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제1회 충무공 이순신호국문학상 수필 대상 아침 8시, 상쾌한 마음으로 드르륵 교무실 문을 열고 들어갔다. 먼저 온 선생님들과 간단한 아침 인사를 건네고 자리로 가 창문을 연다. 6월 초여름의 상쾌한 아침 공기가 기다렸다는 듯이 창문을 비집고 들어온다. 컴퓨터부터 켜고 커피를 타서 자리에 앉는다. 익숙한 커피 향이 머리를 깨워준다. 나름의 나만의 모닝 루틴으로 기분이 좋아져 콧노래를 부르며 시간표를 확인하는 순간, 하. 그대로 한숨이 나온다. 오늘 5반 수업이 들어있구나. 교직 생활 7년 차, 이제 몇몇 학생의 유형이 내 나름대로 정리가 되어 가는데 경준이는 그중 어려운 유형의 학생이다. 말하는 것을 좋아하고 공부에는 영 관심이 없는 아이. 선생님이 행여나 말을 끊을까 고등 래퍼에 나가도 될 정..
제1회 부산동래구 우하 박문하문학상 최우수상 가뭄이다. 비가 한두 번 오시기는 했는데 마른땅에 먼지만 폴삭 일다가 그친 정도였다. 텃밭에 물을 주면서 아내와 ‘이 물값이면 사 먹는 게 싸겠다.’는 소리를 여러 차례 했다. 물주기를 거르면 대번 표시가 났다. 오이, 호박잎이 축 늘어진다. 상추 잎도 처져 버린다. 채소뿐이 아니다. 꽃들도 볼품이 없기는 한 가지였다. 나무들도 덩치만 컸지 따로 물을 저장하지 않는지 잎을 축 늘어뜨리기는 마찬가지다. 집 울타리 안에서 자라고 자손 퍼뜨리며 살아가는 것들을 모른 체할 수는 없다. 다 귀한 생명이다. 집에 기생하는 것이 아니고 함께 살아가는 동반자다. 그러니 목마른 녀석들에게 물을 주는 건 식구 끼니 챙기는 것과 똑같은 일이다. 아침마다 눈 뜨면 마당으로 나간다...
놈은 오랜 시간 내 안에 기거했다. 나는 녀석에게 들어와 살라고 말한 적 없다. 진즉에 쫓아내지 못한 건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눈치 채지 못할 만큼 작은 알갱이로 내 팔뚝에 똬리를 틀었던 까닭이다. 어느 날 문득 도드라진 무언가가 그다지 민감하지 않은 내 눈에 띄었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눈길조차 피하고 무심한 척 버려두면 물사마귀처럼 사라질 줄 알았다. 녀석은 집세도 안 내고 덥석 들어앉았지만 나쁜 놈은 아닌 것 같았다. 남의 살에 침범했는데도 통증이란 걸 데리고 있지 않았다. 그만하면 그리 미울 것도 없었다. 병원 가는 일이 죽기보다 귀찮은 맘도 한몫했다. 동거를 허락하기로 했다. 주인의 마음을 읽었으면 녀석도 납작 엎드려 있어야 했다. 하지만 눈치도 없이 야금야금 제 몸뚱일 키워갔다. 부랴부랴 ..
제3회 순수필문학상 수상 씨 마늘이 발을 내렸다. 파종 전에 하룻밤 침지를 했더니 밑둥치에 하얀 실밥 같은 뿌리를 내민 것이다. 왕성한 생명의 피돌기를 눈으로 확인하는 기분이었다. 뿌리가 정靜이라면 발은 동動이다. 끝내 한 자리만 파고드는 것이 뿌리의 속성이라면, 끊임없이 앉은자리를 박차게 만드는 도구가 발인 까닭이다. 부지런히 걷고 뛰어야만 겨울이라는 냉혹한 계절의 마수를 벗어날 수 있다는 다그침 같은 것일까. 사람들은 마늘에 뿌리가 아닌 발을 달아주기로 했는가 보다. 나도 그들을 흉내 내며 마늘이 내민 뿌리를 발이라 읽는 중이다. 늦은 오후의 햇살을 등지고 발이 난 마늘을 꾹꾹 눌러 심는다. 얼었다 녹았다, 비록 월동의 가풀막이 험난하다 하여도 발의 투지가 저리 다부지니 옹골찬 봄을 의심할 수는 없겠..
