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막의 한쪽을 깨며 신호가 왔다. 소통 부재의 장막을 걷어 올리라는 듯 애타게 부르며 숨넘어가는 '카톡카톡'. 그 성마른 기계음에 이끌린 여자가 더듬더듬, 스마트폰 창을 연다. 색깔 찬연한 영상이 깔리면서 세상 이야기들이 쏟아진다. 금방 풀어놓은 화제로 찧고 까불고 와그르르 끓어 넘친다. 소리에도 열기가 있다. 잠시 듣고 보다가 뒤 베란다 보조주방에 얹힌 '노래하는 주전자'가 떠올랐다. "그래! 뭐든 펄펄 끓여보자." 청청한 오월에, 하필이면 감기에 사로잡힌 일주일째다. 몸속을 휘돌아 나오는 바람이 바깥 냉기보다 더으슬으슬한 만큼 마음도 아슬아슬한 지대에 있다. 누가 다정한 온도로 말을 건다면 눌러둔 감정들이 틈새 빗물 새듯 줄줄 흘러나올 것 같고, 또 누군가 신경 줄을 긁으면 다시는 그 사람 안 볼 것..
이만한 영광이 없다. 향긋한 화장에 외출복을 차려입은 주인이 머리 위로 정중히 모셔주니 세상이 내려다보인다. 폼 나게 길거리에 나서면 휘파람이라도 불고 싶다. 멋지다고 찬사를 보내는 사람들의 눈길을 거느릴 땐 주인보다 더 으쓱해져 신바람이 난다. 내 본분은 주인의 외출 길에 패션으로 동행하는 일, 문제라면 ‘어떻게 제자리를 잘 지키느냐’가 될 것이다. 종종 현기증이 나기는 한다. 머리에 얹혀있다 보면 머리카락 냄새에서 벗어나고픈 순간도 있다. 그러다가 낯선 바람이 휘익 불어올라치면 행여 끌려갈까 또 안간힘을 쓴다. 까딱 잘못하다간 허공으로 날아가 바닥으로 내리 박히는 낭패를 당할 수 있으므로 긴장의 끈을 놓지 말아야 한다. 굴곡 없고 희비가 섞이지 않는 삶은 없는 법, 체통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가볍게 나..
알파벳 'N'의 전성시대다. 영어 약자 N은 품사 중에서 명사를, 원소기호에서 질소를, 의학 관련 용어에서 신경을, 자동차 기어에서 중립을, 방위 표시에서 북쪽을, 설문지 'Y/N'에서 'No'를 나타내는 의미로 사용된다. N이 우리에게 익숙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수학 시간의 힘들었던 추억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 ∑ √ lim log를 사용한 방정식과 함수에 부정不定정수 'n'이 따라다녔다. 부정 정수는 정해진 숫자 없이 환경에 따라 값이 변하는 수를 말한다. 최근에 많이 사용하는 용어 중 n수생, n포세대, 코로나19n차 감염, 성범죄사건 텔레그램 n번방, 등에 나오는 n도 같은 의미이다. 직장인들에게 N은 더욱 친숙한 용어다. 동료들과 식사나 술좌석을 끝낸 후, 비용을 각자 분담하는 '1/N' 방식을..
아버지가 환갑 이듬해에 돌아가셨다. 나도 아버지 나이쯤에 세상을 떠날 거라고 마흔 중반부터 생각했으나 덤으로 몇 년을 더 살고 있다. 언론 매체에서 백 세 장수가 일반화된 ‘호모 헌드레드(Homo-hundred)’시대라고 떠드니 최소한 20년 정도는 더 살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와 걱정이 교차한다. 집에서 가까운 거리에 수영사적공원과 팔도시장이 있다. 사람 구경도 하고 바람도 쐴 겸해서 가끔 간다. 공원에 갈 때마다 수십 명의 노인이 바둑이나 장기를 두면서 여가를 보내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바둑 두는 것을 한참 구경하고 있으면 옆에 있던 어르신이 “어이, 젊은이! 내기 바둑 한판 둘까?”라고 말을 건넨다. 나는 손사래를 치며 얼른 시장통으로 발걸음을 돌린다. 단골 반찬가게 50대 아주머니는 나를 보..
