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층 아주머니가 이사 갔다. 나는 곧 뜰의 배경을 바꾸듯 새 손님맞이 할 준비를 했다. 오래된 난방 배관을 촘촘하게 깔고, 외풍을 막으려 벽에 석고보드도 댔다. 기름보일러를 가스보일러로 바꾸고, 도배도 새로 하고 장판도 깔았다. 여러 부동산에 세를 내놓으며 조용한 사람을 부탁했다. 육십 대 부부가 와서 집을 둘러보았다. 그들은 이층을 설핏 보고 내려오더니 나를 위아래로 쭉 훑어본 후 대문을 나갔다. 며칠 뒤에는 노모와 둘이 산다는 사십 대 남자가 집을 보러 왔다. 술에 찌든 것처럼 얼굴이 퍼석퍼석했고 표정도 어두웠다. 여러 사람이 다녀갔다. 나는 사람을 고르고 오는 사람은 집을 골랐다. 그러는 사이에 서로 적합한지 여러 잣대를 들이대었다. 어느 날 사십 대 아주머니가 혼자 집을 보러 왔다. 우리네 옛 시..
"봄은 처녀, 여름은 어머니, 가을은 미망인, 겨울은 계모" 일 년 사계절을 여인에 비유한 폴란드의 명언입니다. 봄은 처녀처럼 부드럽다. 여름은 어머니처럼 풍성하다. 가을은 미망인처럼 쓸쓸하다. 겨울은 계모처럼 차갑다. 봄 처녀가 불룩한 생명의 젖가슴을 갖고 부드러운 희열(喜悅)의 미소를 지으면서 우리의 문을 두드린다. 봄은 세 가지의 덕을 지닌다. 첫째는 생명이요, 둘째는 희망이요, 세째는 환희(歡喜)다. 봄은 생명의 계절이다. 땅에 씨앗을 뿌리면 푸른 새싹이 난다. 나뭇가지마다 신생의 잎이 돋고 아름다운 꽃이 핀다. 봄의 여신은 생명의 여신이다. 생생육육은 천지의 대덕이다. 세상에 생명이 자라는 것처럼 아름답고 신비롭고 놀라운 일이 없다. 시인이여, 생명의 아름다움을 노래하여라. 화가여, 생명의 신비..
제11회 동서문학상 금상 에로티시즘의 기호학은 여인의 다리에서 완성된다고 했다. 남자들은 여자들의 스타킹에 환호한다. 본다는 행위는 육감이 동원되기 마련이다. 다리의 아름다움은 스타킹에서 완성된다. 발끝서 엉덩이까지 입었지만 말갛게 속살이 비치니 감각이 핀처럼 날카로워지는 걸까. 미니스커트에 유혹이 강렬한 원색 스타킹을 신은 여인이 계단을 오르면 남자들은 목이 탄다. 스타킹과 속살의 색이 극명한 대조를 이루며 특별한 자극을 선사한다. 늑대들의 심장박동이 다급해진다. 한 걸음을 뗄 때마다 허벅지의 깊숙한 곳까지 숨바꼭질을 해대니 어질어질해지리라. 덩실 뜬 달도 내려와 핥고 싶어질 만큼 홀리는 곡선에 남자들의 성적 충동은 꼭대기에 다다른다. 페티시즘도 스타킹에서 퍼지지 않았던가. 책 ‘남자의 물건’으로 대박..
제11회 동서문학상 은상 겨울이 지나가는 바다는 부산하다. 끊임없이 물결을 만들어내는 바다와 하얗게 부서지는 포말, 얼굴에 부딪히는 갯바람이 봄을 재촉하듯 습습하게 불고 있다.군데군데 잔설이 남아 있는 건너편 해안 풍경도 이제 손에 잡힐 듯 정겹게 다가온다. 바알갛게 부서져 내리는 노을만이 숨죽인 채 밤을 기다리는 해안가의 건물에 엷은 실루엣을 드리우고 틈틈이 비어져 있는 공간마다 어둠을 채워 나간다.겨울이 가면 반드시 봄이 오는 자연의 섭리 속에 파도 소리만이 질펀한 삶의 눈물이 되어 내 가슴에 자박자박 녹아들고 있다. 바다의 냄새에 한껏 취해 걷는데 뭔가 발에 툭 걸렸다.돌이다. 돌은 붉은 노을빛에 몸을 말리는 듯 길게 누워 있었다. 돌을 집어 들고 이리저리 살폈다.보드라운 모래밭이 펼쳐져 있는 이곳..
