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자 소리에 잠이 깼다. 요즈음 흔한 이모티콘 새해 인사거니 했다. 의외로 초등학교 동창 한 명의 짤막한 부고였다. 우리 대부분이 6.25가 끝나는 해에 입학한 해방둥이들이다. 2019년의 통계청 발표를 보면 1945년생 남자의 기대여명이 12년이니 86세까지는 살 수 있다는데 조금 이른 감이 있다. 육십여 세에 일손을 놓았으니까 어느덧 이십여 년이 지났다. 초등학교를 다시 입학한다 해도 대학을 졸업할 정도로 충분한 시간이다. 요즈음 여기저기서 100세 인생이니 제2의 인생이니 하며 야단이다. 그러나 불행히도 우리 세대의 대다수는 이 문제에 대해서 준비되어 있지 않다. 초고령화 시대가 정착되기 시작하는 과도기에 살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나도 그렇다. 오늘이 내일 같고 내일이 오늘 같은 날을 되풀이하다 ..
설거지를 마치자마자 뭐라도 써볼 요량으로 노트북을 열었다. 빈 화면을 멍하니 바라보다 계간 시 전문지 ⟪Position⟫을 펼쳤다. 나에게 시는, 창작의 마중물이다. 시가 열어주는 세상을 산책하다 보면 뜻밖의 길을 발견하고는 했다. 그런 행운을 기대하며 펼친 페이지 중간 부분을 읽고 있을 때였다. 정말, 느닷없이, 시를 쓰는 노나 선생이 떠올랐다. 노나 선생 시가 읽고 싶어졌다. 이런 ‘생각의 점핑(jumping)’은 도대체 어디서 튀어나오는 건지…. 과학적으로 분석한다면 꼬리에 꼬리를 문 어떤 연상 작용의 결과라 하겠지만, 내게는 그저 뜬금없이 발생하는 현상이었다. 노나 선생에게 날아가버린 ‘집중’에 굴복해, 읽고 있던 책을 덮었다. 책장에서 이노나 시집 ⟪마법 가게⟫를 꺼냈다. 노나 선생과 나는, ‘..
사람은 자기와 비슷한 사람을 좋아한다고 한다. 서로 겹치는 부분이 있어서 짝이 되고 친구가 된다. 그렇게 만나도 어느 시점에선가, 나와 다른 상대의 생각에 움칫 놀란다. 어느 날 지하철을 타려고 친구와 나란히 섰다. 지하철 스크린도어에는 시가 있다. 자연스럽게 하얀 글씨에 눈이 갔다. 친구는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이것도 시(詩)라고... 시시하다’고 했다. 같은 순간, 다른 생각을 했으니 잠시 멀어짐을 느낀다. 평소 스크린도어의 시를 자주 읽는다. 주변에는 답답하다고 지하철타기를 꺼리는 사람이 꽤 있다. 메마른 일상에 위로가 되길 바라며 문화예술을 지하철에 끌어들였다. 어느 누구도 시에 쉽게 다가갈 수 있어서 좋다. 한술 더 떠 옆의 빈 유리에 영어로 번역해서 실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던 터이다. 문화예술..
서울농대 그룹 의 ‘나 어떡해’, 신해철의 ‘그대에게’, 샤프의 ‘연극이 끝난 후’ 등은 MBC 대학가요제의 산물이다. 이보다 좀 앞선 시대, 내 나이 스무 살 때 팝뮤직을 좋아하던 나는 통기타를 배우고 있었다. 어느 날 같은 대학교, 다른 학과의 친구가 말했다. “우리 신입생 환영회 때 노래하나 할까?” 내가 말하길, “엥, 갑자기 무슨...?” 친구는 다시 말했다. “선배에게서 제안이 들어왔어. 노래 한 곡 불러달라고...너와 내가 듀엣으로 하면 될 것 같아서...” 그리하여 우린 아주 오래 전, 어느 해 3월에 강당에서 기타를 치며 선배의 자격으로 노래를 불렀다. 그 친구는 졸업 후 K 방송국 아나운서가 되었다. 우리가 부른 노래는 미국 팝가수 ‘밥 딜런’의 노래 ‘Blowing in the win..
