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회 동서문학상 금상 가을장마인가 보다. 잠깐 해가 비추더니 금세 퉁퉁 부은 하늘에서 횃대비가 쏟아지고는 하다가 유리알처럼 투명한 하늘이 열렸다. 그 동안 궂은 날씨로 볕을 보지 못한 이불은 습기가 차고 쾨쾨한 냄새가 났다. 문득 이불에서 나는 햇살 냄새가 그리웠다. 여름의 흔적을 털어내기 위해 가을바람이라도 쐬어야겠다. 어스름 땅거미가 내릴 쯤, 이불 걷는 시간은 가장 행복한 시간이다. 하루 종일 낮볕이 다듬이질한 이불에서 폴폴 날리는 햇볕 냄새와 손바닥을 간질이는 그 따스함이 온몸으로 전해질 때, 하루의 피로가 흔적 없이 사라지고 만다. 오랜만에 여기저기 땀이 밴 속옷과 여름살이 흰옷을 모아 찜통에 넣고 푹푹 삶았다. 밥을 짓는 소시랑게처럼 북적거리던 거품이 이내 찜통 밖으로 울컥 끓어 넘쳤다. ..
제10회 동서문학상 은상 거울 앞에서 빗질을 한다. 처음에는 대담하고 큰 동작으로, 그 다음에는 작고 세밀한 손질로 머리를 빗는다. 유난히 숱이 많고 긴 탓인지 아무리 다듬어도 이내 헝클어지고 만다. 여러 번의 쓰다듬 끝에 깔끔한 정도는 아니지만 남들 눈에 지저분하지 않을 만큼 가지런한 모습이 되어간다. 참빗으로 골이 생기지 않게 촘촘히 쓸어내려진 머리카락이 피부에 닿는 것을 느끼며 얼굴 주위를 감싼다. 그 흑단의 물결 속에 두 눈을 담그면 검은 머리칼은 큰 파도가 되어 살아있는 내 주위의 모든 의식을 움켜쥔다. 곱슬곱슬한 머리, 구불구불한 머리, 삐죽삐죽 세운 머리, 땋아 늘인 머리, 손바닥처럼 매끄러운 민머리... 출렁이는 바다 안에 그 길이와 올의 굵기에 따라 다양한 형태와 모양이 만들어지는 컴컴한..
제10회 동서문학상 은상 “동네입구 가게 처마 밑에서 공기놀이 하던게 나는 제일 생각나. 그 시절로 돌아가고 싶다.” 동창모임에 간 날, 먹때왈이란 별명을 가졌던 친구가 눈을 반짝거리며 말했다. 먹때왈은 여름에 밭에서 많이 볼 수 있던 까만색 앙증맞은 열매로 까마중의 사투리다. 눈동자가 새카맣고 야무졌던 친구를 동네 사람들은 먹때왈이라 불렀는데 그 친구는 유난히 고향에 대한 정이 깊었다. 처마란 말 때문이었을까. 공기놀이란 말 때문이었을까. 여섯 명 친구들의 표정도 어느새 유년으로 돌아간 듯 얼굴마다 그리움이 가득 번져나고 있었다. “맞아. 가게 집 처마 밑에 어지간히 들락거렸지. 학교 끝나면 와르르 몰려가서 공기놀이 하고 핀 따먹기 하고 놀았던 걸 어떻게 잊겠어.” “그 뿐이야. 갑자기 비가 오면 가장..
제10회 동서문학상 동상 현관 계단 끝에 검정 봉지 하나가 놓여 있다. 봉지에는 이름도 성도 없지만 나는 누가 갖다 놓았는지 알 수 있다. 안에 담긴 것도 반갑지만 봉지 주인의 안녕을 확인했기에 마음이 놓인다. 우리는 이렇게 봉지로 서로의 안부를 전하고 마음을 읽는다. 봉지 안에는 봄빛을 겨우 받은 어린 쑥이 한 줌이다. 옆에는 깨끗이 다듬은 달래 한 움큼이 곁들여져 있다. 그대로 냄비에 들이기 좋을 만큼 단정한 모습이다. 봄이라 향기 머금은 그것들을 애써 장만하신 마음이 그대로 느껴진다. 우리 집에서 보면 어머니가 사시는 마당이 보인다. 지척이라도 문 꼭꼭 닫고 들어앉으면 백리도 넘는 거리다. 어머니가 홀로 계시는 마당을 내다보며 밤새 걱정이고 궁금하다. 이렇게 다녀가신 흔적을 봐야 마음 귀퉁이 짐을 ..
