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회 동서문학상 동상 눈이 펑펑 내리고 있었다. 주먹만한 눈송이가 함성처럼 쏟아져 내렸다. 어린 나는 쪽창에 얼굴을 대고 내리는 눈을 바라보다 더는 참지 못하고 방문을 열고 나왔다. 차게 굳은 마루에도 습자지처럼 눈송이가 덮였다. 한 발 디디자 마당을 향한 작고 선명한 자국이 생겼다. 양말을 털고 새로 산 털신을 신었다. 성근 측백나무 울타리에 몰아치던 눈바람은 나뭇가지마다 눈꽃을 피우고 넓은 마당에는 두터운 솜이불을 깔아놓았다. 아무도 밟지 않은 눈 위로 발을 디뎠다. 뚜렷한 지그재그 문양이 고대문자처럼 떠올랐다. 강아지처럼 깡충깡충 뛰어 눈그림을 그렸다. 눈송이는 발자국 아래서 아프게 눌리고 쉽게 뜯어지지 않을 흰 판자처럼 다져졌다. 긴 발자국을 내며 대문간으로 나갔다. 대문간에 서서 마을을 바라보..
제9회 동서문학상 동상 비단이 곱게 깔린 돌상이 차려졌다. 굵은 붓글씨로 ‘첫돌’이라고 쓰인 휘장이 천장에서 바닥으로 길게 내려졌다. 그 앞에 색동 한복과 전통식 호건까지 갖춘 한 살배기를 앉혀 놓으니 모든 것이 한가지인 것처럼 잘 어울렸다. 한 살배기가 활짝 웃었다. 사랑스런 모습에 여기저기서 가족과 친지들의 탄성이 터져 나왔다. 내 직업은 파티 플래너이다. 나는 나이 마흔이 되어서야 파티 플래너가 되었다. 고객이 의뢰한 파티를 기획하고 연출하는 일을 총괄하는 파티 플래너가 된 내 모습을 상상한 적이 없었다. 최소한 서른아홉 살까지는 그랬다. 나는 이렇듯 우연한 기회에 파티 플래너가 되었다. 파티 플래너로 일 해온 지 이제 일 년 남짓 되었다. 나는 우리 고유의 전통 비단과 예스러운 장식을 이용한 파티..
제9회 동서문학상 동상 초상화를 그려주는 세탁소 오늘도 그 세탁소는 문이 굳게 닫혀 있었다. 벌써 보름째다. 며칠 전에 문 앞에 써 붙인 옷 찾아가실 분 연락주세요 000-000-0000 라는 흰 종이만이 찢긴 채 매달려 있을 뿐이었다. 나와 이 세탁소의 인연은 5년 전쯤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때는 지금 살고 있는 아파트에 입주를 하고 남편의 옷을 맡길 세탁소를 찾던 중 외진 골목이지만 그럭저럭 집과 가까운 곳이기에 선택한 것이다. 남편의 양복바지 두어 벌을 들고 처음 그 집에 들어섰을 때 주인아주머니는 커튼으로 드리워진 내실에서 이제 막 낮잠에서 깨어난 듯 부스스한 얼굴로 내게 다가 왔다. "네. 어서 오세요. 옷 맡기시려고요? 드라이요?" 마땅한 대답을 하기도 전에 그 아주머니는 내 손에 들 바지를..
어제 나는 죽었다. 전원이 꺼져있었다. 오로지 하루만 기능하며 설치되고 삭제된다. 매일 화면에 떴다가 사라지곤 한다. 내 인격은 날마다 모양을 바꾼다. 그날 만난 사람들과 장소에 어울리는 코드를 택하여 조합되고 개발되며, 고쳐져 삶을 주무른다. 종일 가면일 때도 있고, 베일일 때도 있으며, 민낯일 때도 있다. 다름은 외형을 바꾸어 드러나지만, 드러나지 않는 내면의 장치들은 계속 에러 신호를 보낸다. 자신이 주인공이 되는 이기적인 삶은 누구나 살기에 편리하다. 그러나 편리함에 쉽게 현혹되지 못하고 불편함을 뒤척인다. 끝없이 편리한 자유에 경계를 그어가는 이타적 삶을 택한다. 그 버팀은, 자기 최면이다. 그것은 어쩌면 간단하다. 자기를 감추고 숨는 것이다. 비공개 설정이다. 내면의 텍스트는 변질되기도 하고,..