운명은 우연으로 다가와 필연으로 자리매김한다. 그 순간에는 인지하지 못하고, 시간이 흐른 후에야 인식하게 된다. 28년 전 우리의 만남도 그러했다. 그해 겨울은 유난히 추웠다. 당시 나는 1년 남짓 이어온 신경외과 전공의 생활을 중단하고 방황하고 있었다. 그럴만한 사연이 있었다. 지난 연말 나는 삼십 대 남성의 주치의를 맡았다. 유전성으로 발생한 다발성 뇌 혈관종 환자로 애초에 완치는 불가능했다. 이 방면에 권위자라는 담당 교수는 치료방법을 선뜻 정하지 못하고 차일피일 미루었다. 입원 후 일주일 만에 뇌압을 낮추는 간단한 수술을 시행하는 것으로 결정했다. 그 사이 환자의 의식은 명료했고 다른 문제도 없었다. 그런데 수술 예정일 새벽에 환자가 갑자기 혼수상태에 빠지더니 중환자실에서의 집중치료에도 이틀 후 ..
늦은 점심을 먹으러 죽집에 갔다. ‘사회적 거리 두기’가 한창인 요즈음에는 식당이 한가해지는 시간에 찾는다. 식당 안에는 중년 남성 한 사람뿐이었다.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주문하고 식사가 나오기를 기다렸다. 그런데 그 남성의 말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전화 통화하는 소리였다. 다소 격앙된 어조에 육두문자가 섞여 나왔다. 계속 듣고 있자니 기분이 언짢았다. 말소리는 언제 어디서나 들려온다. 대화 자제를 권고하는 사회 분위기임에도 마찬가지다. 침묵이 미덕이 된 지금, 나에게는 언제 들어도 기분 좋은 말소리가 있다. “안∧녕∧하∧십∧니∧까? 류∧0∧0∧입∧니∧다.” 갑작스러운 추위로 마음이 스산해진 아침, 첫 환자의 음성이 대기실에 울려 퍼졌다. 독특한 억양이었다. 특정 지역의 사투리가 아니었다. 느릿느릿,..
나는 바위다. 산꼭대기에 울타리처럼 쳐있고 숲이 나를 떠받치고 있다. 내 몸이 안개에 싸였다가 걷힐 때 어떤 등산객은 나를 ‘신처럼 여기며’ 두 손을 모아 기도를 하고, 사진사는 ‘와 멋지다’고 큰소리를 하면서 카메라를 연신 들이댔다. 나는, 내가 높은데 산다는 이유로 사람들이 우러러본다는 착각 속에서 내 안의 뿌리가 썩는 줄 몰랐다. 천둥·번개 치고 비바람이 불던 어느 여름, 사람 머리통만 한 몸 일부가 떨어져서 산 아래로 곤두박질쳤다. 데굴데굴 굴러서 큰 소나무에 기대고 있었다. 소나무에 말을 걸었다. “여기가 어디야?” “천불동, 너는 어디서 굴러온 돌멩이니?” “내 뿌리는 설악산 울산바위야, 천연기념물 제171호로 높이가 950m나 된단다. 나를 몰라보다니….” 바위는 돌멩이라는 말에 화가 치밀었..
"여자로 태어난다면 뭐를 가장 갖고 싶으세요?" 한 인터뷰에서 이 질문을 받은 심리학자 조던 피터슨(Jordan Peterson)이 대답했다. "오르가즘을 많이" 그 말을 듣고 내 귀를 의심할 정도로 충격을 받았던 기억이 생생하다. 하버드대 교수 출신인 캐나다 심리학자 조던 피터슨은 최근 이라는 책과 강연으로 유튜브에서 수백만 이상의 조회수를 올리며 현대인들에게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그런 그가 여자로 태어난다면 제일 갖고 싶은 것이 오르가즘을 많이 느끼는 일이라니 학자이기에 앞서 원초적인 본능을 여지없이 보여주는 남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프로이드는 성적인 에너지가 인간 성장에 잠정적으로 큰 역할을 한다고 말했는데, 피터슨도 심리학을 전공한 사람이지만 어떤 잠재적 문제의식을 갖고 있었던 것일까? 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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