친구들과 야유회를 가는 날이다. 새벽에 눈을 떠 목적지 날씨부터 확인하니 낮에 비 올 확률이 70%라고 예보되어 있다. 바깥에 나갈 때 비가 오면 불편하다는 걱정과 괜찮을 거라는 기대가 엇갈린다. 어쨌든 서둘러야 한다. 나들이옷과 신발을 준비해놓고 갈아입을 속옷을 챙긴다. 잠을 자고 일어나면 어디든 가야 할 곳이 있어야 한다. 갈 곳이 없어 집에만 머물러야 한다면 자신을 어둠 속에 가두는 일과 크게 다르지 않다. 학생은 학교에, 직장인은 회사에, 농부는 들판으로 나가야 하루가 즐겁다. 집을 나서기 전 몸과 마음을 정갈히 하고 크고 작은 준비물을 잘 챙겨야 외출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다. 외출은 더 큰 세상으로 나아가기 위한 디딤돌이다. 외출할 때마다 샤워한다. 아무리 바빠도, 밥은 안 먹어도 샤워를 꼭 ..
2021년 신라문학 대상 지게를 멘 토우가 뚜벅뚜벅 걸어온다. 등 뒤엔 커다란 항아리가 얹혀 있다. 둥글게 흘러내리는 얼굴엔 슬쩍 엷은 미소가 번진다. 팔을 뻗고 무릎을 약간 굽힌 채 힘차게 걷는 모습이 이제 막 집으로 돌아오는 아버지 같다. 용강동 고분에서 발견된 통일신라시대 토우 중 ‘지게를 진 인물상’이다. 지게를 등에 지고 다닐 수 있도록 하는 어깨끈이 밀삐다. 평형수가 선박의 균형을 유지하듯 지게가 흔들리지 않게 잡아주고 무게를 지탱해주는 역할을 한다. 잘려 나간 토우의 왼쪽 팔은 필시 밀삐를 단단히 움켜쥐었으리라. 시골의 삶은 다들 척박했다. 논밭이 적었고 그마저 땅 힘이 약해 많은 사람이 풀뿌리죽으로 끼니를 때웠다. 더벅머리 같은 초가지붕 아래 아이들은 왜 그리 줄줄이 많은지. 뉘 집 할 것..
비닐하우스 위로 운석이 떨어졌다. 장갑을 낀 지질학자 몇이 수상한 돌덩이를 조심스레 거둬 갔다. 극지연구소의 분석 결과 그날 진주에 떨어진 두 개의 암석은 별에서 온 게 확실하다 했다. '별에서 온 그대'는 하늘의 로또라, 부르는 게 값일 만큼 귀하신 몸이어서 뉴스를 접한 사람들마다 자다가 떡 얻어먹은 하우스 주인을 대박이 터졌다며 부러워했다. 올여름, 나도 대박을 터트렸다. 내 집에도 별 그대가 당도한 것이다. 친견 일자를 통보받고부터 내도록 가슴을 설레며 기다렸다. 어느 별에선가 성운에선가 새로 출시되어 배송되어 온 특허품은 엄정하게 말하면 '메이드 인 헤븐' OEM인 셈이다. 3년 전쯤 지구별 모퉁이에 M&A로 설립된 합작공장에서 처녀 생산된 하청품인 바, 식구들 모두 진귀한 신상품을 완상 하느라 ..
동갑내기 친구 몇이 자신들을 '지공거사'라 부른다 했다. '지하철 공짜로 타는 백수 남자'란 뜻이다. 무임승차가 겸연쩍은 어떤 노인이 만들어 낸 것 같다. 우습기도 하지만 조금 서글프기도 한 별명이다. 무임승차가 부끄럽지만 그래도 자존심은 남아 있어서 '건달'이라 하지 않고 '거사'라 한 것 같다. 어쨌든 나도 지공거사가 된 지 15년이 넘었다. 70살까지는 공짜 표 받기가 쑥스러워 돈을 내고 타는 일이 많았지만, 경로카드가 나온 후부터는 후안무치가 되고 말았다. 10여 년이나 공짜로 타다 보니 이런저런 버릇도 생기고 나름대로 행동수칙도 갖게 되었다. 언제부턴지는 모르겠으나 나는 두 가지 지하철 승차수칙을 지키기로 했다. 경로석 구역을 벗어나지 않는다는 것과 자리에 앉지 않고 서 있다는 것이다. 첫째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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