제11회 동서문학상 은상 아침부터 시작된 장맛비는 오후에 들어서면서부터 빗줄기가 점점 굵어지기 시작했다. 장마가 시작된 지는 한참이나 지났지만 그동안 비다운 비가 내리지 않았다. 그런데 오늘은 비다운 비가 내리고 있다. 아침부터 나는 병실을 지키며 창밖을 주시하며 하염없이 내리는 빗줄기들을 바라보았다. 점점 어스름이 깔리기 시작하더니 검은 어둠이 온 대지를 감싸 안았다. 어둠이 온 대지를 감싸듯 내 온몸과 영혼도 감싸는 듯하다. 마음속에 시작된 고통은 온몸으로 퍼져 육신의 고통으로 다가오는 듯하다. 오랫동안 창밖으로 향해 있던 시선을 돌려 병실 침대에 삭정이와 같은 모습으로 누워 있는 아버지에게로 향한다. 병실 침대에 누워 잠들어 있는 아버지에게로 시선을 옮기자 나도 모르게 눈시울이 붉어진다. 빗줄기가 ..
제11회 동서문학상 동상 생이란 사랑 외에 다른 소명을 지녔을까. 그건 생물이건 무생물이건 마찬가지여서 마음을 열어 서로를 확인하는 순간부터 크나큰 우주적 흐름 그 근원적 에너지를 공유하게 되는 게 아닐까, 엄마가 나날이 여위는 동안 나는 나이답지 않게 생각이 많아지고 엉성한 애어른이 되어갔다. 가마솥의 가장자리를 꼭 짠 행주로 문질러 닦아놓기도 하고, 쇠죽 끓는 뚜껑을 뒤집어 물을 데우기도 하고, 여섯 살짜리 동생을 말갛게 씻겨 놓기도 하고, 저녁마다 등불 켜듯 떠오르는 별들을 하나하나 이름 불러 잠재우기도 했다. 그 애가 떠난 자리는 거꾸로 매달린 우물처럼 캄캄하고 아슬아슬해서 우리들 누구도 똑바로 들여다본다거나 다가갈 생각은 하지 않았다. 적당히 거리를 두고 돌아앉거나 먼 산을 바라보며 외면하려 했..
제11회 동서문학상 동상 친구가 조각보 하나를 보내왔다. 다과상이나 찻상을 덮을 만한 크기이다. 상보로 쓰기에는 좀 작은 듯하지만 외출을 할 때면 남편의 상을 보아서 이 조각보로 덮어둔다. 남편은 밥과 국에 두어 가지 반찬이면 족한 사람이라 크기가 적당하다. 젊은 시절에는 자질구레한 생활 소품들은 웬만한 것을 여러 개 두고 쓰기를 좋아했다. 바느질을 배워 손수 만들었다. 바느질하기를 좋아하는 탓도 있었지만 그런 것들을 일일이 사서 쓰기에는 생활이 바듯했다. 아이들 턱받이나 토시, 고무줄 바지, 전화기받침, 앞치마, 베갯잇, 커튼들을 만들었다. 이제 아이들은 자라서 집을 떠나고 우리 부부만 있어서 집안을 어지럽힐 일도 별로 없고, 매일 쓸고 닦아야 할 일도 줄었다. 아기자기한 소품들을 즐길 나이도 지나서 ..
제11회 동서문학상 동상 텅 빈 벽면에 흑백 사진 한 점이 걸려있다. 네 개의 팔로 세상의 위협과 폭력을 차단시키겠다는 듯 굳세게 끌어안고 있는 사진 속 두 남녀를 본다. 맞닿은 심장에서 솟구치는 힘찬 박동소리가 들린다. 그 박동소리에 몸을 실어 어딘가로 날아가고 있는 듯 여자의 입가엔 희마한 미소가 서려있다. 이 방의 이름을 지어주고 싶다. 서재라고 그냥 밋밋하게 부르기에는 방의 느낌이 너무 특별하다. 다갈색 벽지가 차분한 벽면을 따라 연한 검정 색깔의 나지막한 책장 두개가 이어져 있다. 그 앞으로 놓여 진 폭이 좁은 긴 책상이 책장과 맞춤인 듯 어우러진다. 책꽂이의 책들은 필를 나눈 혈육들처럼 다정히 포개어져 있다. 스틸 프레임이 심플한 데스크 탑과 하얀 색 복합기. 그것들이 이 방의 전부다. 세평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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