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자바리(최원현) 소리로 듣기 할머니는 늘 왼손을 허리 뒤춤에 댄 체 오른손만 저으며 걷곤 하셨다. 그게 언제부터였는지는 모르겠다. 다만 기억나는 것은 앉았다 일어나려면 ‘아고고고’ 하시며 허리가 아픈 증상을 아주 많이 호소하셨고 길을 가다가도 한참씩 걸음을 멈추곤 허리를 펴며 받치고 있던 왼손으로 허리를 툭툭 치다가 다시 가곤 하셨다. 그런 할머니의 허리가 언제부턴가 조금씩 더 구부러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그걸 바라보는 어린 내 마음은 더욱 편치 않았다. 할아버지는 하얀 수염으로 늙음이 나타났지만 할머니는 그렇게 허리가 굽어지는 걸로 나타났다. 기역자처럼 거의 직각으로 굽어진 허리를 똑바로 보는 것만으로도 괜히 서글퍼지고 안타깝고 민망했다. 오랜만에 뒷산엘 올랐다. 그새 나무계단이 하나 더 생..

안경을 한번 써보고 싶었다. 중학교에 다닐 때 안경을 쓴 친구가 하나 있었는데 그게 그렇게도 부러웠다. 그렇다고 눈이 나쁜 것도 아닌데 괜히 안경을 쓴다는 것도 우스운 일이겠지만 설혹 눈이 나쁘다고 해도 안경을 맞출 형편도 못 되던 때였다. 여하튼 안경을 쓴 사람만 보면 그것이 그렇게도 멋져 보였다. 요즘이야 안경이 일반화 되었고, 아이들도 오히려 쓰는 사람이 더 많을 지경이지만 안경을 쓰지 않는 게 얼마나 큰 행운이요 축복인가를 알게 될 때가 내게도 찾아왔다. 전혀 예상치도 않게 내가 안경을 쓰게 된 것이다. 그러니까 운전면허 적성검사일이 되어 면허시험장에 가서 시력검사를 할 때였다. 검안표를 바라보는데 도무지 숫자도 그림도 제대로 볼 수가 없는 것이다. 형체는 알겠는데 정확히 무슨 자인지, 어디로 뚫..

기차 안에서 계절의 바뀜을 본다. 가을걷이가 끝난 들녘은 허허롭지만 벼를 베어낸 자리에선 새 움이 돋아나 생명력을 느끼게 한다. 동그마니 벌판에 남아있던 볏짚들의 마지막 가을 햇볕 바라기가 한가롭다. 아직도 자리를 지키고 있는 무와 배추들, 잎이 몇 개만 붙어있는 나무들, 여직 황금빛 열매를 달고 서 있는 감나무, 가끔가다 보이는 까치집, 가을은 가다 말고 투정을 부리는 것 같고, 겨울은 아주 여유로운 걸음걸이로 서서히 다가오고 있는 것 같다. 그러고 보니 언덕배기에선 억새꽃이 하늘거리고,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하늘 아래선 저마다의 빛깔들이 자기를 지키고 있는 것 같다. 해마다 이맘쯤이면 나는 앓곤 했다. 가을과 겨울, 난류와 한류가 만나는 시점에선 내 바이오리듬도 중심을 잃는다. 그러나 정신은 맑아지..
아내가 거리에 나갔다가 옥수수 두 개를 사 왔다. 하나씩 먹자는 뜻이다. 그러나 옥수수자루가 얼마나 큰지 반 토막도 다 못 먹겠다. 한 뼘 반도 넘으니 양적으로 한 자나 되는 것 같다. 요사이 TV에서 전하던 개량종 수원19나 20호인 거 같다. 그리고 멀리 강원도 산간 지방의 화전에서 온 것이라고 생각이 된다. 나는 어린 시절부터 옥수수를 퍽이나 좋아했다. 키가 2미터 이상이나 자라난 옥수수 밭이 길 양쪽에 서 있는 좁은 길로 혼자서 지나갈 때에는 무서운 짐승이나 뛰어나올 것 같아서 머리털이 오싹 일어서는 것 같았다. 무엇보다 옥수수의 이파리들은 야자수의 이파리처럼 길게 뻗어 나무의 양쪽이 늘어져서 춤을 추는 모양을 하고 있는 것이 좋았다. 그러나 바람이 세차게 부는 날에는 병사들이 칼을 빼들고 열을 ..