2021년 제11회 천강문학상 대상 작은 것이라도 매듭이 생긴 부분은 바늘귀에 걸린다. 풀어내지 않고는 들어갈 수 없다. 바늘이 담쟁이 이파리 윤곽선을 바삐 들락거린다. 왕복주행 하던 실이 덜컥 멈춘다. 교통이 원활하다 싶었는데 어느 지점부터 실이 제자리에서 꼼짝하지 않는다. 교차로의 교통 체증이다. 바늘이 작은데다 땀이 너무 촘촘했는지 좌회전하려던 실과 우회전하려던 실이 만나 엉켰다. 접촉사고다. 결국 멀쩡한 앞 실까지 잘라내고 바늘귀에 새 실을 넣는다. 감정에도 때로 풀리지 않는 미세한 엉킴이 생길 때가 있다. 좁은 면에 실을 채우는 데도 변수가 생겨 시비가 엇갈리니 몇 번 끊어진 실을 이어 바꾸고 바느질을 한다. 빨강색만 눈에 띄던 날들이 있었다. 빨강색을 보면 설레고 흥분되었다. 인터넷 검색 창에..
갈팡질팡하다. 알 수 없는 바람이 불어온다. 보이는 모든 것들이 흔들린다. 거세게 부는 바람 속으로 어디든지 가고 싶다. 늘 허기진 사람처럼 마음속에 바람이 불 때면 커다란 돌 하나가 가슴에서 뜨겁게 데워진다. 환하게 웃고 있다. 옆에 있는 친구들은 잔뜩 겁이 나 있는 얼굴이다. 사진에서 유독 한 아이만이 하마 입처럼 터질 듯 한 입 모양새다. 어디 그뿐이랴. 아이가 입은 바지는 무릎 부분이 반질반질하여 구멍이 나 있다. 구멍 난 곳에 손가락으로 자꾸 질려서 더 크게 만든 모양이다. 장난기가 많은 개구쟁이처럼 비실비실 웃는데 귀엽다. 동네에서 잔치가 있는 날은 아이들이 배불리 먹을 수 있었다. 지글지글 전을 부치면 그곳에 둘러앉아 음식을 먹었다. 그날은 술이 빠지지 않는다. 아이는 술독 옆에 앉아서 심부..
2021 스틸 에세이 동상 작고 앙증스러운 모양이 한 손안에 쏙 들어온다. 세월의 때가 묻었다. 장인이 수없이 두들겨 만들어낸 고운 결은 시간 속에서도 그대로다. 나비 모양 무쇠공이가 가만히 흔들린다. 바람결에 깊은 여운을 담은 소리를 금방이라도 들려줄 것 같다. 어릴 적 우리 집 대문에는 자그마한 종이 매달려 있었다. 어느 해 할머니가 메어 놓은 후부터 청아한 소리가 나기 시작했던 것 같다. 할머니는 그것이 질병이나 액운을 막아주는 역할을 해주는 것이라고 믿고 계셨다. 마치 고목에 정령이 깃들어 있는 것처럼 종에도 혼이 깃들어 있다고 말씀하셨다. 할머니의 주술적인 믿음을 담은 종은 늘 그 자리를 지키며 우리와 함께했다. 어린 나는 그 소리가 참 좋았다. 종소리가 들려올 때마다 우리 집에는 좋은 일만 생..
제10회 경주문학상 뒤축 닳은 시간들이 가지런하다. 오십 년은 족히 되었을 신발들이 늙은 병사들처럼 사열해 있다. 발목이 긴 군화도 있고 경찰 단화도 여러 켤레다. 그중에서도 신문지를 푸지게 먹고 배가 볼록한 검정 구두가 제일 상석이다. 마지막 외출이 언제 적이었던가. 먼지에 거미줄까지 잔뜩 뒤집어쓰고 식리처럼 다락에 박제되어 있다. 식리(植履)는 장례에 쓰는 장식용 신발이다. 삼국시대 고분인 왕릉에서 주로 출토된다. 경주 대릉원 천마총은 신라시대 왕릉으로 추정되는 돌무지덧널무덤으로 금관, 금제관모, 금제과대 등 국보급 유물이 발굴되었다. 석담을 돌려 시신을 안치한 목관과 상면 공간에 부장품인 껴묻거리가 진열되어있다. 생전에 쓰던 물건을 고인의 시신과 함께 수장했는데 그중에는 금동판에 정교하게 무늬가 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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