각하며 그 뒤 두 달이나 아파트에 소독을 하지 않았다. 징그러운 바..

봄을 시작으로 산야에는 참으로 많은 풀꽃들이 피어난다. 노란 꽃다지에서 시작하여 보랏빛 제비꽃, 흑장미 빛의 할미꽃, 꽃분홍이란 말보다 연산홍 꽃빛이 더 어울리는 패랭이꽃, 진달래꽃 빛의 앵초꽃, 연분홍과 흰색이 어우러진 밥풀꽃, 금낭화, 노란 산괴불주머니꽃, 짙은 보라의 붓꽃, 황금빛 원추리꽃, 하얀 방울 같은 둥굴레꽃, 분홍과 보라가 어우러진 엉겅퀴꽃 등 참으로 다양한 빛깔에 다양한 꽃들이 피어난다. 나는 그런 꽃들이 피어나는 수채화 빛 산야에서 보내던 어린 시절이 있었다. 지금도 제비꽃을 보면 그 곁에 주저앉아 앙증맞은 꽃으로 반지를 해 끼고 싶어진다. 어린 시절 제비꽃이 가득한 풀밭에 앉아 제비꽃 반지를 만들었다. 꽃대공을 뽑아 올려 꽃잎 밑부분에 주머니같이 붙어 있는 부분을 조금 자르고 꽃줄기를..

뒷산에서 꾀꼬리 울음소리가 들린다. 송홧가루가 바람에 날리고 있다. 송화가루 날리는 외딴 봉우리 / 윤사월 해 길다 꾀꼬리 울면 / 산지기 외딴집 눈먼 처녀사/ 문설주에 귀대고 엿듣고 있다// 박목월 시인의 시 이 나도 모르게 입안에서 맴돈다. 나는 눈먼 처녀처럼 눈을 감고 꾀꼬리 소리에 귀를 기우리며 시인에 대한 그리움의 소리를 듣는다. 느릅나무 속잎 피는 열두 고비를 청노루 맑은 눈으로 바라보시던 시인의 맑은 영혼이 그리운 하루다. 우리 집은 숲과 닿아 있다. 뻐꾸기, 꾀꼬리가 울고 송홧가루가 날리는 아름다운 숲과 함께 있다. 그래서 오늘 같은 날 김동리 선생의 수필 도 다시 음미하게 된다. 숲은 동양인에게 성격이 다른 신神의 이름일지도 모른다고 했다. 수목이 없는 세상은 아름다움도, 평화도, 기쁨과..
2020 토지문학제 평사리문학대상 늙은 석류나무에 다시 몇 송이 꽃망울이 맺혔다. 정원에 죽은 듯 서 있던 몸이었다. 봄꽃들의 잔치가 끝나갈 무렵 석류나무는 태아처럼 불그스레한 이파리를 살짝 내밀었다. 오뉴월 햇살 담뿍 머금으며 파릇파릇 몸집을 불렸다. 서른 끝자락에 이 집에 들어왔다. 적막한 마당에는 묵은 나뭇가지며 잡풀과 낮은 나무들이 뒤엉켜있었다. 한쪽에는 석류나무만이 하늘로 가지를 뻗친 채 푸르렀다. 뒷짐 진 터줏대감처럼 석류나무는 신혼살림 차리듯 들떠 들어오는 우리를 환하게 맞았다. 뜰에서 가장 오래 머문 곳은 석류나무 아래다. 책을 읽다가 눈이 침침해지면 그 그늘로 달려갔다. 뜨락의 꽃과 나비도 바라봤고, 담 안으로 날아든 한 마리 흰 비둘기도 지켜봤다. 구름이 그리는 흑백 그림들도 올려다보고..

재미있는 우화가 있다. 옛날 아리비아의 어떤 상인이 임종을 맞게 되었다. 그는 자기 앞에 세 아들을 불러 앉혔다. 그리고는 "내가 너희들에게 남겨 줄 유산이라고는 말 열일곱 필이 있을 뿐이다. 그러나 이 고장의 습관에 따라 꼭 같이 나누어 줄 수는 없으니까 맏아들 너는 열일곱 마리의 반을, 둘째 아들 너는 3분의 1을, 그리고 막내아들 너는 전체의 9분의 1을 갖도록 하라." 고 유언을 했다. 얼마 후 아버지는 세상을 떠났다. 재산을 나누어 가져야 할 삼 형제간에는 오랜 싸움이 계속되었으나 해결을 얻을 길이 없었다. 맏아들은 열일곱의 반으로 아홉 마리를 주장했다. 그러나 동생들은 아홉 마리는 2분의 1이 넘으니까 줄 수 없다는 것이다. 여덟 마리 반이 되지만 반 마리는 처리할 수가 없는 때문이다. 둘째 ..

제10회 백교문학상 우수상 풀무를 돌린다. 쇠바퀴가 삐걱대며 돌기 시작한다. 지나온 시간들은 사라지지 않고 어딘가에 흔적을 남기는가 보다. 푸르죽죽한 이끼로 뒤덮인 기억들이 바퀴를 타고 돈다. 프레임으로 돌아가는 흑백영화가 되어 과거의 소리를 들려준다. 봉창을 통해 흐르는 별빛과 달빛 소리, 타오르는 장작불 소리, 김을 올리는 가마솥의 하품소리, 부지깽이로 장단 맞추는 소리가 설핏 풀무에게서 들린다. 별스러울 것 없이 빙그르르 이는 소리에 마음이 하뭇해진다. 가슴에서 내놓는 한줄기 바람으로 한때는 호시절을 누렸을 풀무. 무쇠로 만들어졌으니 몸태의 질감은 무겁고 거칠다. 허나 속은 텅 빈 채, 가슴에 바람개비 하나 달고 바삐 돌아간다. 바람을 보내기 위해 얼마나 아파해야 했을까. 터져 나오는 한숨마저 어둠..
- Total
- Today
- Yesterda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