갓 태어난 손녀는 첫 눈에 제 어미를 닮았다. 며칠 후에는 반드러운 얼굴선이며 아이한테서도 보이는 함초롬한 분위기가 제 외할머니까지 닮아있다. 외탁을 한 것이다. 솔직히 나는 흡족했다. 딱히 밉단 말을 들은 기억은 없지만 처진 눈, 툭진 볼 살, 짱구와 곱슬머리의 내 얼굴이 내 맘에 안 들었다. 거기다가 쓸데없이 튼튼한 다리통도 영 못마땅했다. 큰아들이 그만 나를 닮았다. 예닐곱 살이었나. 아들을 목욕시키던 남편이 너 꼭 엄마 닮았다고 하니 “아빠, 엄마 목욕시켜 봤어요?” 하더란다. 막연히 나와는 다른 생김새에 호감이 가곤 했다. 당연히 외까풀의 가늘가늘 초강초강한 며느리가 내 맘에 들었다. 못 본 사이 훌쩍 자란 손녀는 낯이 선 할머니 앞에서 잠시 쭈뼛거렸으나 이내 표정을 풀고 안겨왔다. 살빛 뽀얀 ..
회의실 분위기가 무거웠다. 떨어지는 매출에 대처하기 위해 긴급히 마련된 자리였다. 휴대폰 진동음이 울렸다. 막내아들의 전화였다. 평소 전화하는 일이 드물어서 다급하게 느껴졌다. 회의실을 나와 전화를 받았다. 최근에 취직한 곳에서 내일부터 출근하지 말라고 했다며 흥분하고 있었다. 밀린 급여도 받지 못했다고 했다. 당황스러움과 자괴감으로 어찌할 줄 몰라 하는 모습이 눈에 보이는 듯했다. 치미는 화를 누르고 회의가 끝나면 전화하겠다고 했다. 막내는 자기주장이 강했다. 대학 전공학과 선택도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했다. 종교학이다. 그때 아버지에게 들었던 말을 그대로 해주었다. 어떤 대학이든 상관없다. 그러나 전공은 평생을 가지고 가는 것이니 잘 판단하라고 했다. 종교학을 전공해서는 신자유주의가 큰 물줄기를 이루..
86,400원. 그것으로 하루를 산다. 엄마가 아버지하고 머리를 맞대고 궁리해서, 날마다 86,400원의 생활비를 받을 수 있는 종신보험을 들어 주었다. 그것으로 밥도 먹고 일도 하고 잠도 자고 피곤한 날은 차도 한 잔 하면서 하루를 보낸다. 때로는 쓴 곳도 기억나지 않는데 잔고가 바닥나 아쉬워하는 날도 있다. 필시 잔뜩 취해서 어디다 쓰는지도 모르고 신나게 흔들고 다닌 날이다. 모든 게 귀찮은 날은 온종일 이불 속에서 뒹굴며 날짜 지난 것들을 잔뜩 사 먹기도 한다. 그렇게 보낸 날은 배탈이 심하게 나서 치료하느라 며칠 동안 아까운 생활비만 날린다. 어리고 젊었을 때는 쓸 곳은 많은데, 하루치가 겨우 86,400원뿐이라고 투덜거리기도 했다. 하지만 다음날 0시가 되면 다시 채워지는 보험이어서 잔고가 바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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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이 봄 꽃잎들을 데려가 흙에 재운다. 더러는 바람을 기다리지 않고 스스로 흙과 포개지기도 한다. 꽃잎이 그들 삶의 끝을 바람에 맡길 때, 꽃잎은 생의 절정을 맞는다. 장엄하되 소란스럽지 않고 기시감旣視感이 들되 늘 새롭다. 바람에 꽃잎이 지는, 생애의 끝이 절정이라니 무슨 역설인가. 찬란한 꽃잎의 죽음 의식, 풍장風葬이다. 매화나 벚꽃은 생의 끝을 바람에 맡긴다. 가지에 붙어 있다가 자신의 몸에 남은 마지막 온기를 바람에 실려 흙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낙엽도 때가 되면 흙으로 돌아가지만 꽃잎의 처연한 느낌과는 사뭇 다르다. 꽃잎 곁을 스치는 요란스럽지 않은 바람소리는 차라리 처연한 만가輓歌로 들린다. 이 때 꽃잎은 데려가 줄 바람을 순하게 맞이한다. 순간의 이런 풍경의 끝은 여리고 애달프다. 이화梨花..