이어폰, 귀는 열리고 입은 닫히는 순간 여기가 좋다. 안도 밖도 아닌. 두 개인 것이 좋다. 귀가 두 개인 것과는 무관하게. 밖에서 보자면 양쪽 귀를 막는 것이고, 안에서 보자면 어떤 세계가 계속 도착하는 것. 입이 아닌 귀에 관여하는 것이 마음에 든다. 입은 너무 많이 말한다. 누군가를 만났을 때 입을 다물고 있으면, 미소를 짓고 있다 해도 왜 말은 하지 않고 웃고만 있느냐고 한다. 입은 말을 하는 기관이기도 하지만 침묵의 기관이기도 한데 말이다. 누군가의 말이 들리기 시작할 때 우리는 비로소 입을 닫는다. 세계는, 입은 닫히고 귀가 열릴 때 시작되는 곳은 아닐까. 입이 닫히면 귀가 열리고, 귀가 열리면 눈도 열린다. 비로소 들리고 보인다. 적어도 나는 그렇다. 귀에 대해 자주 생각한다. 귀는 웅크리고..
사람들이 끊임없이 오고 간다. 새로운 사람들이 몰려왔다가 떠나간다. 하루에도 수십 번씩 만나고 헤어짐을 반복한다. 만남과 헤어짐 중간에 목포항이 있다. 바다와 육지, 두 개의 맥박이 선명하게 뛰는 해안 도시다. 노령산맥을 끼고 다도해를 연결하는 해상로 관문이다. 삼학도를 막아 개펄 위에 세워졌다. 개찰구에서 배로 올라가는 길이 바다로 빨려 들어가는 듯하다. 지나간 시절의 우아함을 간직하고 있는 나이 든 귀부인같이. 인간들이 무심코 던진 삶의 오물과 욕망의 쓰레기를 어쩔 수 없이 삼켰다. 그래도 견딜 만할 터이다. 광활한 서남해로 나아가 둥둥 떠다닐 수 있으니까. 모든 것을 받아 품어주고 삭혀주는 그 품은 속됨으로 성스러운 천혜의 항구다. 목포항의 아침은 안개로 시작한다. 매서운 찬 공기가 바다에 내려앉으..
2012 경남신문 신춘문예 당선작 머리를 빗질하는 시간은 마음을 다독이는 순간이기도 하다. 빗은 여인의 모습을 더 선명히 드러나게 한다. 머리를 빗질하면서 삶의 궤적과 사랑의 세월을 들여다본다. 빗은 추억과 회한과 그리움을 빗어내는 조그만 현악기처럼 보인다. 빗을 샀다. 화장대 한쪽에 딱히 이유도 없이 사들인 빗들이 풀꽃처럼 빽빽이 통에 꽂혀 있다. 빗살이 논의 벼 포기처럼 촘촘히 붙어 있다. 하나이면서 여럿이고, 여럿이면서 하나이다. 빗은 각 시대 생활양식에 따라 여러 가지 형태로 만들어진다. 최근에 와서 인체 공학과 재료 공학의 발달은 빗에 큰 영향을 주었다. 두피를 부드럽게 다독이는 넓적한 쿠션 빗을 비롯하여 생머리 구부리는 드라이용, 긴 머리 다듬는 일자형 빗, 짧은 머리에 꼬리 빗, 웨이브를 살..
그와의 작별은 예견된 것이다. 그의 소리는 나지막한 허명으로 다가왔었다. 한 계절이 익어갈 무렵, “지금도 기억하고 있어요 시월의 마지막 밤을.” 이라고 읊조리던 사람들 마음 바닥에서부터 배경 음악처럼 깔려 있었다. 그가 오는 소리는 곱디고운 단풍이 생의 마지막 절정을 불태우던 가을 나무속에도 있었고, 끝물을 날려 보낸 잎새들이 바람에 공중그네를 타며 낙하하던 순간에도 엎드려 있었다. 마른 낙엽으로 구르던 어느 길모퉁이에도 스며 있었다. 그렇게 가만가만 우리 곁으로 왔었다. 그의 존재란 많은 의미를 함유한다. 시도 때도 모호하여 시작도 끝도 없던 순간에 시간의 마디를 만들고, 계절을 나누고, 해를 구분한 끝자락마다 매듭을 만들고, 계절을 나누고, 해를 구분한 끝자락마다 매듭을 짓듯 세워 둔 그 한 해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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