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볕더위 그해 중국 상해의 여름은 대단했다. 낮에 이어 밤까지 여행 일정은 이어졌다. 수은주가 37도를 오르내리는 더위였다. 어디를 가든 흐르는 땀을 닦노라 시선을 제대로 두기가 어려웠다. 한낮 거리는 온통 웃통을 벗은 남자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공원도 예외가 아니었다. 반라半裸의 천국이 중국이다. 그들의 여름나기가 가히 대단하다. 지금 내가 다시금 그 공간에 있다. 연일 불가마 속이다. 체온을 뛰어넘는 불볕더위가 축축 늘어지게 한다. 사람만이 아니다. 옥상 정원에 가꾸어 놓은 화초며, 채소들이 불볕을 견디지 못하고 녹아내리기 직전이다. 아무리 목을 축여주어도 그때뿐이다. 여름나기가 어려운 건 동물들 또한 매한가지다. 온몸을 털로 무장한 우리집 강아지 복실이는 그렇다 하고 면도한 듯한 복순이 마저..
고향 집 안방 문 위에는 몇 장의 사진이 걸려 있다. 사진 속의 할머니는 모로 누워 한쪽 팔로 머리를 괴고 다른 손으로 부채를 부친다. 날은 한여름이다. 아기는 곤히 잠들어 있다. 아이에게 태극선을 살살 흔들어 바람을 피우고 혹시나 손주에게 달려들 파리나 벌레를 쫓는다. 다정하게 불어가는 바람으로 할머니의 얼굴에는 미소가 그득하다. 그 마루 밖으로 아버지가 여동생을 안고 흐뭇하게 보고 계신다. 나는 뭔가 심통이 났는지 섬돌 위에 앉아 땅만 바라보고 있다. 내가 다섯 살 무렵 찍은 사진이다. 할머니와 아버지가 동시에 들어간 그리고 두 동생이 같이 찍힌 사진이다. 흑백사진이므로 태극선은 검고 희게 나타나 있다. 사진을 찍은 지 일 년도 채 되지 않아 할머니 탈상을 했다. 그 부채는 사라졌으나 그 부채가 한때..
뱀을 좋아한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화면으로 보는 것만 좋아한다. 뱀은 징그러움과 매력을 동시에 선사하는 동물이다. 적어도 내겐 그렇다. 그래서 그런지 내셔널지오그래픽 채널에서도 단골로 등장한다. 움츠리고 있다가 한순간에 먹이를 낚아채는 모습은 흥미진진하다. 소름 돋는 화면을 뚫어지게 쳐다보다 진저리를 친다. 그럴 때마다 간교한 지혜를 가진 유혹자를 왜 뱀으로 표상하는지 생각하게 된다. 정교한 비늘의 소리 없는 움직임, 쉿쉿거리는 소리가 들릴 것 같은 양 갈래의 혀는 째깍째깍 돌아가는 초침 같은 긴장감을 준다. 어릴 때부터 뱀에 관한 얘기를 수없이 들어왔다. 막냇동생은 밤에 태어났다. 외숙모님을 비롯한 친척들은 안방에서 어머니의 출산에 대비하고 있었다. 부엌의 가마솥에서는 물이 설설 끓었다. 방 안..
거미가 까마득한 허공에 집을 짓는다. 방사형의 살들을 도래방석처럼 엮어간다. 거미는 지지실을 타고 중심축을 오가며 쉬지 않고 동심원을 반복한다. 집의 중심인 바퀴통에 떡하니 거꾸로 매달려 있는 모습이 외줄을 타는 무동처럼 아찔하다. 청도 운문사의 비로전 천장 대들보에 단청이 희미해진 배 한 척이 걸려있다. 뱃머리와 고물이 용머리 생김새인 나무배에는 줄에 매달린 동자승이 있다. 불퇴전의 화신 동자보살은 장난기 머금은 표정으로 악착스레 외줄에서 내려다보고 있다. 한순간 마음의 중심을 잃고 절망의 나락으로 떨어질 사람들을 보살피느라 내려오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동자보살이라 부르기도 하고 악착보살이라고도 한다. 악착보살의 이야기는 구전으로만 전해진다. 옛날에 청정하고 신앙심 깊은 이들을 서방의 극락정토로..
