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재, 밥 잘 먹었는교?” “야, 배 터지도록 먹었소.” “아재, 내 더위 사소.” 정월 대보름날 아침 담 너머로 흔히 나누는 인사다. 다가오는 여름 더위를 먼저 불러 파는 우스개 놀이다. ‘아재’는, ‘아저씨’의 사투리라고 쉽게 규정 할 수 있으나 훨씬 정감스러운 호칭이다. 삼촌, 오촌은 아니지만 먼 친척이거나 가까운 이웃에게 서로 부르는 서부 경남에서 널리 사용되는 호칭이다. 어쩐지 살가운 맛이 나는 불음이다. 금요 산책 팀은 열 명으로 시작했다. 두 명이 병고로 참석하지 못하고 있다. 팔순이 넘은 나이이기에 건강상 불참하게 될 사유가 자꾸 생긴다. 다 늙어가는 나이에 이름을 그대로 부르는 것은 듣기 거북하다. 호나 별명으로 부르기로 했다. 두꺼비, 대장 등의 별칭으로 서로 부르고 있다. S회장에게..
운명의 짐을 졌다. 시커멓게 과거를 지우고 뉘 집에 유배되었다. 나무에서 숯으로 바뀐 신세를 항변할 새도 없이 잿불에 파묻힌다. 가문을 지키며 불씨를 잇는 계율은 지엄하다. 그을음과 연기로 미적대지 않는다. 불티를 날리며 요란을 떨지 않는다. 그저 소리 없이 뭉근하게 타오른다. 살풀이하듯 발갛게 일렁인다. 밤새 가물거리며 화로의 불씨를 품느라 어둠살이 밝아오는 줄도 모른다. 몸 안의 길을 따라 저장해 놓은 한 톨의 비, 한 가닥의 바람, 한 점의 햇살마저 날려 버렸으니 한가로이 풍화에 들면 그만이다. 텅 비어 구멍투성이인 몸뚱이로 무얼 어쩌랴. 난데없이 어두운 구석에 처박혀 묵은내를 들이마신다. 장독에 들어앉아 불순물을 흡착하느라 뒤척일 수 없다. 잡귀를 물리치는 문지기로 내몰려 문간의 금줄에 내걸린다...
‘시골경찰’이라는 티브이 프로그램을 재미있게 시청한 적이 있다. 경찰복을 입은 탤런트들이 출연하여 주로 노약자들을 보살핀다. 한적한 골목에서 느닷없이 ‘경찰’하고 부르는 소리에 순간적으로 휙 돌아보는 두 사람, 복장만 그럴 듯한 새내기 경찰들이다. 횡단보도에 불법주차된 승용차 때문에 통행이 불편하다는 민원이다. 차 앞 유리에 붙은 휴대전화 번호로 차주와의 통화가 이루어진다. 이들은 대뜸 “경찰입니다”라며 자초지종을 알린다. 곧 나타난 젊은 여자 차주로 민원은 해결된다. 이들은 근엄한 목소리로 “횡단보도에 차 세우면 안 됩니다. 운전 조심하세요.”라는 인사까지 잊지 않는다. 차가 출발하는 것을 보고서야 이들도 제 갈 길을 간다. 정말 멋지다. ‘옷이 말을 하는구나’ 싶다. 저희들끼리 하는 말이 또 절창絶唱..
올무는 올가미를 만들 때 쓰는 철사나 노끈을 말하나 동의어로 사용하기도 한다. 유해조수(有害鳥獸)를 포획하는 형틀이다. 지금은 작물에 피해가 있어도 함부로 포획할 수 없도록 유해조수관련법으로 보호하고 있다. 농민들은 야생조수로 인해 농작물에 피해는 물론 맹수에 가까운 멧돼지가 내려와 위협을 하고 있다. 포획허가를 받은 지역에 허가받은 엽사(獵師)가 허가받은 수량을 포획하지만, 유해조수는 그 수가 날로 증가하고 있다. 옛날에는 올무를 비롯한 덫과 함정을 만들어 피해를 줄이려 농민들은 안간힘을 다했다. 어릴 때 할머니는 “콩을 심으면 꿩 비둘기 쥐가 먹다 남긴 것을 사람이 먹는다”라는 푸념으로, 짐승들 때문에 헛농사 짓는다고 말씀하셨다. 가을에 벼가 누렇게 익을 때면 밤에 멧돼지가 떼를 지어 내려와 이삭을 ..