갈바람 말미에 선생의 육성이 들린다. 끝없이 울리는 소리에 눌리어 더 이상 발걸음을 떼지 못했다. 끊어질 듯 이어지는 목소리는 대하소설 『혼불』*의 모든 것이 저장되어 있는 공간을 채웠다. 잠깐 서성이는 동안 나의 심장이 빨라졌다. 전혀 생각지 못했던 『혼불』의 작가 최명희 선생의 생전 육성을 들었기 때문이다. 고요하게 퍼지는 선생의 메아리는 어쩌면 우리 모국어에 대한 신비한 비밀이 하나씩 벗겨지는 듯했다. 칼바람이 일어나는 한 겨울밤 걸음을 옮기며 한 줄의 글을 쓰기 위해 달이 기울도록 방문을 활짝 열어둔 선생의 모습을 떠올렸다. 처음 선생을 알게 된 것은 모 라디오방송국의 어떤 프로그램에서였다. 진행 중인 DJ는 그의 작품과 생애에 대해 이야기를 하였다. 만 17년간 오로지 대하소설 『혼불』에 온 정..
기억에서 지워진 이름인 줄 알았다.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목소리에 순간 멍해졌다. 억새만 서걱대던 마음 밭에 금세 봄풀이 산들댄다. 무서운 게 정이라 했던가. 애증도, 희비도 때로는 꼬이고 엇갈리는 게 인생사인가 보다. 어린 시절 네댓 살 위의 누나를 둔 친구가 둘 있었다. 두 처녀는 닮은 데가 많았다. 같은 또래로 맏딸에다 여고 졸업 후 가사를 돕기 위해 상급 학교 진학도 포기했다. 서로 라이벌 의식도 강했다. 소처럼 일했고, 동생들 공부도 가르쳤다. 친구가 부러웠다. 맏딸은 살림 밑천이란 말이 빈말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억척스러운 그들도 어느새 혼기가 찼다. 번듯한 신랑감을 놓고 경쟁을 벌였다. 어느 날, 중매쟁이가 A 처녀 집을 찾아 마을로 들어섰다. 그런데 어찌 된 영문인지 B 처녀 집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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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은사지 주차장에 왜소한 할머니 두 분이 앉아있다. 그을린 얼굴에 풋것을 뜯고 다듬느라 손톱 밑은 시퍼렇게 물이 들었다. 올망졸망 바구니에 담긴 것이라야 쑥 달래 머위 원추리가 있고 작은 유리병에는 누런 된장이 담겨있다. “나물 사 가이소”라는 할머니 말씀을 귓전에 얹고 폐사지를 둘러본다. 역병으로 찾는 발길이 뜸한데도 맥없이 손님을 기다리는 한 할머니가 서른여섯 해 전 이승의 끈을 놓으신 어머니로 겹쳐진다. 오래 길들어진 탓인지 된장을 유독 좋아한다. 그것도 어머니가 담았던 그런 된장이 입에 맞는다. 대가리와 똥을 떼어낸 다시 멸치 대여섯 마리에 어슥어슥한 썬 무, 청양고추, 대파에 된장 한 숟갈을 넣고 뚝배기에서 보글보글 끓여낸 된장찌개는 매끼 먹어도 질리지 않는다. 게다가 상추쌈이나 풋고추도 들척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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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면은 뜨거운 물을 만나자 일직선의 각진 표정을 풀어낸다. 앞다투어 구부러지며 곡선의 여유로움이 넘친다. 달라붙지 않게 연신 휘휘 저으며 동심원을 그린 후 얼른 찬물에 담근다. 흐르는 물에 두 손으로 면을 비비고 또 비빈다. 뿌연 물이 더는 나오지 않을 때까지 헹궜다가 건져 올린다. 한 손으로 국수를 사려 채반에 담는다. 동그랗게 말아 놓은 사리는 어느새 수분이 빠지고 말라간다. 투박한 면기에 사리를 얌전히 앉히고 팔팔 끓는 육수를 부었다가 따라내기를 반복한다. 물은 온 힘을 다하여 면 사이사이로 들어간다. 뭉쳐있던 면은 풀어지면서 국수 가닥이 탱글탱글하게 살아난다. 토렴 중이다. 집에서 잔치국수를 해 먹을 때는 고집스럽게 꼭 토렴한다. 서두르면 국숫발이 냄비 안으로 쏠리기가 일쑤다. 또한, 천천히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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