신발은 두 짝이 있어야 한다. 한 짝은 외롭다. 부부도 함께 있어야 아름답다. 헌신짝 버리듯 헤어지는 부모들의 결정으로 선택권이 없는 아이들은 많이 아프다. 아이가 울고 있었다. 사흘 전 장날 엄마가 사다주신 리본 달린 꽃고무신이 없어졌기 때문이다. 아이들이 다 돌아간 복도에서 울고 있는 아이에게 다가온 선생님은 딱했는지 학년마다 교실 앞 복도에 놓여있는 신발장을 같이 돌며 찾아보았다. 꽃고무신은 보이지 않고 닳고 닳아 찢어진 검정고무신 한 켤레가 남아 있었다. 새 고무신을 신으면 뒤꿈치를 깨물어서 살갗이 부풀고 벗겨져서 피가 났다. 그래도 참고 신었다. 밴드나 반창고도 귀했던 시절이었다. 뒤꿈치에 헝겊쪼가리나 종이를 접어서 대고 절뚝거리면서 걷거나, 신발 뒤를 꺾어 신고 며칠 다니다 보면 딱지가 앉았다..
봄빛이 고향집 화단에 피어있던 산매를 보내왔다. 연분홍빛 볼을 청 초히 숙이고서 부끄러운 듯 슬픈 듯 흔들리던 매화. 겹고광나무라고도 하고 산옥매라고도 한다는데 어쨌거나 나는 고향집 산매화가 참 좋았다. 요즘은 때를 혼동한 진달래 철쭉 벚꽃 산수유 튤립 장미 등이 시도 때도 없이 앞 다투어 피어난다. 달력이 제 구실을 못한다는 말을 듣다가 김수영 시인의 팽이( 中)가 떠올랐다. ‘팽이 밑바닥에 끈을 돌려 매이니 이상하고/ 손가락 사이에 끈을 한끝 잡고 방바닥에 내어던지니/ 소리 없이 회색빛으로 도는 것이/ 오래 보지 못한 달나라의 장난 같다’는 시 구절. 몇 천 년 된 달력. 그 몇 천 년 사이 달과 지구 궤도에 변화가 생긴 것 같다. 꿈과 희망과 인류문명을 가능케 했던 달이 조금씩 조금씩 지구로부터 뒷..
그날은 강진과 영암으로 등산을 떠났던 날이었다. 아침부터 하늘은 잔뜩 찌푸려져 아름답게 빛나야 할 산하가 온통 베일에 가려지던 그런 날이기도 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바람이 가끔 불어와 한 뼘의 조망이 열렸다는 것이다. 파란 하늘은 수줍은 듯 운무 뒤로 숨어버렸고, 간간이 하얀 바위 능선들이 속살을 드러내곤 하였다. 출발 후 4시간이 지나서야 목적지에 도착했다. 호랑이 울음소리를 녹음해 확성기로 틀면 산짐승들이 도망간다는 강진의 ‘달마지 마을’이다. 실제처럼 보이는 크고 작은 여러 마리 호랑이 조형물이 있었다. 월각산과 주지봉, 문필봉을 연결하는 종주 팀을 내려놓고, 짧은 등산과 유적탐방을 목적으로 하는 나머지 참석자들을 인솔해 다음 목적지로 향했다. 두 번째 도착한 곳이 영암군 구림리 성기동이다. 붓..
옛날에 한 나이 어린 아가씨가 흰 가마를 타고 시집을 갔다. 흰 가마는 신랑이 죽고 없을 때 타는 가마다. 약혼을 한 후 결혼식을 올리기 전에 신랑이 죽은 것이다. 과부살이를 하러 흰 가마를 타고 가는 것이다. 시집에 가서는 보지도 못한 남편의 무덤에 가서 밤낮으로 흐느껴 울었다. 그래야만 열녀가 된다. 아씨가 흐느껴 울고 있는 밤중에 신기하게 무덤이 갈라지더니 아씨가 무덤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었다. 친정에서 함께 따라온 하녀가 이 광경을 보고 달려가 아씨의 저고리섶을 잡고 늘어졌다. 옷섶이 세모꼴로 찢어지며 아씨는 무덤 속 깊숙이 빠져 들어갔다. 이윽고 갈라진 무덤이 합쳐졌다. 아씨를 잃은 하녀의 손에는 세모꼴로 찢어진 저고리 섶 만이 남았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이 찢어진 저고리 섶이 흰나비가 되어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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