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에서는 철 따라 다른 맛이 풍겨난다. 이른 봄에는 파릇한 쑥밭이 깔리는가 하면, 식욕을 잃은 늦봄에는 생강나무 꽃 냄새가 풍겨오기도 한다. 여름이 되면 잘 익은 도화가 혼을 빼놓고 가을바람이 차다 싶으면, 중앙절 국화 향기가 다시 그리워진다. 때맞추어 바뀌는 풍경에 넋 놓고 있노라면, 낙엽이 어깨를 툭 건드렸다가는 떨어진다. 세상의 모든 것이 늘 같지 않다. 움직이고 흔들린다. 계절의 순환도 마찬가지다. 봄이 소생의 시절이라면 여름은 성숙의 절정기이고 가을이 풍요의 시기라면 겨울은 인고의 고비에 해당한다. 사람에 비하면 생로병사이고, 나라에 비하면 흥망성쇠이고, 우주에 대비하면 카오스와 코스모스다. 사계가 그러할 진데 계절에 얹혀사는 만물이 어찌 변하지 않을 것인가? 요즘 나는 바다가 보인다싶으면 마..
자박자박 흙길을 걷는다. 또각또각 소리를 내는 아스팔트와 달리 발에 닿는 느낌부터가 부드럽다. 편리성에 익숙한 도시의 포장도로가 아닌 시골길이 비구름에 쌓여 운치를 더한다. 경계를 지으면서도 휘어져 도는 유유한 토석담이 고목을 끼고 마을을 잇는다. 산청 단성면 남사 예담촌. 가세를 짐작게 하는 고택의 기와 끝에 봄비가 떨어진다. 비에 젖어 더욱 검어진 기와색이 고색창연하다. 세력가의 집 앞에 심어졌다는 부부회화나무가 서로에게 기대어 바람의 성미를 아는 옛사람들의 지혜라는 듯 정갈한 대문 입구를 지키고 있다. 달빛 스며들었을 툇마루 빛바랜 창호가 유구하게 살아온 사람 이야기를 무언으로 전한다. 집은 한자로 집우宇 집주宙라 쓰고 두 글자를 합쳐 작은 우주라 한다. 집은 단순한 비바람을 막아내고 의식주를 영위..
도심 한복판 빌딩 숲 속에 의뭉스러운 카페 하나 성업 중이다. 지나는 사람마다 이면도로에 붙은 주택의 얼치기 변신에 고개를 갸우뚱거린다. “골이 빈 것 아니야? 이런 곳에 카페라니” 주인은 통 크게도 남쪽 벽을 깨서 통창을 냈다. 담장을 허물고, 골목 사이에 둔 앞집 담벼락에다 선사시대의 모습을 벽화로 그려 넣었다. 손바닥만 한 집이 훤해졌다. 늙은 무화과나무 한 그루뿐인 정원에다 거칠거칠한 송판으로 무릎 높이의 담장을 둘러 알록달록 페인트를 칠하고, 사립문이랍시고 야트막한 대문도 달았다. 살림집인 이층으로 오르는 계단마다 올려둔 화분에는 주인을 닮은 앙증맞은 꽃들이 색색으로 피었다. 온갖 정성으로 치장을 했어도 옛날 시골 장터를 찾아온 서커스단 어린 여배우의 서툰 분칠 같았다. 그런데도 넥타이 졸라매고..
큰애 친구 중에 한참 어린 동생을 둔 아이가 있다. 둘은 필시 그런 공통점으로 친해졌을 것이다. 여섯 살, 일곱 살 손위의 맏딸로 살아가는 공감대 같은 게 분명 있을 테니까. 주말에 둘이 함께 참여하기로 한 학교 행사의 세부 일정이 나왔는데 저녁 늦게야 끝나겠더란다. 우리 딸이 걱정 삼아 너무 늦는 거 아니냐고 말을 건네니 그 친구 답이 이렇게 돌아왔다. “난 좋아. 집에 있으면 동생 돌보기 힘든데 잘 됐지 뭐,” 아아, 장녀의 고단함이여, (참고로 우리 딸은 동생이랑 주말에 붙어 지내는 게 좋다고 말해서 엄마를 안심시켰다. 아아. 장녀의 이 후덕한 마음 씀이여.) 언니, 누나라는 말에는 엄마를 흉내 낸 넉넉함이 깃들어 있다. 편안한 의자를 닮은 글자 니은이 단어의 중심에 놓여 새되거나 거칠지 않고 부드..