제10회 동서문학상 동상 옹기 일가족이 베란다에 오종종 앉아 해바라기를 하고 있다. 쌀이며 고추장을 담은 크고 작은 배불뚝이들이 반가운 얼굴로 나를 맞는다. 요즘엔 플라스틱, 스테인 그릇들이 대량으로 생산되어 옹기의 기능을 대신하고 있지만 그것들엔 물질문명을 지향하는 획일성만 있어 좀체 정이 가지 않는다. 그에 비해 옹기는 무뚝뚝하지만 언제나 따뜻한 흙의 질감을 느낄 수 있어 볼수록 친근감이 더해지는 것이다. 옹기는 질그릇과 오지그릇을 아울러 말한다. 질그릇은 오지잿물을 덮지 아니하고 진흙만으로 구워 만든 것이고 오지그릇은 붉은 진흙으로 만들어 볕에 말리거나 약간 구운 위에 오짓물을 입힌 것이다. 삼국시대부터 만들어진 옹기는 주 부식을 저장하거나 고추장 된장 등 양념이나 주류를 발효시키는 용구로 사용되었..
제10회 동서문학상 동상 산화된 세월을 건드리면 기억이 환원된다. 습기제거제를 넣으려고 옷장을 뒤적거렸다. 차곡차곡 놓인 옷들의 맨 아래 종이뭉치 하나가 보인다. 제법 도톰하고 길쭉하다. 겉포장을 벗겨 펼치니 수년이 지난 신문의 날짜가 눈에 들어온다. 내용물의 지난 세월을 말해 주고 있었다. 뽀얀 한지로 된 속포장지를 보고서야 외할머니의 유품이라는 것을 알았다. 내 유년의 기억을 고스란히 떠올릴 수 있는 할머니의 은비녀다. 오랜 세월에 은비녀의 색은 변했지만 할머니의 기억은 오히려 또렷하게 다가온다. 푸르스름한 여명의 시각, 할머니는 방바닥에 신문지를 펼쳐놓고 긴 머리를 풀어 동백기름을 발랐다. 가르마를 반듯하게 타서 한 올의 흐트러짐 없이 참빗으로 싹싹 빗어 내리고, 쫑쫑 땋아서 말아 올린 후 쪽을 쪘..
제9회 동서문학상 은상 중국 교환학생 자격으로 유학길에 오르기를 이틀 전이었다, 아버지께서 갑자기 따라 나오라고 하더니 길가에 있는 커다란 금은방으로 나를 데리고 갔다. 나는 아버지를 멀뚱멀뚱 쳐다보았다, 아버지는 주인에게 금반지를 보여 달라고 하셨다, 아기 돌 반지를 보여줄 거냐고 묻는 금은방 주인에게 아버지는 나를 바라보면서 자랑스럽다는 듯 힘 있는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 딸내미가 유학을 가는데 반지 하나 해주려고요.” 나는 둥그레진 눈으로 아버지를 올려다보았다, 머리 굵어진 이후로 아버지와 쇼핑을 해본적이 없었던 나는 내게 선물을 주려는 아버지의 행동에 놀랐고, 그 선물이 금반지라는 것에 또 놀랐던 것이다. 이런 황당한 마음을 추스르기도 전에 주인아저씨는 어디로 유학을 가느냐고 물었다, 아버지는 ..
제9회 동서문학상 은상 크고 작은 서랍 속은 우리들의 내밀한 이야기들이 술렁거리는 공간이기도 하다. 그 서랍 속엔 꽁꽁 입구를 봉해놓은 삶의 씨앗봉투, 미처 볶지 못한 연한베이지색의 커피, 세상을 향해 쏘아 올리지 못한 작은 공, 다리가 부러진 안경, 고장 난 손목시계가 차곡차곡 넣어졌다. 때론 보는 것이 보이는 것의 전부였고 만지는 것이 만져지는 것의 전부일 때도 있었다. 하지만 입방체의 그 수많은 서랍이란 공간 속에 정작 내가 간직하고 싶은 것들은 자리를 잃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장롱 속엔 몇 번 입지 않은 또한 앞으로도 입을 것 같지 않은 내의와 철 지난 옷가지들로 가득 찼다. 이토록 잘 짜여진 수납 공간 속엔 크고 작은 물건들이 용도에 상관없이 뒤 섞여 있을 뿐이다. 이렇게 마구잡이로 뒤섞여 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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