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은 새 옷 짓고 찬연하다. 연둣빛 생명들은 언어도 익히기 전에 들판으로 달려 나가 잎보다 먼저 꽃이 폭발한다고 소문을 냈다. 언 땅 뚫고 올라온 할미꽃이 둥글게 말린 허리를 편다. 한줌 햇살 머리에이고 언덕바지에 숨고르기 하려는 참인데, 바람이 분다. 굽은 허리 부러질라 납작 구푸린 머리가 흙속에 다시 묻힐까 엉덩이에 잔뜩 힘을 주었다. 엉덩이에 힘을 세게 줄수록 붉어지는 얼굴은 비단 꽃을 피웠다. 봄의 축제로 드높은 하늘에 풍선을 띄웠지만, 느닷없이 마음을 짓누르는 것들이 있다. 원인불명의 바람이다. 바람이 분다. 세상 센 바람이 분다. 주눅이든 생각들은 보이지 않는 철조망에 걸려서 갈기갈기 찢어진 마음들이 휴지조각으로 너풀대고. 고통으로 배여든 도시는 절규로 나뒹굴며 거리를 방황하던 슬픔들은 까무러..
딩동! 밤 9시다. 얼굴에 팩을 붙인 채 현관문 외시 경에 눈을 갖다 댄다. 모르는 얼굴이다. “누구세요?” “아랫집에서 왔는데요. 우리 집 천장에서 물이 새서요.” 다급한 내용에 벌컥 문을 연다. 두툼한 몸집의 여자가 집안으로 고개를 들이밀며 아래층부터 담아온 말을 콸콸 쏟아낸다. “저기요, 오늘 밤 물을 사용하지 않았으면 좋겠는데요.” “근데 혼자 사시죠?” 이 무슨 맥락 없는 질문인가. 마사지 팩을 뒤집어쓴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다. 이른 시간이다. 검은 박스를 든 남자와 플라스틱 양동이를 든 여인이 찬바람과 함께 문 앞에 서 있다. 수도 공사를 하러 온 아저씨와 보조로 따라온 그의 아내다. 아저씨가 둥근 헤드폰을 끼고 방바닥 가장자리를 훑는다. 정밀한 작업에 방해될까 뒤꿈치를 들고 베란다로 나오는..
대학 졸업 후 취업이 쉽지 않았다. 서울 맛을 본 뒤여서 다시 고향으로 내려가기는 싫었다. 비빌 언덕도 없으면서 오빠 집에 버티고 있었다. 그러던 중 친구가 평창에 영양사 서류를 내러 간다고 했다. 영양사 자리를 같이 알아보러 다니던 친구였다. 그때는 영양사를 채용하는 회사도 많지 않았고 자리가 있어도 알음알이로 들어갔다. 절실하다 보니 ‘영업사원’ 모집광고도 ‘영양사’로 읽히곤 했다. 여행 삼아 친구와 평창교육청으로 갔다. 담당자가 고성군에도 자리가 있는데 나도 자격증이 있느냐고 물었다. 외국 무상급식이 끝나고 우리나라가 자체적으로 학교급식을 시작한 80년대 초였다. 전국 도서 벽지에 500여 개 급식학교가 있었다. 그 중 강원도에만 100여 개가 있었는데 도내에 식품영양학과가 없어 영양사가 모두 외지..
처가가 농사짓는 시골이다. 몇 년 전까지 일 년에 예닐곱 번은 사역병으로 불리어 다녔다. 도시에서 자라고 생활하던 나는 농사철이 다가오면 입대를 기다리는 젊은이처럼 걱정과 두려움이 앞섰다. 맏사위의 체면을 지키기 위해 열심히 농사일을 거들지만, 일하는 요령이 없으니 힘은 힘대로 들고 결과도 시원찮아 눈치까지 보였다. 일을 잘하는 처남들과 동서를 보면 부럽기만 했다. 모내기와 타작, 지게질과 도리깨질, 삽질에서 곡괭이질까지 농사일을 안 해본 게 없을 정도다. 죽도록 일하고 돌아오면서 너무 힘든 나머지 아내에게 화를 내며 언짢은 말을 여러 번 했었다. 아내는 미안하다는 말을 계속했지만, 나는 ‘왜 하필 시골 출신 여자를 만나 결혼해서, 이 고생이야.’라고 생각하며, ‘애들은 시골에 본가가 있는 처자하고는 절..