주변은 관계의 망으로 엮여 있다. 사는 일은 거미줄처럼 연결된 망이 확장되거나 축소되는 현상의 연속인 것 같다. 한해를 닫으며 몇 개의 새로운 망이 형성되었다. 좀 더 장기적인 결속을 다져보자고 뜻을 합친 결과다. 굳이 이탈할 명분이 없을 때 발을 슬쩍 걸쳐놓게 된다. 연륜을 더할수록, 사회 활동의 반경이 넓어질수록 이 망의 폭도 비례하여 확장되는 걸 실감한다. 이 망에는 물리적, 심리적으로 가까운 사람만 있는 게 아니다. 썩 친숙하지 않다거나 거리를 두게 되는 사이도 함께한다. 마음이 편하게 기우는 곳이 있는가 하면 그렇지 않은 곳도 있다. 언제 보아도 격의 없이 반가운 사이가 있고, 만나는 횟수가 뜸해지며 시나브로 멀어지는 경우도 생긴다. 이는 자신이 소속된 망에 대한 애착 여부가 아닌, 구성원 간 ..
제12회 천강문학상 우수상 만灣 - 만나고 굽어지다 물마루가 밀려온다. 둥근 띠를 이루는 파도의 능선이 아래로 꺼졌다 위로 솟구친다. 바람을 따라 공중으로 물보라를 뿜어 올리다, 방파제에 부딪쳐 포말로 흩어지기도 한다. 사납게 내달리던 파도는 만灣으로 들어오자 언제 그랬냐는 듯 온순해진다. 파도는 과감하게 경계선을 넘어온다. 무방비로 서 있던 해안선은 뒷걸음치며 물러나지만 소용없다. 바다는 기어이 빈틈을 찾아내 자리를 만들어간다. 물굽이의 시작은 그랬을 것이다. 역동적인 바다는 제 몸피를 육지의 가슴속 깊이 밀어 넣었고, 망설이던 육지는 둥글게 몸을 말아 껴안았을 것이다. 만의 탄생이다. 어느새 훅 들어왔더라는 지인의 말처럼 그도 그렇게 내게로 왔다. 처음 만난 건 친구의 하숙집에서였다. 같은 학교 ..
회오리바람이 집을 에워싸는 듯하다. 강도 높은 바람 소리에 잠 못 이루는 밤이다. 내가 머무는 공간은 사계절 바람이 부는 바람골. 가는바람에서 된바람까지 바람의 종류를 셀 수가 없다. 더위가 여러 날 지속하더니 태풍을 부른 것인가. 태풍은 고온에서 일어난다고 하는데, 기상에 관하여 깊이 알고 싶은 생각은 없다. 다만, 바람의 제물이 될 나의 소중한 식물들을 단속하는 일이 중요하다. 아파트 복층에 머물며 겪은 산 경험으로 바람을 맞을 채비를 서둘러야만 한다. 나뭇잎은 나무의 소중한 일부분이다. 인간은 그저 봄바람에 현란할 정도로 눈부신 이파리의 몸짓과 오색으로 물든 고운 단풍잎을 기억한다. 살아보니 바람의 몸짓이 모두 좋은 것만은 아니다. 하늘이 노한 것처럼 시커먼 먹구름으로 뒤덮고 강한 번개와 태풍을 몰..
사과나무 포도나무가 실하게 영근 과일들을 하혈하듯 쏟아 내렸다. 다 털린 빈 몸으로 아랫도리를 휘둘리고 있었다. 짓밟힌 채마밭은 울고 있었다. 아무도 막을 수 없는 태풍의 공습이었다. 열대의 바다에서 태어난 루사는 잉태된 그 뜨거운 입김을 몰아 제주도의 목덜미를 핥고 정확히 한반도의 심장부를 뚫었다. 그녀가 지나간 자리에는 잔혹한 입김의 자취가 화인(火印)처럼 남았다. 그야말로 벼락같은 자연의 위력 앞에 손쓸 수 없는 한낱 인간의 허약함을 증명받고 싶었던 것일까? 독기를 품었으나 심중을 알 수 없는 여자처럼 그렇게 루사는 한반도를 관통했고 인간은 내장을 다친 어린 짐승처럼 신음했다. 이백 명이 넘는 사상자와 실종자, 그리고 수조 원의 재산 피해 앞에서 사람들은 저마다의 기막힘으로 오열했다. 하루아침에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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