한 여인이 펼쳐진 억새밭에서 춤을 춘다. 느릿느릿 일정한 형태도 없이 흐느적거린다. 마치 내면의 슬픔을 끌어내듯 춤이 진행된다. 그녀의 의식에 따라 억새가 바람에 흔들리다 눕는다. 영화 의 시작 장면이다. 친정엄마는 한 번도 당신의 생각을 드러내지 않았다. 할머니의 매운 시집살이와 아버지의 가벼운 주머니도 말없이 받아냈다. 구성지게 뽑아대는 판소리 여섯 마당이 아버지의 목소리로 주막에서 흘러나왔을 때도, 한나절 내내 약장수와 어울려 다니다 분 냄새 풍기고 들어와도 모른척했다. 남에게는 한없이 너그러웠으나 가족에게는 불같았던 아버지와 달리, 훅 불면 날아갈 듯 한 가랑잎 같은 엄마가 가정을 지키는 것은 사막의 낙타처럼 감내하는 것이라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앞으로 갈 수도 없고, 왔던 길을 되돌아가기도 어려..
봄은 새 옷 짓고 찬연하다. 연둣빛 생명들은 언어도 익히기 전에 들판으로 달려 나가 잎보다 먼저 꽃이 폭발한다고 소문을 냈다. 언 땅 뚫고 올라온 할미꽃이 둥글게 말린 허리를 편다. 한줌 햇살 머리에이고 언덕바지에 숨고르기 하려는 참인데, 바람이 분다. 굽은 허리 부러질라 납작 구푸린 머리가 흙속에 다시 묻힐까 엉덩이에 잔뜩 힘을 주었다. 엉덩이에 힘을 세게 줄수록 붉어지는 얼굴은 비단 꽃을 피웠다. 봄의 축제로 드높은 하늘에 풍선을 띄웠지만, 느닷없이 마음을 짓누르는 것들이 있다. 원인불명의 바람이다. 바람이 분다. 세상 센 바람이 분다. 주눅이든 생각들은 보이지 않는 철조망에 걸려서 갈기갈기 찢어진 마음들이 휴지조각으로 너풀대고. 고통으로 배여든 도시는 절규로 나뒹굴며 거리를 방황하던 슬픔들은 까무러..

해바라기 씨앗을 소쿠리에 담아 햇볕에 말리고 있다. 지난 오월이었다. 선흘꽃밭에 꽃구경을 갔더니 동문회에서 사랑의 꽃씨 나눠주기 행사를 하고 있었다. 행사를 담당하고 있던 한 친구가 엽서를 건네주면서, “누군가에게 편지를 쓰렴. 꽃씨를 보내줄게. 아담한 해바라기야.”라고 말했다. 작은 해바라기이면 정원에 심어도 예쁘겠다 싶어 남편한테 편지를 썼다. “현승 아빠, 지난한 세월 동안 무거운 짐을 지고 오느라 고생 많았어요. 오늘, 꽃밭에서 꽃들을 감상하는 시간을 함께할 수 있어 감사해요. 여생은 무거운 짐을 내려놓고 편히 살았으면 좋겠어요.” 며칠 후에 선흘꽃밭에서 보내온 엽서에는 해바라기 씨앗 일곱 개가 들어있었다. 무표정한 남편도 엽서를 펼쳐보며 미소를 짓는다. 해바라기는 국화과에 속하는 한해살이 풀꽃이..
사람의 모습은 겉만 봐서는 모른다. 그러나 우리가 보는 것은 사람의 겉모습을 보며 사람됨을 점치기도 한다. 어떤 점잖고 교양 있고 직장도 반듯한 남편이 있었다. 유머도 있고 부인과 외출할 땐 꼭 손을 잡고 다녔다. 이웃 사람들이 그 부인을 보고 말했다. “그런 남편과 사는 당신은 참 복이 많은 사람이다.”라고. 그랬더니 그 부인이 하는 말이 “한번 살아봐라. 그런 말이 나오는지 내 속은 아무도 모른다.”였다고 한다. 한 남자랑 삼십 년 하고도 사 년째 함께 살고 있다. 집에 들어오는 남편의 눈썹만 봐도 어떤 기분인지 짐작할 수가 있다. 눈썹이 부드럽게 갈매기를 하고 있으면 양호한 상태. 거기에 입매까지 부드러우면 최상이다. 눈썹이 꼿꼿하면 기분 별로. 입까지 꾹 다물고 화장실로 들어가면 성질이 난 것.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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