내 책상 위에는 몇 날 전부터, 석류 한 개가 놓여 있다. 큰 사과만한 크기에, 그 빛깔은 홍옥과 비슷하지만, 그 모양은 사과와는 반대로 위쪽이 빠르고 돈주머니 모양으로 머리끝에 주름이 잡혀져 있다. 보석을 꽉 채워 넣고 붙들어 매 놓은 것 같다. 아닌게 아니라, 작은 꿀단지가 깨어진 것같이 금이 비끼어 터진 굵은 선 속에는 무엇인가 보석같이 빤짝빤짝 빛나는 것이 보인다. 나는 가만히 앉아서 석류의 모양을 한참이나 물끄러미 바라본다. 매끈한 사과와는 달리 무엇에 매를 맞았는지 혹과 같은 것이 울툭불툭한 겉모양 그 속에는 정녕코 금은보화가 꽉 채워져 있는 것 같은 모습이다. 나는 아까워서 아까워서 석류 한 개를 놓고 매일같이 바라만 보고 있다. 행여, 금이 나서 터진 그 석을 쪼개 볼 생각을 하지 않는다...
어머니의 사랑, 그 지극하신 사랑! 사랑의 참뜻을 처음으로, 그리고 가장 깊이 가르쳐 주신 어머니…. 우리가 인간으로 태어나서 처음으로 입을 열었을 때, 그 때 우리 입에서 나온 최초의 언어는 '엄마', 곧 어머니가 아니었던가! 어머니를 부르고 어머니를 외치며 우리는 인간임을 알았고, 그런 인간이기 때문에 우리는 무시로 어디서나 어머니를 부르고 어머니를 외쳤다. 기쁠 때나 슬플 때나, 즐거운 곳에서나 괴로운 곳에서나, 마음이 아프거나 몸이 아프거나, 우리는 언제나 어디서나 어머니를 찾으며 이렇게 자라 왔다. 어머니는 온통 우리를 보호해 주시는, 무너짐 없는 성이었다. 어느 누구든지, 어머니의 품속에서는 이 세상에 무서워할 것도 없는 똑같은 왕자요 공주였다. 거기서는 항상 다사로움과 밝음과 꿈과 노래마저 ..

평화로운 시대에 있어서 시인의 존재는 가장 비싼 문화의 장식일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 시인이 처하여 있는 국가가 비운에 빠지거나 통일을 잃거나 하는 때에 있어서, 시인은 그 비싼 문화의 장식에서 떠나, 혹은 예언자로, 또는 민족혼을 불러일으키는 선구자적 지위에 놓일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정부도 군대도 가지지 못하고, 제정 러시아의 가혹한 탄압 아래 있던 폴란드인에게는, 시인의 존재가 오직 국민의 재생을 예언하며, 굴욕된 정신생활을 격려하는 크나큰 축도를 드리는 예언자로 생각되었으며, 아직도 통일된 국가를 가지지 못하고 이산되어 있는 이탈리아 사람들에게, 시성 단테는 '오로지 유일한 이탈리아'로 숭모되어 왔었으며, 제1차 세계 대전 때에, 독일군의 잔혹한 압제 하에 있었던 벨기에인에게 있..
지극히 그리운 이를 생각할 때 모르는 사이에 눈물이 돌듯, 나는 모색 앞에 설 때마다 그러한 감정에 젖어들게 된다. 사람의 마음이 가장 순수해질 때는 아마도 모색과 같은 심색일는지 모른다. 은은히 울려오는 종소리 같은 빛, 모색은 참회의 표정이요, 기도의 자세다. 하루 동안을 겪어 낸 번잡한 과정 다음에 밀려드는 영육의 피로와 허황한 감회는 마치 한낮의 강렬했던 연소의 여운이 먼 멧등에 서리듯 외로움이 감겨들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저 유명한 화가 밀레도 한 가족의 경건한 기도의 모습을 모색 앞에 세우고 그림의 제목을 만종이라 붙였는지도 모른다. 황혼이 기울 무렵, 산 그림자 내리는 들녘에 서면 슬프디 슬픈 보랏빛 향수에 싸여 신의 음성은 사랑하라고만 들려오고, 원수 같은 것 미움 같은 것에 멍든 자국마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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