새로 개봉한 바디샤워제의 향이 진하다. 달콤함이 농익은 향이다. 너무 진한 향이라 살짝 부담스러운데, 이 향기를 맡는 순간, 문득, 그리고 재빨리 어느 외국공항이 생각났다. 몇 번 가보지 않은 해외여행이고 그동안 까맣게 잊고 있었는데 왜 갑자기 그 날의 정경이 떠오르는 것일까. 이 향기가 무슨 기억의 창고를 여는 열쇠 쯤 된단 말인가. 향기는 친절하게도 나를 그 자리로 냉큼 날라다 놓은 것처럼 생생하게 장면이 펼쳐진다. 기내에서 필요한 슬리퍼나 목 베개 등속이 든 배낭을 메고, 귀에 딱지가 앉도록 주의를 받은, 행여 소매치기의 표적이 될세라 크로스백의 줄을 신경 써서 잡고, 공중화장실입구에서 친구를 기다리는 장면이 무슨 TV켜지듯 떠오른 것이다. 국제공항답게 세상의 여러 인종이 무수히 오간다. 여독에 지..
무등산 골짜기가 기지개를 켰다. 박새 울음소리 청아하다, 화답하듯 계곡 물소리는 청량하다. 봄을 알리는 소리에 잠을 깬 단아한 ‘얼음새꽃’이 분주하다. 눈밭 서릿발 사이를 뚫고 피어나는 꽃, 바로 복수초다. 복을 부르며 장수를 기원하는 복수초(福壽草). 꽃말은 “영원한 행복”이다. 서양에서는 애틋한 전설 때문인지 꽃말이 “슬픈 추억”이다. 그리스 신화에 의하면 미소년 아도니스가 산짐승에게 물려 죽어가면서 흘린 피가 진홍빛 꽃, 복수초가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땅의 여신 페르세포네가 죽어가는 아도니스를 살렸다. 그 후 제우스는 아도니스에게 그가 평소 사랑하던 미의 여신 아프로디테와 6개월은 지상에서 살게 하고 남은 반년은 페르세포네와 지하에서 생활하라고 명령하였다. 지금도 제우스의 말을 실천하듯 복수초는 ..
뽀득뽀득 눈을 밟고 온 택배 상자를 열었다. 마른 대추 한 봉지와 함께 잘게 잘린 나뭇가지가 한가득 담겨 있었다. 가을걷이를 끝낸 마른 고춧대다. 언니가 보낸 선물이다. 쓸모없는 고춧대를 왜 보냈을까. 궁금증 해결은 잠시 미뤄두고 무엇보다 고춧대를 보니 언니 오빠들과 다정했던 어린 시절이 생각난다. 우리 집은 꼭 휴일에 고추를 심었다. 호락질하시던 부모님의 일손을 돕는 날이면 한가하던 들판이 모처럼 분주해졌다. 도랑물 퍼 담는 소리, 종달새처럼 종종대는 발자국 소리, 숲속 바람까지 슬그머니 우리 곁으로 내려왔다. 밭이랑은 반짝이는 땀방울로 푸르게 메워졌고, 시들시들 눕던 고추 모종도 단물 한 모금에 화답하듯 화들짝 일어섰다. 고추를 다 심고 나면 오빠가 대장이 되어 작은 둠벙으로 먼저 들어갔다. 줄줄이 ..
지도에서도 꼭꼭 숨겨놓은 듯한 아주 작은 해수욕장 근처에 짐을 풀었다. 펜션 주인이 알려준 곳을 찾아 나선 골목길은 다시 찾기 어려운 미로 같았다. 아는 사람만 갈 수 있는 후미진 집이다. 문을 열고 들어설 때도 과연 음식 맛이 있을까 싶어 되돌아 나오고 싶을 정도였다. 손때 묻은 후줄근한 물건들이 하나둘씩 눈에 들어오면서 엉덩이가 쉽게 안착이 되지 않았다. 일어설 수도, 그대로 앉아 있기도 뭐해서 괜히 손바닥만 비비적거렸다. TV에서 흘러나오는 싱거운 뉴스가 간신히 시간을 넘겨주었다. 재깍거리며 넘어가는 시곗바늘을 흘낏거리던 시각이 후각으로 옮겨지며 칸막이도 없는 부엌 쪽에서 스며 나오는 간간한 냄새에 젖어 들었다. 초봄에나 맛볼 수 있는 도다리쑥국이란다. 찬 겨울을 이겨내기 위해 지방을 축적해둔 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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