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회 경북일보 문학대전 동상 동트기까지는 아직 이른 시각, 모래톱은 포화가 끝난 전장처럼 높고 낮은 무덤이 즐비하다. 그 사이로 물줄기가 흐르고 군데군데 웅덩이가 널찍하다. 흐릿한 물속에는 수많은 치어와 미처 바다로 나가지 못한 숭어 한 마리가 지친 지느러미로 제 몸을 지탱하려 안간힘을 쓰고 있다. 위기에 갇혀 만조 시까지 참고 견뎌야 한다. 사주 사이의 웅덩이에 갇힌 바닷물은 모래톱으로 밀려났다가 쓸려 들기를 반복하고 있다. 때로는 높이, 때로는 낮게 오르내린다. 발등이 젖을까 봐 뒤로 물러섰다가 숭어의 움직임을 놓치지 않으려고 다시 제자리로 돌아와 앉는다. 물웅덩이에 갇힌 숭어처럼 나 역시 선택을 간과한 대가로 실패의 덫에 갇혀 이곳 적요한 모래톱에 서서 갑갑한 심사를 달래며 고독과 대치하고 있음이..
제7회 경북일보 문학대전 특별상 뼈들이 흐지부지하게 널려있다. 정의라고 신념 했던 가치나 사실들이 제대로 열려지는 일들이 없었다. 살아가는 일들이 내 생각과는 같이 움직이지 않았다. 사사불여의. 뼈대 있는 가문이니, 뼈가 있는 사람이라는 말은 집성촌의 고택과 같이 거대한 가문에서나 있을 수 있는 먼 일이었다. 나를 세울 수 없었다. 사리에 어긋나는 일이 있어도 적당히 얼버무려 버리고 만다. 어릴 적부터 어머니는 아버지의 뼈에 많은 억압을 가했다. 특히 외삼촌들과의 다툼에서 어머니는 아버지만 나무랐지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 외삼촌들을 나무라지 않았다. 작은 외삼촌은 정치를 하겠다고 했으나 여러 번 낙방했다. 본인은 물론 친척들께도 많은 손실을 끼쳤다. 이웃과도 싫은 소리가 나면 원인보다는 아버지의 의견을 막..
제7회 경북일보 문학대전 은상 춘양역 플랫폼에 섰다. 나란히 수평선 너머로 사라지고 있는 철길과 반세기 만에 조우(遭遇)한다. 만나서는 안 되는 평행선이 저 멀리 소실점으로 만나 사라진 철길을 하염없이 바라본다. 철길 가에 흐드러지게 핀 코스모스들은 나를 기억이라도 하는 것일까. 바람에 하늘거리는 여린 모습은 그 시절의 내 모습처럼 가냘프기만 하다. 바람이 부는 대로 어쩔 수 없이 흔들려야 했던 젊은 날의 자화상을 코스모스가 불러온다. “뚜~” 기적을 울리며 기차가 서서히 역으로 들어선다. 기적소리는 한순간에 세월을 되돌린다. 그날, 남편은 우유병과 기저귀를 챙겨 넣은 가방을 들고 앞서 뛰었다. 아기를 업은 나는 분명 뛰고 있었지만 걷는 듯 더디기만 했다. 저 멀리 기적을 울리며 기차가 산모롱이를 돌아오..
제7회 경북일보 문학대전 은상 길은 줄이다. 줄은 사람과 사람의 만남으로 이어진다. 길이 만남을 만들고 줄이 사람을 만들어 내는 가운데 저마다의 삶에는 갖가지 꽃이 피고 열매가 맺힌다. 만약 누군가가 옛길을 찾아 간다면 이는 과거의 어느 줄을 만나려는 갈망 때문이다. 가늘디가는 정맥 같은 산동네 집들이 골목을 따라 줄처럼 이어져 있다. 곁지기인 그와 나는 은혜를 갚는 까치의 심정으로 골목을 접어들었다. 사십 여 년이 지난 세월이건만 이곳만은 세월도 비켜갔나 보다. 그가 한 하꼬방 앞에 섰다. 집이 주인을 닮는 것일까, 아니면 주인이 집을 닮는 것일까. 사람은 분명 바뀌었는데 내미는 얼굴은 낯설어도 여전히 낯이 익다. 엄동설한, 아궁이 연탄불도 못 피울 형편이었을 때, 감자나 강냉이를 간간이 건네주었다는 ..
