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을 있는 그대로 사랑하는 법을 배우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린다. 자기 주위에 있는 사람들을 자기 비슷하게 만들려고 애쓰는 버릇이 깊이 뿌리박혀 있기 때문이다. 상대방을 자기 비슷하게 만들려고 하는 노력을 사람들은 흔히 사랑 혹은 애정이라고 착각한다. 그리고 대상에 대한 애착의 도(度)가 높으면 높을수록 그 착각의 도도 높아진다. 그 노력이 실패로 돌아가게 되면, ‘애정을 쏟았으나 상대방이 몰라주었다.’고 한탄하는 것이다. 우정이든 성정(性情)이든 진정한 애정은 상대방을 있는 그대로 사랑하는데서 비롯된다. 있는 그대로의 한 사람을 가능한 한 편안하게 해주려는 노력에서 출발하는 것이다. 이 사실은 사람과 사람의 관계를 떠나 사람과 사물의 관계를 생각하면 자명해진다. 우리가 조선의 백자 촛대 하나에 애착을..
그 학원 상담선생 성질이 왜 그래? 괜히 막 흥분해서 혼자 화내더라! 현이 엄마가 자기 아이 이번에 들어갔는데 자리 많다기에 전화해서 지금 등록하러 가겠다고 했더니 지금은 안 된다, 상담 약속 하고 와라, 요일 시간 잡아서 와야 한다, 그러는 거야. 아니 전화 받고 있으면 자리에 있는 건데 왜 상담이 안 된다는 거야? 무슨 학원이 아무 때나 상담이 안 돼? 그리고 지금은 정원이 다 차서 못 넣어준다나? 현이 엄마 말이 애들도 몇 명 없다던데 무슨 자리가 없냐고? 내가 자리 있다고 들었다 그랬더니 누가 그러더냐? 학생 이름이 누군지 대라, 그러면서 화를 내는 거야. 내 참 기가 막혀서. 그래서 내가 왜 화를 내냐고 했더니 뭐래더라. 내가 자기 말을 안 믿는다나 뭐라나. 아니 그거야 학원들이 상업적으로 괜히..
세상의 모든 길은 누군가의 한 걸음에서 시작되어 시간이 채워지며 다져지는 줄만 알았다. 이사 온 지 6년 반 만에 도시를 둘러싼 산책로를 알게 되었다. 신도시의 힐링 공간으로 휴먼 링을 만든다고 홍보가 꽤 있었지만 그 길이 이 도시의 가치를 높여줄지도 모른다는 기대를 한 적이 없기에 관심이 없었다. 더구나 잠만 자고 빠져나가 다른 곳에서 일을 보고 늦은 시간에 퇴근하는 나는 깜깜한 길을 걸을 이유도, 걷고 싶은 생각도 없었다. 그런데 운동 부족이 심각한 내게 지인이 좋은 산책로를 옆에 두고 왜 이용을 하지 않느냐고 한다. 어느새 도시 계획 설계대로 안쪽으로는 아파트가 쑥쑥 올라가고 눈길조차 보내지 않았던 바깥쪽으로는 조금씩 초록이 채워지고 있었던 것이다. 1980년대 신작로가 생기기 전까지 시골은 ‘구부..