제7회 경북일보 문학대전 금상 한 마리의 거미가 촉수를 세운다. 천장을 올려다보니 까맣게 그을린 서까래 사이에 거미들이 이리저리 줄을 쳐놓았다. 바짝 다가가 거미줄을 살펴본다. 촘촘하니 방사형으로 쳐놓은 그물이 제법 정교하다. 자신의 몸속에서 진액을 뽑아내며 거미줄을 마무리 하던 작은 거미 한 마리가 인기척을 느꼈는지 천장 틈 사이로 몸을 숨긴다. 덩그런 기와집은 주인을 잃은 채 빈 집이 되어있다. 기와는 부스스하니 윤기를 잃었지만, 아침햇살은 예전처럼 두꺼운 마루에 반질반질 올라앉는다. 삐꺽거리는 마루에 올라 작은방 문고리를 잡는다. 베틀에 앉아 계신 어머니의 모습이 잠시 눈에 아른거린다. 작은방 문을 열어본다. 베틀이 놓였던 자리가 휑하다. 닳아버린 몽당 빗자루 하나가 구석에서 옛 기억을 쓸어내지 못..
목화가 툭 하고 고개를 꺾었다. 경주어 얻어 온 씨앗이 되 피우고 다시 살아나 여러 해 나의 뜰에서 산다. 솜이 칭칭 감긴 씨앗 몇 알을 누구에게 받아 왔는지 통 기억에 없다. 백련이 지고만 어느 논둑에서 받은 기억은 아련한데 누구였는지 무슨 일로 연 밭에서 목화씨를 건넸는지 아득하기만 하다. 마른 기억은 바람에 사라졌지만 해마다 야무진 검은 씨앗을 쓰다만 종이에 싸 확독에 보관해 둔다. 옹기에서 겨울을 난 씨앗은 봄이 되면 다른 일년초와 함꼐 뜰 여기저기 뿌려지는데 그 위치는 꽃 피는 여름이나 되어야 정확히 알게 된다. 마당 귀퉁이에 있는 듯 없는 듯 그렇게 꽃 피우고 지다가 초록이 쓰러지는 이맘때쯤 흰 솜꽃을 피워 존재를 드러낸다. 집 비운 사이 된서리가 다녀간 모양이다. 온통 뜰에 데쳐놓은 나물처럼..
젊은 치기와 늙은 달관이 한 몸에 존재한 백남준이 바이올린을 끌고 우주 밖으로 떠나갓다. 바이올린은 켤 수도 있지만 끌 수도 있다는 것을 우리에게 몸소 보여준 그는 전복과 발칙함을 일생의 미덕으로 삼았다. 그는 흰 장미가 드리운 관 안에 배추 색 저고리를 입고 두 손은 가지런히 배 위에 놓은 채 누워 있다. 생전의 그의 삶은 결코 조용하지 않았지만 누구나 가는 순간은 고요할 수밖에 없나 보다. 피아노를 부수고 관객의 머리에 세제를 부으며 자신의 알몸이 첼로가 되기도 했던 그의 생전모습을 기억하자니 고요한 그의 모습이 낯설기 그지없다. 조사弔使를 마친 오노 요코가 옆 사람의 넥타리를 자른다. 조문객 역시 일제히 옆 사람의 넥타이를 자르기 시작한다. 혹 비싼 넥타이라면 나중에 그를 만나 보상받으라는 사회자의..
종잡기 어려운 상념에 빠졌다. 러닝머신에 오르더니 주저 없이 달리기 시작했다. 광야를 질주하는 말 같았다. 쿵쾅쿵쾅! 발판을 딛는 소리에 힘이 넘쳤다. 힐끗 곁눈질로 내 오른쪽 옆자리의 그를 훔쳐보았다. 건장한 청년이었다. 나는 러닝머신의 양손잡이를 잡다 말다 하면서 보통 걸음으로 걷고 있었다. 시선은 앞에 켜놓은 텔레비전을 향했다. 다른 사람이 봤으면 운동을 하는지 텔레비전을 시청하는지 분간이 가지 않을 정도의 그런 모양새였다. 옆자리에서 달리는 그 청년을 의식하기 시작하면서 내 마음과 몸이 힘없이 허물어지는 것 같았다. 그럴수록 마음속에서 이상한 오기 같은 것이 스멀스멀 일었다. “힘자랑하지 마. 왕년에 나도 너 못잖았어. 나뭇짐 지고 산길을 거침없이 달렸지. 무시하지 마. 알았어.”라고 괜스레 자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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