문맥을 따라 흐르며 내용을 따라 주인공이 되는 것은 독서의 자연스러움이라 할 수 있다. 작가가 밝히지 않고 숨긴 의도를 상상으로 짚어 보는 등 책 속에 묻혀 뒹구는 것이 일상이 되어 있다. 글자를 따르는 책 읽기는 때로 옆길을 넘나본다. 책에 적힌 대로의 띄어쓰기를 무시해 다른 단어를 만들거나 앞 뒤 문맥을 떼고 단어만을 뚫어져라 쳐다보기도 한다. 변검술은 수시로 필요한 독서의 기술이 아닐지. 알랭 드 보통의 에 언어유희라고 할 만한 한 획 차이의 글자로 다른 뜻을 뜻하는 유머가 종종 나온다. 에 ‘단어들이 혐오스러워지는 것은, 단지 그 단어들만 사용하고 다른 수많은 단어들을 사전 속에 썩히는 사람이 우리들을 짜증나게 만들 때이다. (대신에). 곧바로, 한순간에, 눈 깜박할 사이에, 1분 이내에, 번개처..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에 갈 때마다 마음은 기대감에 부푼다. 낯선 장소에 불시착한 것도 같고 멀리 떠나온 예술가의 고향에 안착한 기분에 휩싸이기도 한다. 건물을 휘감아 도는 선을 따라가면 어딘가에 닿아 미래로 가는 지름길이 나타날 것 같은 외관 때문이기도 하다. 김초엽 소설《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에서처럼 미래로 가는 우주선 문이 열리기를 기다리는 심정이 된다. 디디피에서 팀랩(TeamLab:LIFE. 2020.9.25.~2021.8.22)전시회가 열리고 있다. 2011년 시작한 팀랩은 예술가, 프로그래머, 컴퓨터 그래픽 애니메이터, 수학자, 건축가등의 전문가들이 모여 상설전시 및 아트 기획전을 하는 인터내셔널 아트 컬렉티브 팀이다. 첫 작품 을 대한다. 작품의 주재료인 나무의 생김새가 한..
눈이 내린 것을 보고 있으니, 문득 운주사에 가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운주사는 전라남도 화순에 있는 작은 절. 몇 년 전 국문과 학생들과 함께 떠난 답사 여행 때 처음 그곳을 보았다. 늦은 봄날이었다. 광주 지나 화순 시골에 버스가 섰다. 아침부터 내리던 비가 가랑비로 변한 채 계속 내리고 있었다. 우산을 들고 논두렁 길을 조금 가니 운주사가 보인다. 길가 산자락에 작은 돌부처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다. "아니 이게 뭐야?" 놀라서 부처들을 다시 본다. "세상에 이런 부처들이 있다니…." 운주사 계곡에는 못생긴 돌부처와 돌탑들 천지다. 나는 몇 년이 지난 지금도 그때 본 부처들이 준 충격, 특히 미적(美的)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어느 사찰을 가 보아도 대웅전에 모신 부처는 모두가 이목구비가 ..
부천신인문학상 당선작 복숭아를 사서 냉장고에 넣어 두었다. 며칠 후 꺼내 보니 서로 살이 맞닿은 부분은 썩어가고 있다. 서로를 너무 깊이 알아버린 탓일까. 아니면 살을 맞대고 있으면서도 서로를 모른 탓일까. 복숭아도 적당한 거리가 필요했나 보다. 짓무른 상처에서 과즙이 뚝뚝 떨어지는 복숭아를 보면서 거리를 생각해 본다. 나는 예순이 코앞인 나이에도 사람 사이의 거리를 가늠하지 못한다. 아직도 설익은 눈으로 한 올의 의심도 할 줄 모른다. 그 덕에 가끔 믿었던 사람들로부터 실망하기도 한다. 그때마다 다시는 실수하지 않으리라 다짐하지만, 여전히 똑같은 실수를 되풀이한다. 설마, 하는 믿음이 변하지 않을뿐더러 바닥이 빤히 보이는 내 사유로는 상대와 유지해야 하는 거리를 알 수 없기 때문이다. 남편과의 거리는 ..
2014년 제12회 동서문학상 금상 모시 적삼을 생각나게 했던 날씨가 지쳤는지 수그러들었다. 가는 곳마다 솔향 가득한 강릉, 혼자서 떠나온 이박삼일 간의 여행 마지막 날이었다. 아쉬운 마음을 접고 숙소를 나오자 해변에서 들었던 파도 소리가 귓가를 맴돌았다. 아침 산책길에서 만났던 청설모도 눈에 아른거렸다. 문학의 발자취를 찾아보는 것도 좋았지만 자연에 흠뻑 취할 수 있어 더 좋았다. 모처럼 혼자만의 여행은 나 자신을 돌아보는 기회이기도 했다. 김시습기념관을 가기 위해 들렀던 버스정류장에서 있었던 일이다. 세월의 발자국 가득한 얼굴, 닳고 닳아버린 손톱에 눈길이 멈췄다. 순간, 낯선 할머니 손을 덥석 잡고 만지자 마음이 손등을 타고 마음으로 건너왔다. 할머니는 빙그레 웃으며 그윽한 눈으로 내 얼굴을 쳐다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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